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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화산의 검풍, 오해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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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축축한 밤안개를 가르며 묵묵히 나아갔다.


마부 삼식이 모는 마차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말발굽에 두꺼운 가죽을 덧대어 소리를 극도로 줄인 삼식의 특수 마차는 석문진의 황량한 대지를 벗어나 강남 국경을 향해 밤새도록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바람은 점점 더 습하고 무거워졌고, 대기에는 강남 특유의 수향 지대가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비릿한 물 냄새가 섞여 들었다.


마차 내부의 정적은 무거웠다.


은랑은 하얀 눈가림 천을 단단히 묶은 채, 마차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길가에서 대충 베어내어 급히 깎아 만든 임시 대나무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사부 사천무의 진짜 유품이었던 원래의 청풍 지팡이는 적암굴의 처절한 혈투 속에서 철조의 강철 손톱에 의해 산산조각 나 소실되었다. 지금 은랑이 쥐고 있는 것은 그저 소리 없는 명검, 청풍검(靑風劍)의 알몸을 숨기기 위해 급조한 평범한 대나무 껍데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은랑은 그 거친 대나무의 감각 속에서도 사부의 숨결을 필사적으로 찾으려 손끝을 미세하게 떨었다.


가슴 명치 부근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천보벼랑에서 수명을 3년이나 단축하며 역천공을 전개했던 대가였다. 머리에 꽂힌 명문금침의 약효가 서서히 풀려가며 단전의 진기가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비린내가 솟구쳤다.


그때, 은랑의 곁에 앉아 있던 설아가 소리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설아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소녀였으나, 그녀의 따뜻한 손길만큼은 은랑의 얼어붙은 심장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설아는 은랑의 손바닥에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직 가슴이 많이 아프신가요? 한천담의 냉기가 다 빠지지 않았어요.]


은랑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설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여 안심시켰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비언어적 소통은 그 어떤 화려한 언어보다 깊은 신뢰로 묶여 있었다.


마차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남궁세가의 방계 무사 남궁혁이 묵직한 철검 창랑을 쓸어내리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참이 살아서 도망쳤으니, 강남 본가에서는 이미 은랑 소협의 생존과 장부의 존재를 파악했을 것이오. 국경 수로를 넘는 순간부터 남궁세가의 정예 자객들이 우리를 사냥하려 들 텐데, 소협의 몸 상태가 이토록 만신창이니 걱정이 앞서는구려.”


“……멈출 수 없습니다.”


은랑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차 내부의 어둠을 갈랐다.


“독고황 탑주가 나를 시험하기 위해 이 장기판을 깔아두었다면, 나는 그가 준비한 장기말들을 내 손으로 직접 부수어 버릴 뿐입니다. 남궁세가의 위선을 도려내지 않는 한, 석문진의 비극은 강남에서 다시 반복될 것입니다.”


남궁혁은 은랑의 서서히 벼려지는 차가운 의기에 압도되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치부를 제 손으로 단죄하겠다는 그의 결의 역시 은랑 못지않게 단단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삼식이 몰던 마차가 급격하게 제동을 걸며 바퀴가 진흙 바닥을 거칠게 긁었다. 히히힝! 하는 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스으으으—!


마차 지붕 위에서 밤안개를 찢는 듯한 날카롭고 고결한 검풍(劍風)의 기척이 은랑의 귀에 걸려들었다. 쉭! 하는 파공음과 함께 마차의 단단한 목재 지붕이 정중앙에서 일직선으로 깨끗하게 갈라졌다. 차가운 새벽바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푸른 안개 너머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마차 내부로 하강했다.


청색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미청년 무인. 그의 허리춤에는 화산파의 비전 백경검인 낙매(落梅)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서슬 퍼런 정의감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화산파의 오만한 천재 무사, 소철(소철)이었다.


“석문진의 무고한 민초들을 학살하고 강남으로 달아나려는 흑탑의 장님 마두 은랑! 내 오늘 화산의 이름으로 네놈의 목을 베어 강호의 대의를 바로잡으리라!”


소철의 쇳소리 섞인 일성이 마차 내부에 울려 퍼졌다.


남궁혁이 즉각 철검 창랑을 뽑아 들며 소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려라! 화산파의 도우여! 무언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있소. 이분은 민초를 학살한 마두가 아니라, 오히려 흑탑의 자객들로부터 석문진을 구해낸 의사(義士)요!”


