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죽림의 노래, 마음의 눈을 뜨다
안개는 축축했고, 대나무 숲의 바람은 사나웠다.
석문진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죽림은 눈먼 은랑에게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사방에서 수만 개의 대나무 잎사귀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서슬 퍼런 칼날들이 맞부딪치는 파공음처럼 귓가를 어지럽혔다. 쏴아아아, 슥, 사각. 끊임없이 요동치는 백색 소음의 해일 속에서 은랑은 완벽하게 방향 감각을 잃었다.
탁, 타닥.
오른손에 쥔 대나무 지팡이 ‘청풍’으로 지면을 두드렸으나, 돌아오는 울림은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파묻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은랑은 초조해졌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가 그의 발끝을 무겁게 옭아맸다.
‘이 방향인가?’
은랑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젖은 대나무 뿌리였다. 균형을 잃은 몸이 허공을 휘저었고, 은랑은 그대로 비탈길을 굴러 내렸다. 사정없이 몸을 때리는 대나무 줄기들과 거친 흙바닥의 촉각이 전신을 엄습했다.
“쿠흑……!”
바닥에 처박힌 은랑은 흙먼지를 토해내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전신의 경맥이 찢어진 여파로 겨우 삼류 무사 수준의 내력만 지닌 육체는 작은 충격에도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보이지 않는 안대 너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둠 속에서 홀로 고립되었다는 절망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포기할 수 없다. 나를 배신하고 이 심연으로 던진 자들의 숨통을 끊기 전까지는 결코…….’
은랑은 이를 악물며 귀 주변의 혈자리인 청궁혈(聽宮穴)과 이문혈(耳門穴)에 억지로 진기를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증폭시켜 주변 지형을 파악하려 한 무모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강렬한 폭발음이 울렸다. 삐이이이- 하는 고주파의 이명이 뇌리를 사정없이 헤집었고, 관자놀이의 푸른 경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코끝으로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뇌 신경 과부하였다. 찢어진 경맥의 한계를 무시하고 진기를 운용한 대가는 참혹한 두통과 피눈물뿐이었다.
은랑이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에 신음할 때였다. 거친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를 뚫고, 기이할 정도로 투명하고 쓸쓸한 가락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끼이익, 끽, 찡…….
말총 활대가 쇠줄을 긁으며 내는 날카로우면서도 애절한 소리. 해금(해금)이었다.
그 소리는 대나무 숲의 백색 소음을 가르고 은랑의 이명마저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다가왔다. 기이한 가락이었다.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대나무 기둥에 부딪힌 뒤, 미세한 시간 차를 두고 메아리가 되어 은랑의 귀로 돌아왔다. 해금 소리가 굴절되는 양상을 따라, 보이지 않던 대나무들의 간격과 높낮이가 은랑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하얀 선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소리를 이기려 하지 말게. 소리는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흘려보내고 동조해야 하는 바람과 같은 것이니.”
낮고 해학적인 노인의 목소리가 해금 가락에 얹혀 들려왔다.
은랑은 지팡이를 짚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십 보 밖, 이끼 낀 거대한 바위 위에 한 사내가 걸터앉아 있었다. 하얀 눈동자를 가리지 않고 드러낸 채, 낡은 해금 ‘천음’을 품에 안고 활대를 켜고 있는 쉰 살 남짓의 마른 사내. 석문진의 눈먼 악사, 진표였다.
“누구…… 입니까?”
은랑이 경계 서린 목소리로 묻자, 진표는 해금 활대를 멈추지 않은 채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소리에 눈이 멀어 평생을 현을 켜며 살아온 늙은 광대일 뿐이네. 자네의 지팡이질 소리가 너무 요란하여 죽림의 노래가 깨지기에 참견을 해보았지.”
진표는 해금을 한 번 크게 튕겼다. 탱- 하는 단단한 공명음이 사방의 대나무를 때리고 사그라들었다.
