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그림자의 이빨, 죽음의 정찰
석문진 외곽을 감싸고 있는 대나무 숲, 죽림(竹林)의 밤은 유독 축축하고 무거웠다.
낮 동안 저자거리를 짓누르던 황토 먼지는 가라앉았으나, 대신 사방에서 밀려든 짙은 안개가 대나무 기둥 사이사이를 메우며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숲 깊은 곳에 위치한 은랑의 초라한 흙집, 청풍헌(淸風憲)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부딪히며 내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각, 사스스스스.
은랑은 먼지 묻은 하얀 천으로 두 눈을 단단히 가린 채, 낡은 대나무 지팡이 ‘청풍’을 가볍게 짚으며 걸었다. 지팡이 끝이 축축한 흙바닥과 젖은 낙엽을 디딜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그의 손바닥 경맥을 타고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눈먼 그에게 이 대나무 숲은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람의 결이 그리는 입체적인 미로이자, 대지의 울림이 전해주는 보이지 않는 지도였다.
하지만 오늘 밤, 대나무 숲의 울림은 평소와 달랐다.
‘조용하군.’
은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안대 너머로 고개를 미세하게 움직였다.
보통의 밤이라면 대나무 기둥을 기어오르는 미세한 벌레들의 발소리나, 젖은 흙 속을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지렁이의 마찰음이 그의 초청각에 잡혀야 했다. 지난번 진표의 해금 연주를 통해 깨달았던 ‘벌레의 발소리 각성’ 경지는 그의 청각을 인간의 한계 너머로 밀어 올린 상태였다. 십 장 밖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걸러내던 그의 귀에,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생명의 기척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벌레들이 숨을 죽였다. 그것은 숲속에 자신과 설아 외에, 또 다른 거대한 살성이 침투해 있음을 뜻했다.
‘Ssang-do 무리를 제압한 소문이 벌써 퍼진 건가.’
낮 동안 저자거리에서 빗자루 하나로 사파 폭력배들을 도륙하듯 제압했던 활극. 시장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간 장님 청소부의 전설은 필연적으로 석문진 구석구석을 감시하던 흑탑의 귀에 들어갔을 터였다. 흑탑의 최하부 추격대장 뇌영(雷影)이 보낸 정찰조원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스으으으.
바람이 대나무 기둥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 사이로, 기묘한 ‘공백’이 느껴졌다.
공기 유동 인지(氣流感知). 은랑의 전신 피부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바람은 사방으로 균일하게 흘러야 하거늘, 머리 위 3장 높이의 대나무 가지 끝에서 흘러내려 와야 할 바람의 결이 무언가 거대한 질량에 가로막혀 굴절되고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 매복해 있었다.
그는 심장박동을 극도로 늦추고, 호흡을 폐부 깊은 곳에 가두어 기척을 완벽히 지우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평생을 가도 눈치채지 못할 완벽한 은신이었으나, 바람의 미세한 공기 굴절과 기압 변화를 피부 촉각으로 읽어내는 은랑의 감각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매복자의 정체는 흑탑의 정찰선발대장, 관 조장(官 組長)이었다.
관 조장은 대나무 가지 위에 고양이처럼 엎드린 채, 아래를 지나가는 은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검게 그을린 날카로운 자수도(刺獸刀)가 쥐여져 있었다. 그의 눈빛은 의심과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장님이 정말로 그 ‘은랑’이란 말인가? 독고황 탑주께서 직접 절벽 아래로 던져버린 사냥개가 살아남아 청소부 행세를 하고 있다고?’
관 조장은 직접 확인해야 했다. 만약 아래의 장님이 진짜 은랑이라면, 그의 목을 베어 뇌영 대장에게 바치는 순간 자신의 신분은 단숨에 격상될 터였다. 관 조장은 단전에 미약한 잠행 기공을 운용하며, 소리 없이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맞춰 몸을 날렸다.
스윽.
공중에서 낙하하는 관 조장의 신체는 완벽한 무음(無音)에 가까웠다. 옷깃 스치는 마찰음조차 사전에 제어된 지독한 살수의 낙하였다. 자수도의 서슬 퍼런 칼날이 은랑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은랑의 피부는 이미 하늘의 기류가 급격히 아래로 눌리는 압력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온다.’
