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침묵의 철목림, 소리 없는 덫
새벽녘의 차가운 안개는 강남의 경계에 다다를수록 한층 더 무겁고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멈추고, 은랑은 설아의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마차에서 내려섰다. 사방을 가득 채운 안개는 단순한 수증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남 특유의 습한 기류와 강바람이 뒤섞여 은랑의 피부를 끈적하게 옥죄는 기묘한 장막이었다.
화산파의 천재 소철과의 비무를 끝내고 오해를 풀었지만, 은랑의 몸은 여전히 만신창이였다. 역천공을 무리하게 전개한 대가로 심장 주변의 경맥은 검게 타들어가며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고, 관자놀이 부근에서는 간헐적인 두통이 송곳처럼 뇌 세포를 찔러댔다. 게다가 고막이 파열된 이후 원거리의 미세한 소리를 걸러내는 청각의 가청 범위는 영구적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은랑은 오른손에 쥔 임시 대나무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소철의 자하진기가 실린 매서운 참격을 막아내느라 지팡이 표면에는 이미 깊은 균열이 가 있었다. 지면을 딛고 진동을 읽을 때마다, 쪼개진 대나무 틈새가 미세하게 벌어지며 손바닥에 거친 마찰을 전해왔다. 조금만 강한 충격이 가해져도 이 임시 지팡이는 완전히 산산조각 날 터였다.
사락.
설아가 은랑의 손바닥을 펼치더니, 가냘픈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 글씨를 써 내려갔다.
[나무들이 온통 검고 차가워요. 바람이 불지 않아요.]
설아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속에서 은랑은 깊은 경계심을 읽어냈다.
남궁혁이 묵직한 철검 창랑을 쓸어내리며 안개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방하던 얼굴은 가문의 본거지인 강남에 가까워질수록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문이 뒤로 살수 조직인 흑탑과 결탁해 무기를 밀거래하고 있었다는 추악한 진실을 마주한 무인으로서의 치욕과 고뇌가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은랑 소협, 여기서부터는 남궁세가의 사설 수로 경비망을 우회하기 위해 숲을 관통해야 하오. 하지만 이 앞에 펼쳐진 숲은 보통의 죽림이 아니오. 강남 국경에 위치한 기괴한 금지 구역, ‘철목림(鐵木林)’이오.”
“철목림…….”
은랑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쇠처럼 단단하고 검은 철목들이 빽빽하게 자생하는 숲이오. 나무의 밀도가 너무 높아 안개와 습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곳이지. 무엇보다…….”
남궁혁이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곳에서는 소리가 울리지 않소. 소리를 삼켜버리는 기괴한 나무들이오.”
은랑은 대답 대신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어 숲의 초입 바닥을 가볍게 톡, 쳤다.
보통의 흙바닥이나 바위라면 맑은 진동과 함께 음파의 반사파가 돌아와 머릿속에 사방의 테두리를 하얀 선으로 입체적으로 그려내야 했다. 은랑이 절벽 아래에서 백화선 스승에게 전수받아 대성했던 반향정위(反響定位) 심법의 극의였다.
하지만 대나무 지팡이 끝이 철목림의 지면을 두드리는 순간, 은랑의 먼 눈가림 천 아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툭.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닥을 때린 둔탁한 쇳소리 같은 울림은 사방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스펀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툭 끊겨 사라졌다.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사방 20보 안의 사물의 고저차와 거리를 뇌 속에 3차원으로 그리던 하얀 선들이, 단 한 줄기도 피어오르지 못한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녹아내렸다.
완벽한 감각의 차단.
은랑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폐쇄 공포감을 느꼈다. 두 눈을 가린 하얀 천 너머의 암흑이 이전보다 수십 배는 더 무겁고 두껍게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리를 반사하여 세상의 형태를 그려내던 유일한 등대가 꺼져버린 것이다.
‘소리를 삼키는 나무라니…….’
은랑의 단전에서 진기가 차갑게 요동쳤다. 철목림의 단단한 검은 나무들은 음파를 흡수해 버리는 기묘한 물리적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은랑이 낙석 탐지술을 쓰기 위해 바닥의 자갈을 퉁겨 날려도, 돌멩이가 철목에 부딪히는 순간 탁, 하는 짧은 마찰음만 낼 뿐 그 어떤 메아리도 반사시키지 못할 터였다. 오직 내 발바닥과 지팡이가 닿아 있는 대지의 고체 진동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감각의 끈이었다.
“남궁 소협, 설아를 데리고 마차 주변에서 대기하시오. 내가 먼저 숲의 기척을 확인하겠소.”
“위험하오, 은랑 소협. 가문의 자객들이 이미 이 근처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오.”
남궁혁이 만류하려 했으나, 은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팡이의 균열이 심해진 상태에서 대부대가 움직이다가 기습을 당하면 설아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은랑은 설아의 손을 지그시 쥐어 안심시킨 뒤, 홀로 검은 철목들이 빽빽한 숲속으로 무성보를 전개하며 소리 없이 침투했다.
