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실크의 굴레, 피부의 비명
풍장의 실크 천이 은랑의 숨통을 소리 없이 조여오는 찰나, 그의 등 뒤로 매엽의 차가운 단검 날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사방은 완벽한 정적이었다. 바람은 분명 불고 있었으나, 철목림의 검은 나무들은 그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미세한 마찰음마저 모조리 집어삼키고 있었다. 은랑의 먼 눈가림 천 아래, 핏발 선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평소 그의 영혼과 같았던 반향정위(反響定位)의 하얀 선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침몰해 있었다. 소리가 반사되어 돌아오지 않는 공간에서, 은랑은 마치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극도의 고립감에 휩싸였다.
‘공기가…… 흐르지 않는다.’
매엽이 펼친 특수 실크 천 ‘풍장(풍장)’은 단순한 방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기 흐름 자체를 강제로 흡수하고 왜곡하는 보이지 않는 고치였다. 전신의 모공을 열어 미세한 바람의 결을 읽어내던 은랑의 기류 감지마저 사방으로 뒤틀려 찢겨 나갔다. 적이 어디서 다가오는지, 단검이 어느 방향에서 짓쳐 드는지 가늠할 수 있는 물리적 이정표가 단 한 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파스스스!
소리 없는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매엽이 휘두른 풍장의 실크 자락이 은랑의 어깨와 등 뒤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둔탁한 타격음조차 철목의 검은 가죽 같은 표면에 흡수되어 묵직한 진동으로만 전해졌다.
“윽……!”
은랑의 신형이 크게 휘청였다. 등 뒤의 가죽 무복이 찢겨 나가며, 매엽의 단검 비홍(Bihong)이 남긴 얇은 자상 위로 뜨거운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피비린내가 철목림의 가라앉은 안개 속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은랑은 급히 오른손에 쥔 임시 대나무 지팡이를 휘둘러 방어세를 취하려 했다.
카강!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둔탁한 파공음뿐이었다. 풍장이 만들어낸 기류의 왜곡 때문에 은랑은 적의 정확한 거리를 오판했고, 그의 지팡이는 매엽의 몸을 스치지도 못한 채 텅 빈 안개만을 갈랐다. 지팡이 표면에 가 있던 미세한 균열들이 충격으로 인해 쩍 갈라지며, 은랑의 손바닥에 거친 마찰 통증을 더했다. 손끝의 진동 감각마저 일시에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후후, 맹인 사냥개여. 귀와 코가 멀어버리니 네놈의 그 화려하던 검로도 결국 허공을 헤매는 춤사위에 불과하구나.”
매엽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사방의 철목에 부딪혀 먹먹하게 웅얼거렸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을 수 없어 마치 사방에서 수십 명의 매엽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기괴한 이명이었다. 은랑의 단전에서 역천공의 반동으로 상처 입은 심장 경맥이 찌릿하게 요동쳤다.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하얀 안대를 적셨다.
쉬이익!
매엽이 소매 속에서 두 번째 단검 비홍을 튕겨냈다. 소리보다 빠르게 짓쳐 드는 연검의 예기가 은랑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가차 없이 베고 지나갔다. 허벅지 힘줄을 스치는 예리한 통증에 은랑의 무릎이 꺾였다. 대량의 출혈로 인해 시야가 아닌 온몸의 감각이 서서히 차갑게 식어갔다. 완벽한 패배의 그림자가 그의 목덜미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철목림의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계곡 초입 방향에서 울려 퍼졌다.
깡-!
맑고 날카로운 쇳소리였다.
설아였다. 숲 외곽에서 초조하게 대기하던 소녀는 은랑의 피비린내를 맡고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실어증으로 인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품속에 있던 한천담 얼음병을 전력을 다해 가장 가까운 철목의 단단한 줄기를 향해 던진 것이다. 한빙석으로 만든 묵직한 병이 쇠처럼 단단한 철목에 부딪히며, 소리를 삼키는 숲속에서 유일하게 왜곡되지 않은 날카로운 고주파 음파를 사방으로 튕겨냈다.
매엽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그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휙 돌아갔다.
“쥐새끼 같은 년이……!”
매엽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실크 천 풍장을 채찍처럼 휘둘러, 공중에서 튕겨 나간 얼음병을 휘감아 채며 소리를 흡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은랑에게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은랑은 설아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유인책을 썼음을 직감했다. 비록 귀는 멀어 가청 범위가 축소되었으나, 설아가 던진 얼음병의 쇳소리는 그의 머릿속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유일한 이정표로 번뜩였다.
그러나 매엽은 일류 극성의 자객이었다. 그녀는 실크 천으로 얼음병을 휘감아 바닥에 내팽개치는 동시에, 다른 손에 쥔 단검 비홍을 은랑의 가슴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푸학!
날카로운 단검 날이 은랑의 가슴팍을 깊숙이 베어 들어왔다. 가슴뼈를 긁는 서늘한 마찰과 함께 대량의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극도의 통증이 은랑의 뇌 신경을 마비시키며 그의 의식을 심연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은랑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의 무릎이 축축한 진흙 바닥에 닿는 순간, 은랑의 왼손바닥이 우연히 옆에 서 있던 거대하고 단단한 철목의 검은 나무줄기를 짚었다.
지이이잉.
차가운 쇠를 만지는 듯한 묵직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 순간, 공기 중의 소리가 아닌, 철목의 단단한 고체 내부를 타고 흐르는 매엽의 미세한 체중 이동 진동과 발끝의 떨림이 은랑의 뼈를 타고 단전으로 곧바로 전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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