은랑은 오른손에 쥔 대나무 지팡이 ‘청풍’을 가볍게 쥐어짰다. 단전에서 솟구친 미약한 진기가 지팡이의 비어 있는 내부 공명 구조를 타고 끝부분으로 몰려들었다.
타악-!
은랑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나무 지팡이를 수직으로 들어 올려 머리 위 허공을 비스듬히 막아섰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관 조장의 자수도 끝이 대나무 지팡이의 단단한 옹이에 정확히 맞부딪쳤다.
강렬한 반탄력이 은랑의 손목 경맥을 타고 역류했다. 관 조장의 하강 기세를 실은 낙하 타격의 무게는 일류 고수의 그것에 필적했다. 지지직 하는 기분 나쁜 마찰음이 울려 퍼지며, 은랑의 대나무 지팡이 청풍 끝부분의 대나무 가죽이 미세하게 쩍 갈라지며 파손되었다. 관 조장의 자수도에 담긴 강력한 악력과 내력이 지팡이 끝을 깎아낸 것이다.
“역시 보통 장님이 아니로구나!”
기습이 막히자 관 조장은 공중에서 신법을 기괴하게 꺾었다. 그는 대나무 기둥을 발끝으로 차고 반동을 이용해 은랑의 등 뒤로 회전하며 내렸고, 동시에 자수도를 수평으로 눕혀 은랑의 목덜미를 연속으로 베어왔다.
스스스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은랑의 양 귀를 사정없이 위협했다. 은랑은 청각이 교란당하는 찰나의 순간, 몸의 관절을 유연하게 이완시키는 반향 회피(反響回避) 기술을 전개했다.
무기가 몸에 닿기 직전 발생하는 미세한 공기 파동의 결을 따라, 은랑의 상체가 기괴한 각도로 흐느적거리며 뒤로 꺾였다. 관 조장의 자수도 칼날이 은랑의 목가죽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가며 허공의 안개만을 갈랐다. 연속된 세 번의 참격이 모두 은랑의 옷깃만을 스친 채 헛손질로 돌아갔다.
“이 괴물 같은 놈이……!”
관 조장의 눈에 경악과 공포가 스쳤다. 눈이 먼 장님이 자신의 무음 기습과 연격을 완전히 예측하고 피하다니, 이것은 무림의 상식을 벗어난 경지였다. 관 조장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마지막 진기를 자수도에 집중해 은랑의 하얀 눈가림 천을 향해 수직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살기가 대나무 숲의 안개를 찢으며 은랑의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관 조장의 단도가 은랑의 하얀 눈가림 천을 스치기 직전, 은랑의 손에 쥔 대나무 지팡이가 기괴한 각도로 꺾여 올라갔다.
그것은 사천무 스승이 물려준 청풍검결의 정수이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적의 가장 약한 뼈 구조를 찾아내는 무성격살(無聲擊殺)의 초식이었다. 은랑은 지팡이 끝의 진동을 통해 관 조장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목뼈 부근의 기맥이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이미 분석해 낸 상태였다.
스윽.
파공음조차 나지 않는 기괴하고 부드러운 찌르기였다.
쩍 갈라진 대나무 지팡이의 날카로운 끝부분이 관 조장의 칼날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그의 목뼈 중앙에 위치한 천돌혈(天突穴)을 정확히 관통했다.
콰득.
뼈가 부러지는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완전한 침묵 속에 묻혔다. 관 조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뜬 상태로 제자리에 굳어졌다. 그의 목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대나무 지팡이를 타고 은랑의 손등으로 뜨겁게 흘러내렸다.
털썩.
관 조장의 육체가 진흙 바닥 위로 무겁게 쓰러졌다. 대나무 숲은 다시 지독한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은랑은 피 묻은 대나무 지팡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팡이 끝부분의 균열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흑탑의 정찰대장을 처단했으나, 이로 인해 뇌영과의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의 막이 올랐음을 은랑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쓰러진 시신을 안개 속 대나무 뿌리 깊은 곳으로 조용히 끌고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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