스으으윽.
철목림 깊숙이 들어설수록 정적은 한층 더 기괴해졌다. 바람이 부는 기척은 느껴지는데,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가지가 흔들리는 마찰음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다 못해 고막 안쪽이 진공 상태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이명이 은랑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고막 파열의 페널티가 이 비정상적인 정적 속에서 극도의 신경 쇠약을 유발하고 있었다.
‘바람은 불고 있다. 피부에 닿는 기류가 축축하군.’
은랑은 전신의 모공을 열고 피부 표면에 미세한 진기 막을 형성하는 기류 감지(氣流感知)에 집중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온몸의 피부 촉각으로 공기의 미세한 흔들림을 읽어야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은랑의 전신 솜털이 송곳에 찔린 듯 일제히 곤두섰다.
피부에 닿던 축축한 강남의 강바람 흐름이, 머리 위 3장 높이의 철목 가지 끝에서 기이하게 ‘단절’되었다. 사방으로 균일하게 흘러야 할 바람의 결이 무언가 거대한 장막에 가로막혀 인위적으로 굴절되고 있었다.
매복자였다.
하지만 은랑의 초청각에는 그 어떤 숨소리도, 옷깃 스치는 소리도 잡히지 않았다. 철목들이 그 미세한 인간의 기척 소리마저 완벽히 흡수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공기의 흐름이 왜곡되는 기류의 굴절만이 적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누구냐.’
은랑이 지팡이를 치켜세우며 방어세를 취하려던 찰나, 머리 위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하강했다.
스으으으윽.
그것은 바람조차 삼켜버리는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흑탑의 탑주 독고황이 아끼는 정예 연사 자객, 매엽(매엽)이었다. 그녀는 바람의 흐름을 강제로 차단하고 왜곡하는 특수 방풍 실크 천 ‘풍장(풍장)’을 사방으로 펼친 채 낙하하고 있었다.
펄럭이는 실크 천 풍장이 은랑의 머리 위를 덮치는 순간, 은랑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기류 감지마저 무력화되었다. 풍장이 공기의 흐름을 강제로 흡수하고 왜곡해 버리자, 은랑의 온몸 피부로 전해지던 미세한 바람의 결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뒤틀리며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케 만들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의 흐름마저 왜곡된 완전한 감각의 지옥.
“후후, 눈먼 사냥개가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가면 뒤에 숨겨진 매엽의 잔혹하고 교활한 목소리가 철목림의 검은 나무들 사이로 아주 둔탁하게 웅얼거리며 들려왔다. 목소리마저 철목에 흡수되어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괴한 이명이었다.
쉬이익!
매엽이 소매 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조차 내지 않는 얇은 단검 비홍(Bihong) 두 자루를 튕겨내며 은랑의 등 뒤를 향해 짓쳐 들어왔.
은랑은 반향정위도, 기류 감지도 무력화된 상태에서 오직 뼛속 깊이 각인된 살수의 직관과 육체적 본능만으로 신형을 비틀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매엽의 단검 끝이 은랑의 잿빛 대투 뒷자락을 날카롭게 찢고 지나갔다. 얇은 가죽을 가르는 서늘한 예기가 등 가죽을 스치며 붉은 선혈이 안개 속으로 번져 나갔다.
“큭……!”
은랑은 비틀거리며 옆으로 굴러 간신히 거리를 벌렸다. 등 뒤에서 흘러내린 피가 젖은 삼베옷을 붉게 적셨다. 상처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것은, 자신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고 적이 어디서 다가오는지 전혀 인지할 수 없다는 극도의 고립감이었다.
매엽은 은랑의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거대한 실크 천 풍장을 허공에서 채찍처럼 휘두르며 은랑의 사방을 누에고치처럼 포위해 들어왔. 풍장이 흔들릴 때마다 공기는 진공 상태처럼 희박해졌고, 은랑의 귀와 피부는 완벽한 무(無)의 심연 속에 갇혀갔다.
은랑은 부러진 지팡이 끝을 땅에 대고 지면의 진동을 읽으려 필사적으로 내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풍장의 거대한 실크 천이 바닥을 쓸어내리며 발생하는 불규칙한 마찰 진동이 지팡이 끝의 미세한 파동 분석마저 완벽히 뒤흔들어 놓았다.
바람도, 소리도, 지면의 진동마저 조각난 암흑의 세계.
매엽의 거대한 실크 천 풍장이 안개를 집어삼키며 은랑의 사방을 촘촘하게 조여왔다. 은랑의 손에 쥔 임시 대나무 지팡이 끝의 미세한 떨림마저 풍장의 실크 자락에 휘감겨 완전히 사그라졌다.
세상의 모든 물리적 파동이 사라진 완전한 침묵의 덫.
은랑은 소리 없는 고치 속에 갇힌 채, 자신을 향해 소리 없이 하강하는 매엽의 푸른 단검 날이 목덜미에 닿기 직전의 극도의 절박한 어둠 속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