“시끄럽다, 남궁세가의 방계 무사여!”


소철은 남궁혁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그의 눈에는 오직 흑탑이 유포한 거짓 소문, ‘눈먼 살수가 석문진의 약방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몰살했다’는 위선적인 정보만이 절대적인 진실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뒤로 흑탑과 밀거래를 일삼으며 타락했다는 소문은 이미 화산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런 가문의 무사가 지키는 자라면, 더 볼 것도 없는 마도의 괴수일 뿐! 구차한 변명은 검으로 하거라!”


소철이 낙매검을 뽑아 들자, 검날을 타고 화산파 비전의 자하진기(紫霞眞氣)가 은은한 자색 빛을 뿜어내며 대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은랑은 설아를 자신의 등 뒤로 나지막이 밀어냈다. 설아는 소리 내지 못하는 실어증의 고통 속에서도 은랑의 소매를 꽉 쥐며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은랑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마차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부러진 지팡이 대신 임시로 구한 대나무 지팡이 끝이 축축한 진흙 바닥을 툭, 쳤다.


지면을 타고 흐르는 소철의 발걸음 진동이 은랑의 발바닥 용천혈을 타고 뇌리로 전달되었다.


‘맥박이 매우 정직하군. 흔들림이 없어. 살기(殺氣)가 아니라, 스스로 정의라 믿는 자가 뿜어내는 올곧은 의기(義氣)다.’


은랑은 상대가 흑탑의 사악한 자객이 아닌, 거짓 소문에 속아 넘어간 정파의 의로운 무인임을 단숨에 간파했다. 무고한 자의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불살(不殺)의 신조가 은랑의 마음속에서 단단하게 솟구쳤다. 그는 품속의 청풍검을 뽑지 않았다. 오직 임시 대나무 지팡이만을 비스듬히 쥔 채 소철을 향해 섰다.


“검을 거두시오. 화산의 도우여. 당신의 검은 악을 베기 위한 검이거늘, 어찌 거짓의 꼭두각시가 되려 하시오.”


“마두 놈이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화산의 검풍을 받아라!”


소철이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법은 대나무 잎사귀가 바람에 날리듯 가볍고도 날렵했다.


스윽—!


소철의 낙매검이 허공을 가르며 매화검법(梅花劍法)의 기초 초식을 전개했다. 검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수십 개의 검로가 은랑의 상체를 향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화려하고 예리한 검풍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은랑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귀 주변 청궁혈에 미세한 진기가 집중되며, 소철의 검 끝이 공기를 가를 때 발생하는 미세한 마찰음과 기류의 변화를 정밀하게 추적했다.


챙! 챙! 챙!


은랑은 청풍검을 뽑지 않은 채, 오직 대나무 지팡이의 유연한 탄성만을 이용해 소철의 예리한 검날을 가볍게 비껴 흘렸다. 철과 대나무가 부딪칠 때마다 둔탁하면서도 맑은 마찰음이 안개 숲에 울려 퍼졌다. 소철의 화려한 검로가 은랑의 최소한의 지팡이 움직임에 가로막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무엇이……!”


소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눈이 먼 장님이 자신의 천재적인 매화검법 검로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팡이 하나로 비껴 흘려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철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자하진기를 더욱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은랑은 소철의 기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 그의 다리를 걸어 제압하려 대나무 지팡이를 낮게 쓸어 내렸다. 흙먼지가 원형으로 피어오르며 소철의 발목을 노렸다.


하지만 소철은 화산의 영재답게 가벼운 신법을 전개해 대나무 잎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도약하며 은랑의 제압술을 피해 냈다.


허공에서 하강하는 소철의 검세가 한층 더 무거워진 순간, 은랑은 급격한 신체 움직임으로 인해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천보벼랑 전투에서 입은 역천공의 가혹한 내상이 미세하게 자극받아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입가로 뜨거운 핏방울이 울컥 치밀어 올랐으나, 은랑은 이를 악물고 핏물을 삼켜냈다.


소철은 착지하며 은랑의 기이한 수학(武學)에 경탄하면서도, 마두를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검 끝에서 화산파 비전의 뜨거운 자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장님 놈, 제법이구나! 하지만 화산의 진짜 매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소철의 검 끝에서 매화 꽃잎과 같은 붉은 검기가 피어나며 사방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검기 꽃잎들이 안개를 붉게 물들이며 은랑의 사방을 포위하듯 요동쳤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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