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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약방의 붉은 눈물, 오 의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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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은랑의 손가락이 소리 없이 청풍검의 칼날을 안개 속으로 뽑아 올렸다.


서서서석.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나무 지팡이 청풍의 갈라진 틈새를 뚫고 흘러나온 청풍검(靑風劍)의 푸른 칼날은, 마치 대기 중의 안개와 동화되듯 소리조차 내지 않고 뻗어 나갔다. 검날 중심부에 조각된 미세한 홈들이 공기의 흐름을 강제로 흡수하며 마찰음을 완전히 지워버린 탓이었다.


“무엇이……!”


비소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연검 풍음이 은랑의 옆구리를 관통한 순간, 완벽한 승리를 확신했던 자만심이 찰나의 침묵 속에서 산산조각 났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검로(劍路)라니. 그것은 살수들의 신이라 불리는 탑주 독고황의 무음검이나, 과거 숙청당했던 전대 고수 사천무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경지였다.


은랑은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피를 느끼며 단전의 진기를 청풍검으로 밀어 올렸다. 석문강의 차가운 물속에 오래 잠수하여 전신에 스며든 한독(寒毒) 탓에 기혈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지금 검을 멈추면 자신과 설아 모두 개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은랑은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두통을 악물고 견디며, 공기의 저항 자체를 베어내는 심풍검의(心風劍意)를 폭발시켰다.


스으윽.


청풍검의 칼날이 비소의 연검 풍음의 측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정면으로 부딪쳐 힘을 겨루는 대신, 연검이 공기를 밀어내며 만든 미세한 기류의 결을 타고 미끄러지듯 파고드는 검로였다.


카강-!


소리 없이 짓쳐 든 푸른 검기가 비소의 연검 날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비소는 검 끝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예기에 경악하며 급히 신법을 전개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청풍검의 무형 검풍은 이미 그의 오른쪽 뺨과 어깨를 깊숙이 베고 지나간 뒤였다. 비소의 검은 가죽 옷이 찢어지고 선혈이 안개 속으로 비산했다.


“자네가…… 사천무 장인의 진짜 후계자였군.”


비소는 쪼개진 연검 자루를 쥔 채,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움켜쥐었다. 그의 오만한 눈빛에 처음으로 깊은 공포와 경외심이 깃들었다. 은랑의 옆구리를 꿰뚫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소리 없는 반격은 치명적이었다. 더 이상 무리하게 전투를 지속하다가는 자신의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음을 직시한 비소는 안개 속으로 신형을 감추며 빠르게 퇴각했다.


“…….”


비소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은랑은 청풍검을 대나무 지팡이 내부에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 옆구리의 관통상과 어깨, 허벅지의 자상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한독과 실혈로 인해 단전의 기맥이 요동치며 시야가 아득해지는 현기증이 밀려왔다. 은랑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으로 쓰러지려 했다.


그 순간, 가냘프고 따뜻한 손길이 은랑의 뺨을 감싸 안았다. 설아였다.


설아는 목소리를 내지 못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지만, 그녀의 가쁜 호흡 소리와 은랑의 손등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져 숲속에서 급히 채집했던 백련초(白蓮草)를 꺼냈다. 약초를 입으로 짓이겨 은랑의 옆구리와 허벅지 상처에 바르고,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단단히 동여맸다.


쌉싸름한 약초의 기운이 상처 부위의 독기를 조금씩 중화시키며 피를 멈추게 도왔다. 은랑은 설아의 어깨에 의지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만신창이였고 관자놀이의 이명은 멈추지 않았지만, 한독의 냉기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기혈이 미약하게나마 돌기 시작했다.


‘의원으로 가야 한다. 오 의원님께…….’


은랑은 설아의 인도를 받으며 석문진 남쪽에 위치한 오씨 의원을 향해 피 흘리는 걸음을 옮겼다. 숲을 벗어나 석문진 경계에 들어설 때쯤, 밤하늘은 폭우가 쏟아지기 직전의 축축하고 무거운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의원에 가까워질수록, 은랑의 예민한 청각에 불길한 소리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타닥, 타다닥…….


대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른 목재가 열기에 폭발하며 내는 불꽃의 비명이었다. 매캐한 그을음 냄새와 귀한 약초들이 타들어 가는 쌉싸름한 연기가 강바람을 타고 은랑의 코끝을 찔렀다. 설아의 걸음걸이가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그녀의 심장박동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으읍……!”


설아의 입에서 새어 나오지 못한 비명이 밭은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은랑의 머릿속 3D 공간 지도에 불타오르는 오씨 의원의 전경이 붉은 화염의 선으로 그려졌다.


의원 앞마당에는 거친 사내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하하하! 불길이 아주 활활 잘 타오르는구나! 이 늙은 의원 놈, 진작에 뇌영 대장님의 지시대로 순순히 약초와 은자를 넘겼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쇳소리가 섞인 포악한 목소리. 석문진 부두의 하역권을 쥐고 민초들을 갈취하던 사파 조직의 우두머리, 장 단주(장 단주)였다. 그의 손에는 피가 묻은 거대한 무쇠 낭아봉(낭아봉)이 쥐여져 있었고, 그의 부하들은 불타는 약방 안에서 재물 상자를 들고 나오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에는, 하얗게 센 수염이 피로 붉게 물든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은랑의 생명의 은인이자 설아의 친아버지, 오 의원이었다.


