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마음의 거울, 밝혀진 위선
사방을 가득 메운 붉은 검기 꽃잎들이 은랑의 목덜미를 베어 들어오기 직전, 은랑은 바람의 전체적인 흔들림 속에 몸을 맡겼다.
붉은 매화 검기가 공기를 찢으며 가해오는 압도적인 열기는 은랑의 눈가림 천을 태워버릴 듯 사납게 몰아쳤다. 뇌 신경의 과부하로 인해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피눈물이 뺨을 타고 턱끝으로 뚝뚝 떨어졌고, 머릿속은 쪼개질 듯한 극심한 두통으로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품속의 청풍검을 뽑아 저 눈앞의 오만한 화산파 애송이의 목덜미를 단숨에 꿰뚫어 버리라는 흑탑 살수십계명의 환청이 심연 너머에서 차갑게 울부짖었다.
‘죽여라. 망설임은 죽음을 부를 뿐이다.’
하지만 은랑은 어금니를 사정없이 깨물며 그 비정한 충동을 짓눌렀다. 저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소철은 사악한 살수가 아니다. 그저 흑탑의 위선적인 거짓 소문에 속아 넘어가, 스스로 정의를 행한다고 믿고 있는 정직하고 어리석은 강호의 무인일 뿐이었다. 그를 죽이는 순간, 자신은 평생을 지배해 온 사부 독고황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진짜 괴물로 타락하게 될 터였다.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겠다.’
은랑은 마음속으로 불가 비전의 구결을 나지막이 읊조리며 대자비심법(大慈悲心法)의 온화한 황색 진기를 전신 경맥으로 흘려보냈다. 단전을 헤집던 거친 살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그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투명한 맹인심경(盲人心鏡)의 경지에 도달했다. 귀로 들리는 기괴한 매화 파공음의 소음들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오직 소철의 발바닥이 지면을 딛는 미세한 진동과 그의 뼈 관절이 움직이는 순간의 기류 변화에만 영혼을 집중했다.
“매화만개(梅花滿開)—!”
소철의 고함 소리와 함께, 수십 자루의 날카로운 붉은 검기 꽃잎들이 은랑의 전신을 포위하듯 무자비하게 덮쳐왔다. 화려한 검기의 환영 뒤에 숨겨진 진짜 낙매검의 예리한 검날이 은랑의 목덜미를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오는 찰나였다. 소철은 자하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려 이 한 격에 모든 승부를 내고자 했다.
은랑은 오른손에 쥔 임시 대나무 지팡이를 가볍게 치켜들었다. 지팡이 표면에는 이미 소철과의 충돌로 생긴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지만, 은랑은 그 균열의 이음새 속으로 자신의 미약한 진기를 흔들림 없이 밀어 넣었다.
바람의 저항을 베어내는 검의 극의, 심풍검의(心風劍意).
은랑이 대나무 지팡이 끝을 소철의 낙매검 검 끝을 향해 소리 없이 비스듬히 찔러 넣었다.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날카로운 기류가, 소철의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발생하는 미세한 마찰 저항 자체를 통째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스으으윽.
파공음조차 삼켜버린 기묘한 기류의 왜곡이 소철의 검 끝 주변에서 일어났다. 소철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검이 아무런 공기의 저항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진공의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검 끝을 지탱하던 공기의 결이 순식간에 잘려 나가자, 낙매검의 붉은 검세는 무게중심을 잃고 허공으로 크게 휘청이며 바깥쪽으로 튕겨 나갔다. 완벽한 오차 없는 궤적의 뒤틀림이었다.
“이, 무슨……!”
소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물들었다. 화산파가 자랑하는 절정의 절기이자 사방을 포위하던 매화만개 초식이, 단지 평범한 대나무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류 한 줄기에 허무하게 파훼당한 것이다. 소철의 신형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크게 비틀거렸다.
은랑은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임시 대나무 지팡이의 몸통을 가볍게 회전시키며, 소철의 낙매검 검자루를 정확히 강타했다.
딱!
단단한 마찰음과 함께 소철의 손아귀에서 낙매검이 떨어져 나갔다. 검은 허공을 크게 그리며 날아가 먼지 묻은 진흙 바닥에 꽂혔다. 완벽한 무장 해제였다.
소철은 허탈한 표정으로 바닥에 꽂힌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전에 힘을 주어 기공으로 검을 다시 손으로 불러들이려(어검)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은랑의 지팡이 끝이 한 박자 더 빨랐다.
톡.
은랑의 지팡이 끝이 소철의 가슴팍 전중혈을 미세하게 짚었다. 강한 타격이 아니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접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철의 단전에서 끓어오르던 자하진기가 일시에 굳어버렸다. 기맥이 일시적으로 완벽히 봉인된 것이다.
“……끝났소.”