“자네는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군. 그래서 귀를 억지로 열어 세상을 지배하려 드는 거야. 하지만 귀를 열수록 뇌는 타들어 가고, 세상의 잡음은 자네를 더욱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을 걸세.”
진표의 말은 은랑의 뼈를 찔렀다. 흑탑의 살수로서 언제나 대상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했던 버릇이, 시각을 잃은 지금 독이 되어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랑은 가만히 품속을 더듬었다. 설아가 그가 청풍헌을 나설 때 챙겨주었던 작은 주머니가 만져졌다. 주머니를 열자 쌉싸름하고 은은한 향내가 피어올랐다. 여승 묘은이 직접 제조해 주었다는 천연 침향(沈香)이었다. 은랑은 침향 조각을 꺼내어 입에 물고 깊게 호흡했다. 머리를 찌르던 두통이 침향의 온화한 향과 함께 한풀 꺾였다.
“어떻게 해야…… 소리의 결을 볼 수 있습니까?”
은랑이 낮게 묻자, 진표는 해금 활대를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고 부드러운 음색이 죽림을 메웠다.
“사천무 그 늙은이가 자네에게 물려준 지팡이는 단순한 막대기가 아닐세. 내부가 비어 있지 않은가? 대나무의 빈 공간은 바람의 흔들림을 담아내는 그릇이네. 지팡이를 움켜쥐지 말고, 가볍게 손끝만 대고 바람의 저항을 느껴보게. 그리고 자네의 단전을 지팡이의 울림과 일치시키는 걸세.”
은랑은 진표의 조언에 따라 청풍 지팡이를 가볍게 고쳐 쥐었다. 손가락 끝의 힘을 빼고, 지팡이 끝을 땅에서 살짝 들어 올렸다.
휘이이잉-
세찬 바람이 대나무 숲을 휩쓸고 지나갔다. 지팡이의 비어 있는 내부로 바람이 흘러들며 미세한 고주파의 진동이 일어났다. 지팡이 표면이 떨렸다. 은랑은 청풍검결(靑風劍訣)의 도가 호흡법을 전개하며 단전의 미약한 진기를 지팡이의 떨림과 동조시켰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지팡이의 떨림이 은랑의 손끝 경맥을 타고 올라가 뇌 신경의 청각 피질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억지로 진기를 밀어 넣었을 때의 극심한 통증 대신, 봄날의 온기 같은 부드러운 기운이 귀 주변을 감싸 안았다.
이윽고 대나무 숲의 시끄러운 백색 소음이 더 이상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수만 개의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는 거대한 파도의 흐름이 되었고, 대나무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숲의 관절이 움직이는 이정표가 되었다. 은랑은 소리의 파도 속에서 서서히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어둠 위에 대나무 숲의 입체적인 전경이 선명한 푸른색 선들로 재구성되었다.
진표는 은랑의 자세가 안정되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제 마음의 거울을 맑게 닦았으니, 진짜 노래를 들을 때가 되었군.”
진표의 손가락이 해금의 가장 얇은 쇠줄을 잡고 강하게 현을 퉁겼다.
탱-!
그 가볍고 날카로운 해금의 울림이 온 죽림의 공기를 찢고 사방으로 퍼져나간 바로 그 찰나.
은랑의 귀가 번뜩였다. 귀 주변의 경맥이 맑게 깨어나며 세상의 모든 잡음이 순간적으로 음소거된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완벽한 정적의 틈새를 뚫고,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아주 미세한 소리가 은랑의 귓전을 때렸다.
사각, 사각.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사귀의 소리가 아니었다. 십 장(十丈) 밖, 울창한 대나무 기둥 위 푸른 잎사귀 뒷면을 기어가는 아주 미세한 애벌레의 발소리였다. 벌레의 작은 다리들이 대나무 잎의 미세한 솜털을 쓸어내리는 파동이 은랑의 뇌리에 기적처럼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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