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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사냥개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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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혁이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빛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주의 시작 이전으로 소멸해 있었다. 눈꺼풀을 미세하게 밀어 올리려 하자마자 안구 주변에 들러붙은 피딱지와 진물이 살점을 찢는 듯한 극통을 유발했다. 비명이 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오려 했으나, 사혁은 어금니를 부러질 듯 깨물며 그것을 삼켰다. 황실 암살 조직 흑탑(黑塔)의 살수로서 뼈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비명은 적에게 자신의 위치와 약점을 노출하는 가장 확실한 단서일 뿐이다.


손을 더듬어 얼굴을 만졌다. 거칠고 때 묻은 삼베 천이 눈가를 질질 묶어 단단히 압박하고 있었다. 늙은 묘지기 백 노인이 묶어준 무명 안대였다. 빈 안구 구멍에서 느껴지는 텅 빈 허무감과 썩어 들어가는 살점의 열기가 손가락 끝을 타고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절벽 아래로 던져지던 그날 밤의 비바람 소리, 동료들의 차가운 비웃음, 그리고 첫 번째 배신자 철호의 잔인한 검풍 소리가 이명처럼 뇌리를 헤집었다.


“깨어났느냐.”


낮고 탁한, 흙먼지가 서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사혁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눈 대신 귀가 본능적으로 그 소리의 거리를 쟀다. 대략 일곱 자 거리. 바닥의 삐걱거리는 나무 판자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백 노인이었다. 이곳은 음침한 빗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한 공동묘지 귀림(귀림) 한가운데에 위치한 백 노인의 오두막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귀림의 절벽 아래에서 네놈을 끌고 올 때, 온몸의 뼈가 어긋나 있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귀신이 도울 일이지.”


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힘도 없었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의 혀를 굳게 만들었다. 살인 병기로 살아온 지난날의 업보가 이 가혹한 어둠으로 돌아온 것인가 하는 자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아주 가볍고 맑은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딸랑.*


맑고 높은 구리 방울 소리였다. 그 소리는 사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끈적한 어둠과 웅웅거리는 이명을 단숨에 베어내며 맑은 균열을 일으켰다. 소리는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약초 물 끓여왔어요.”


작고 어린 목소리. 귀림 주변을 떠돌던 눈 먼 고아 소녀, 아연이었다. 사혁은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그 소리의 주파수를 쫓았다. 아이의 가슴께에서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구리 방울 소리가 사혁의 머릿속에 하나의 작은 빛줄기처럼 이정표를 그렸다. 시각을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사냥개에게, 아이의 방울 소리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구원의 선율이었다.


사혁은 이대로 누워 썩어갈 수 없었다. 복수의 칼날을 갈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서야 했다. 그는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상실된 시각은 균형 감각마저 완전히 앗아간 상태였다. 발을 땅에 딛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세상이 사정없이 뒤틀리며 무너져 내렸다.


*쿵!*


사혁의 몸이 오두막 바닥으로 사정없이 처박혔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상처 입은 옆구리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밖으로 기어 나가려다 문밖의 가시덤불에 온몸이 찢기며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고 쓰러졌다. 진흙탕에 얼굴을 묻은 채 사혁은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미련한 놈.”


백 노인이 혀를 차며 다가와 낡은 대나무 지팡이를 사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은 평범한 지팡이처럼 보였으나, 훗날 사혁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될 죽장검의 외피였다.


“눈이 먼 자는 발바닥과 지팡이 끝으로 세상을 읽어야 하는 법이다. 땅을 쳐라. 소리의 반사를 느껴라.”


사혁은 지팡이를 꽉 쥐고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타앙!*


맑고 날카로운 타격음이 좁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혁의 예민해진 고막을 자극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귀림의 온갖 기괴한 바람 소리, 벌레 울음소리,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한꺼번에 고막으로 들이쳤다. 뇌가 터질 듯한 극심한 이명과 관자놀이의 통증이 사혁을 덮쳤다. 사혁은 머리를 감싸 쥐고 다시 쓰러졌다.


“감각이 너무 열려 있구나. 뇌가 소리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게야.”


백 노인이 품에서 축축하고 푸르스름한 이끼를 꺼냈다. 귀림의 가장 깊고 습한 무덤가 바위 틈에서만 자라는 ‘귀림 청각이끼’였다. 노인은 그것을 거칠게 빻아 사혁의 입에 밀어 넣었다.


이끼를 씹자마자 혀의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독특한 유황 냄새와 함께 후각과 미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청각이끼의 가혹한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귓구멍 내부를 꽉 채우고 있던 터질 듯한 압력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고막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이명으로 터질 것 같던 관자놀이의 통증이 기적적으로 가라앉았다.


사혁은 단전으로 호흡을 내렸다. 과거 스승 독고창의 이청득심결 구절을 떠올리며, 맥박을 늦추고 소리를 필터링하는 청풍이청법(聽風耳聽法)의 호흡을 전개했다. 맥박이 느려지자 귀를 찌르던 잡음들이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그는 다시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툭 쳤다.


*톡.*


이번에는 소리가 찢어지지 않았다. 방출된 음파가 오두막의 사방 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미세한 시간 차가 사혁의 고막에 잡혔다. 머릿속의 어둠 위에 투명한 백색 선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네모난 방의 경계, 낡은 가마솥의 위치, 문틀의 높이, 그리고 아연이 서 있는 작은 신형까지 주변 5장(약 15미터) 이내의 정적인 공간이 입체적으로 매핑되었다. 이청득경(耳聽得景)의 첫 경지가 암흑 속에서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사혁이 스스로 세상을 그리기 시작한 그때, 오두막의 거친 나무 문이 벌컥 열렸다.


차가운 빗바람 냄새와 함께 백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평소와 달리 극도로 무겁고 다급했다. 사혁의 머릿속 백색 지도에 백 노인의 흔들리는 맥박 소리가 붉은 경고등처럼 잡혔다.


“사혁아, 숲속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백 노인이 젖은 지개를 내려놓으며 낮게 속삭였다.


“약초를 캐러 귀림 북쪽 고분군으로 갔는데, 평소에 보이지 않던 사나운 자들의 발소리가 잡혔다. 가죽 장화를 신고 쇠붙이를 숨긴 보법이다. 흑탑의 하부 조직 놈들이 분명해. 놈들이 이 오두막 쪽으로 수색망을 좁혀오고 있다.”


사혁은 조용히 대나무 지팡이를 거머쥐었다. 지팡이 손잡이 안쪽에 숨겨진 백련강 검신의 차가운 기운이 그의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멀리서, 아주 미세하지만 묵직한 발소리가 귀림의 안개를 뚫고 오두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축축한 흙을 밟는 거친 가죽 장화의 마찰음. 적들의 숨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혁의 예민해진 귀에 걸려들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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