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의술의 유산, 깊은 안개의 안식
빗방울이 가늘게 쪼개져 이마를 가린 하얀 안대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수분이 피와 그을음으로 얼룩진 천을 적실 때마다, 은랑은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쾌검 자객 비소에게 꿰뚫린 옆구리 상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벌어지며 뜨거운 선혈을 쏟아내고 있었다. 석문강의 한독(寒毒)마저 체내 깊숙이 침투해 뼈마디가 시리도록 굳어가는 최악의 상태였다.
하지만 은랑은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품에는 오 의원의 시신을 안고 소리 없이 흐느끼는 설아가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전신을 바르르 떠는 소녀의 가냘픈 무게감이, 부러지기 직전의 대나무 지팡이 ‘청풍’을 쥔 은랑의 손끝을 통해 무겁게 전해졌다.
석문진 남쪽의 오씨 의원은 이미 불타 무너져 내렸다. 사방에 매캐한 약초 타는 냄새와 장 단주 무리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은랑은 뇌영의 저격수가 쏜 독침의 기척을 피해, 설아를 부축한 채 석문진 외곽 대나무 숲 깊은 곳에 위치한 청풍헌의 지하 동굴로 은신했다.
동굴 내부는 어둡고 습했다.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정적의 공간이었으나, 은랑의 귓가에는 여전히 불꽃이 타오르며 내던 약방의 비명 소리와 오 의원의 마지막 유언이 이명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설아를…… 부탁하네…… 자네를 살려준 대가로…… 이 아이를 지켜주게…….’
“으윽……!”
은랑은 청풍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무릎을 꿇었다. 단전에서 역류한 탁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붉은 피를 한 줌 토해냈다. 뇌 신경 과부하(腦神經過負荷)였다. 비소와의 대결에 이어 장 단주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무리하게 초청각과 기류 감지를 동시에 전개한 대가는 참혹했다. 머릿속이 수천 개의 바늘로 찔리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고, 안대 너머 먼 눈가에서는 다시 뜨거운 핏물이 배어 나왔다.
‘나 때문이다.’
은랑은 차가운 동굴 바닥을 움켜쥐며 자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을 지배하던 흑탑의 사냥개 신세에서 벗어나 평범한 청소부로 살아가려 했건만, 결국 자신의 뒤를 쫓아온 조직의 추격대가 생명의 은인인 오 의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은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재앙만을 몰고 다니는 피비린내 나는 살수, 괴물에 불과했다. 복수의 칼날을 갈수록 무고한 백성들의 피가 길을 적시는 이 가혹한 굴레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깊은 회의와 절망감이 은랑의 영혼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그때였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는 설아가 은랑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슬피 울고 있었으나, 은랑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눈물을 훔치고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떨림과 온기. 설아의 가냘픈 손길은 은랑의 차가운 뺨을 감싸 안으며 그가 괴물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설아는 은랑의 손바닥을 펼치더니,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글씨를 써 내려갔다.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나를 지켜준 유일한 구원자예요.]
소녀의 거친 손가락이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은랑의 심장박동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말이 없는 비언어적 소통이었으나,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깊은 신뢰와 온기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심으로 미쳐가던 은랑의 내면을 따뜻하게 구원해 주었다.
이윽고 설아는 자신의 품속 깊은 곳에서 아버지가 남겨준 유품을 꺼내 은랑의 손에 쥐여주었다. 묵직하고 낡은 가죽 서책이었다. 오 의원이 사망하기 전 설아에게 맡겼던 ‘오 의원의 비밀 침술첩’이었다.
은랑은 떨리는 손끝의 촉각으로 가죽 표면을 쓸어내렸다. 서책의 책장을 넘기자, 일반적인 종이와 달리 얇은 구리판에 미세하게 양각으로 새겨진 기경팔맥의 침술도가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읽혀왔다. 눈이 먼 은랑이 만져서 읽을 수 있도록 오 의원이 평생을 바쳐 특수하게 제작해 둔 의술의 유산이었다.
‘금침봉경술(針封經術)…….’
손끝으로 침술첩의 구결을 읽어나가던 은랑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찢어지거나 상처 입은 경맥의 구멍을 특수한 금침으로 강제로 메워 진기의 누출을 막고, 일시적으로 뇌 신경의 발열을 진정시키는 비기였다. 하지만 이 비술을 쓸 때마다 기경팔맥의 잠재된 생명력을 연소시켜 향후 수명이 서서히 단축되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후우…….”
은랑은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며 단전의 진기를 스스로 통제해 보려 했다. 그러나 찢어진 경맥의 틈새로 내력이 걷잡을 수 없이 새어 나가며 가슴에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일어났다. 자력으로는 이미 폭주하는 진기를 정돈할 수 없는 한계 상태였다.
설아는 은랑의 고통을 직감하고 한빙석 침통에서 눈부신 금빛을 발하는 명문금침(命門金針)을 꺼냈다. 소녀는 은랑의 손을 잡아 침의 끝부분을 쥐여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은랑의 머리 혈자리를 짚어주며 그가 스스로 침을 놓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인도했다. 설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은랑을 살리겠다는 의지만큼은 단단했다.
은랑은 설아의 손길을 이정표 삼아 자신의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百會穴)을 향해 금침을 가져갔다. 살수로서 수많은 인체의 급소를 찔러왔지만, 자신의 머리에 생사의 침을 꽂는 것은 육체적 한계를 시험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믿어주는 설아의 따뜻한 호흡이 귓가에 닿자, 은랑의 손끝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스윽.
은랑이 자신의 머리 백회혈에 스스로 금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찰나의 순간,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발적인 열기가 거짓말처럼 일시에 멈추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요동치던 뇌 신경의 과부하 발열이 한천담의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어내렸고, 시야를 가로막던 극심한 두통과 이명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윽고 동굴 밖 대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바람의 흔들림과 빗방울이 대나무 잎에 부딪히는 맑은 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선명하고 정교하게 조율되기 시작했다. 초청각의 동조율이 완벽하게 회복된 것이었다. 은랑의 내면에 서려 있던 잔혹한 복수의 살기가 맑은 도가 기공의 흐름과 동조하며 차분하게 정화되었다.
자신의 복수가 단순한 살육이 된다면 스스로 마도에 빠질 터였다. 은랑은 오 의원의 유산과 설아의 신뢰를 통해, 무고한 이들을 수호하겠다는 의협의 마음을 무학의 새로운 의념으로 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바로 그때, 동굴 입구의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다급하게 뛰어오는 거친 발소리가 은랑의 초청각에 잡혔다. 가벼우면서도 다급하게 흙바닥을 딛는 발걸음, 거지 첩보원 칠성이었다.
칠성은 숨을 헐떡이며 동굴 내부로 들이닥치더니 은랑의 앞에 엎드려 비보를 전했다.
“큰형님! 큰일 났습니다! 뇌영 그 악독한 놈이 조 할머니와 석문진 주민들을 전부 납치해 폐채석장 벼랑 끝에 묶어두었습니다! 당장 형님이 청풍검을 버리고 걸어 나오지 않으면, 사방에 매설된 뇌공탄 화약에 불을 붙여 주민들을 통째로 폭사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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