“아버지……!”


설아는 은랑의 손을 뿌리치고 불타는 약방 앞마당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나갔다. 쓰러진 오 의원의 몸 위로 무너지듯 엎드린 설아는 아버지를 흔들며 목놓아 오열했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오직 거친 숨소리와 피맺힌 눈물만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야? 오 의원의 벙어리 딸년이 아닌가! 아주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구나!”


장 단주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낭아봉을 어깨에 메고 설아에게 다가섰다. 쓰러진 오 의원은 희미하게 남아 있던 숨을 몰아쉬며, 설아의 손을 꽉 쥐었다. 그의 흐려지는 눈동자가 안개 속에서 피 흘리며 걸어 나오는 은랑의 실루엣을 향했다.


“은…… 은랑…… 자네인가……”


오 의원의 목소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약했다. 은랑은 지팡이를 짚고 오 의원의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먼 눈가에서 분노로 인한 핏물이 안대 천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설아를…… 부탁하네…… 자네를 살려준…… 대가로…… 이 아이를…… 지켜주게……”


오 의원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은랑의 소매를 움켜쥐며 마지막 숨을 짜내어 속삭였다.


“뇌영이 노리는 것은…… 남궁세가와의 밀거래 장부라네…… 그 장부 속에…… 흑탑의 진짜 역모가…… 컥!”


오 의원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한 줌의 피를 토해내며 손을 스르륵 놓았다. 그의 가슴을 뛰게 하던 심장 소리가 은랑의 초청각 속에서 완전히 정지했다.


침묵.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정적 속에서, 설아의 소리 없는 오열만이 은랑의 영혼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 자신을 도구로만 여겼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 주었던 이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눈앞에 누워 있었다.


‘살수는 개인의 감정을 품지 않는다.’

‘동정심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삽이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독고황의 비정한 규율들이 분노의 불길 속에서 완전히 불타 무너져 내렸다. 은랑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대장간의 뜨거운 열기를 압도하며 석문진 전체를 서늘하게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이 장님 놈이 기어코 살아 돌아왔구나! 뇌영 대장님의 지시대로 네놈의 사지를 찢어 불길 속에 던져주마!”


장 단주가 포효하며 거대한 무쇠 낭아봉을 휘둘렀다. 백 근이 넘는 낭아봉이 바람을 찢으며 은랑의 머리 위로 무자비하게 낙하했다.


쿠우우웅-!


하지만 은랑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재로 인한 불길의 치솟는 소음과 뜨거운 열기가 그의 청각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은랑은 귀 주변의 청궁혈을 억지로 열지 않았다. 소음 속에서 귀를 열면 고막이 터질 터였다. 그는 오직 전신의 피부 촉각과, 공포에 질려 요동치는 장 단주 무리의 심장박동 주파수만을 뇌리에 정밀하게 새겨 넣었다.


‘세 박동.’


은랑은 몸을 가볍게 비틀어 낙하하는 낭아봉의 궤적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냈다. 무쇠 몽둥이가 흙바닥을 내리쳐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켰지만, 은랑의 신형은 이미 흑먼지 장막을 가르며 소리 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스르릉-!


대나무 지팡이 내부에서 청풍검의 푸른 칼날이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 대신, 화염의 열기 속에서 푸른빛 한 줄기가 번개처럼 명멸했다.


서걱-!


단 한 격이었다. 청풍검결 1초식 풍참(風斬)의 무형 검기가 장 단주의 오른쪽 어깨와 허벅지를 일직선으로 베고 지나갔다.


“아아아악-!”


장 단주의 비명 소리가 타오르는 의원의 불길 소리를 뚫고 비참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오른팔과 다리가 단숨에 절단되어 바닥으로 뒹굴었고, 거구의 몸이 진흙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대, 대장님……!”


재물을 챙기던 부하 자객 두 명이 겁에 질려 검을 떨어뜨렸다. 은랑이 뿜어내는 서슬 퍼런 살기는 장님이 아닌 어둠 속의 사냥개, 그 자체의 풍모였다. 은랑은 청풍검 끝을 장 단주의 목덜미에 대고 차갑게 속삭였다.


“뇌영은 어디 있나.”


“사, 사해주십시오! 뇌영 대장님은…… 폐채석장으로…… 컥!”


피를 흘리며 실토하려던 장 단주의 부하 자객의 목에, 안개 속 저편에서 날아온 소리 없는 독침 한 자루가 정확히 박혔다. 자객은 눈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뇌영이 보낸 저격 자객이 원거리에서 바람총으로 입막음을 감행한 것이었다.


“…….”


은랑은 청풍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먼 두 눈에서 흘러내린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검날 적셨다. 은랑은 검을 휘둘러 단 한 격에 장 단주의 목을 베어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져버렸다. 생명의 은인을 해친 자를 향한 잔혹하고 정교한 단죄였다.


쿠구구구! 무너져 내리는 약방의 불타는 대들보 아래에서, 은랑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대나무 숲 전체를 진동시키며 웅성거리게 만들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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