은랑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새벽안개 속으로 나지막이 퍼져 나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자의 오만함도, 적을 향한 살기도 전혀 없었다. 오직 뼛속 깊이 박힌 쓸쓸함과 정직한 슬픔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소철은 멍하니 은랑을 바라보았다. 그의 하얀 눈가림 천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있는 비장한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랑의 검 끝에는 자신을 해치려는 살기가 단 한 푼도 섞여 있지 않았다. 소철은 화산의 천재로서 검의 기운을 누구보다 잘 분별할 수 있었다. 은랑이 방금 전개한 무공은 자신을 단숨에 베어버릴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녔음에도, 철저히 방어와 무장 해제만을 목적으로 펼쳐진 자비로운 검의였다.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오? 네놈은 석문진의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한 흑탑의 마두가 아니란 말이냐?”
소철의 목소리가 크게 흔들렸다. 정의라 믿었던 자신의 신념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이었다.
은랑은 대답 대신 품속으로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품속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던 반쯤 탄 가죽 뭉치, 남궁세가 밀거래 장부(남궁세가 밀거래 장부)를 꺼내어 소철의 발밑으로 툭 던졌다.
“보이는 위선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구려.”
은랑의 차가운 선언이 소철의 심장을 찔렀다.
소철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주워 올렸다. 가죽 표면은 불에 타 그을려 있었지만, 안쪽에 양각으로 새겨진 남궁세가 고유의 비밀 인장과 흑탑의 붉은 살수 문양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장부의 첫 장을 넘기자, 남궁세가가 북방 국경 지대에서 흑탑과 밀거래를 일삼으며 사설 무기와 고순도 철광석을 밀수입한 구체적인 거래 내역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이것은…… 남궁세가의 인장……? 그렇다면 가문이 뒤로 살수 조직과 결탁해 무기를 모으고 있었다는 말인가?”
소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정파의 명문가이자 도덕을 논하던 남궁세가가, 강호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인 흑탑과 추악한 밀거래를 하고 있었다니. 화산파가 수사하던 민초 학살 사건의 진정한 배후가 바로 자신들이 비호하려 했던 남궁세가와 흑탑의 합작품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흑탑은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나를 마두로 위장하여 소문을 퍼뜨렸고, 정파의 무인들은 그 위선적인 소문에 놀아나 검을 겨누었소. 참으로 가소롭고 슬픈 강호로구려.”
은랑의 목소리에는 분노 대신 깊은 탄식이 서려 있었다.
소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행하려 했던 정의가 실상은 악당들의 방패막이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의로운 복수자인 눈먼 무인을 마두로 몰아세워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는 부끄러움이 그를 짓눌렀다.
스르릉.
소철은 바닥에 꽂혀 있던 자신의 백경검 낙매를 거두어 칼집에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은랑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눈이 먼 위선에 속아 의로운 협객을 마두로 오해했소. 화산의 제자로서, 정의를 사칭하여 소협의 목숨을 노린 이 부끄러운 죄업을 어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소.”
소철의 무릎이 가볍게 꺾이며 은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사죄하는, 정직하고 곧은 무인으로서의 기품이었다.
은랑은 지팡이를 짚은 채 소철의 심장박동을 감지했다. 그의 박동은 더 이상 분노나 탐욕으로 요동치지 않았다. 오직 깊은 후회와 정직한 속죄의 주파수만이 흔들림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은랑은 지팡이 끝을 가볍게 거두며 나지막이 말했다.
“일어나시오. 위선에 속는 것은 무인의 어리석음일 뿐, 죄는 아니오. 진짜 죄는 그 위선 뒤에서 웃고 있는 자들에게 있소.”
소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오만함을 버리고 깊은 경외심과 결의로 채워져 있었다.
“남궁참이 이미 강남 본가로 도망쳐 소협의 생존과 장부의 존재를 알렸소. 강남 남궁세가는 소협을 사냥하기 위해 수향 지대 전체에 삼엄한 수로 철망과 정예 자객들을 배치해 두었소. 그곳은 소리와 바람이 물결에 섞여 극도로 교란당하는 까다로운 전장이 될 것이오. 부디 몸을 보존하시오.”
소철은 은랑에게 강남 남궁세가의 경계 태세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그리고는 단단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즉시 화산으로 돌아가 장문인께 이 장부의 진실을 보고하고, 남궁세가와 흑탑의 결탁을 정식으로 공론화하겠소. 화산파는 결코 위선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오. 소협이 강남에서 싸울 때, 내 반드시 소협의 우군이 되어 다시 찾아오겠소.”
소철은 은랑을 향해 마지막으로 정중히 포권을 취한 뒤, 안개 낀 새벽 숲 속으로 그림자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정적이 찾아온 숲길. 마차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소녀 설아가 소리 없이 은랑의 곁으로 다가왔다. 설아는 은랑의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을 보며 애타는 눈빛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따뜻한 수건으로 그의 뺨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은랑은 설아의 손길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멀리서 불어오는 차갑고 축축한 강남의 강바람을 향해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바람 끝에는 비릿한 물 냄새와, 더 거대한 음모의 살기가 묻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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