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천보벼랑의 풍운, 마지막 사냥개
천보벼랑(千寶崖)의 바람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매서웠다.
적암굴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 정상으로 이어지는 석조 계단을 밟을 때마다, 은랑의 뺨을 때리는 강풍의 기세가 점점 더 사나워졌다. 펄럭이는 하얀 눈가림 천 너머로 차가운 밤안개가 스며들었다. 지팡이를 잃어버린 오른손에는 오직 칼집조차 없는 벌거벗은 청풍검(靑風劍)만이 쥐여져 있었다. 검날 중심부에 새겨진 미세한 홈들이 몰아치는 광풍을 소리 없이 흡수하며 가볍게 떨렸다.
‘이 바람 소리…….’
은랑은 걸음을 멈추고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귀 주변의 청궁혈에서 시작된 이명이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듯 울렸다. 곽철패의 쇠방패 음공에 노출되어 파열된 고막은 이미 정상적인 가청 범위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벼랑 끝에서 불어오는 강풍의 포효는 그의 망가진 귀를 난타하며 주변의 미세한 기척을 완벽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이곳은 2년 전, 은랑이 믿었던 형제들의 칼날에 두 눈을 잃고 벼랑 아래 절벽으로 던져졌던 비극의 기원지였다. 추락의 공포가 서린 천보벼랑의 흙먼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은랑의 심장박동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드디어 올라왔군, 은랑.”
폭풍 같은 바람 소리를 뚫고, 절벽 정상의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차가우며, 뇌전의 기운을 머금은 듯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 과거 흑탑의 지하 탁아소에서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으나, 결국 탑주의 명령을 따르며 가장 먼저 은랑의 눈에 칼날을 들이밀었던 첫 번째 배신자.
추격대장 뇌영(雷影)이었다.
은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청풍검의 푸른 칼날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린 채, 발바닥 용천혈을 통해 전해지는 지면의 미세한 떨림에 집중했다. 뇌영이 딛고 있는 화강암 바닥의 진동이 은랑의 척추를 타고 올라와 그의 머릿속에 적의 대략적인 골격을 그려냈다.
“지팡이조차 잃어버린 장님이 청풍검 하나에 의지해 여기까지 기어 올라오다니, 참으로 가소롭구나. 네놈이 적암굴에서 유귀검을 꺾었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내 앞에서도 그 소리 없는 검이 통할 것 같더냐?”
뇌영이 허리춤에서 자신의 명검 ‘뇌사(雷蛇)’를 뽑아 들었다.
파지직—!
검날을 타고 푸른색 뇌전의 불꽃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번뜩였다. 뇌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천보벼랑의 강풍마저 밀어낼 듯 광포하게 휘몰아쳤다. 뇌영은 은랑이 소리와 진동에 의존해 싸우는 장님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은랑의 유일한 무기인 감각망을 정면으로 분쇄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눈먼 사냥개여, 다시 한번 심연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거라!”
뇌영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익힌 흑탑 비전의 뇌화공법(雷火功法)이 대기 중에서 폭발했다.
콰르릉—! 콰아아앙!
천보벼랑 정상에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천둥소리가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검날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번갯불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사방을 불태웠고,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적 굉음이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윽……!”
이미 상처 입은 은랑의 두 귀에 그 무자비한 굉음이 정면으로 꽂혔다.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은랑의 전신 기혈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방향 감각은 순식간에 마비되었고, 사지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며 움직일 수 없는 일시적 마비 상태에 빠졌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완벽한 암흑과 혼돈의 소용돌이였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뇌영의 뇌사검이 은랑의 머리 위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쳐졌다. 번개의 예기가 은랑의 이마를 스치며 하얀 눈가림 천의 실밥을 태워버릴 정도로 다급한 순간이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은랑은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그는 품속 깊은 곳에서 오 의원의 유품인 한빙석 침통을 더듬어 세 자루의 명문금침(命門金針)을 꺼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슴 명치와 머리 백회혈, 그리고 귀 뒤편의 청궁혈에 침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금침봉혈(針封穴).
뇌 신경의 발열을 억제하고 일시적으로 고통을 마비시키는 금기된 의술 비기였다. 그와 동시에 은랑은 단전의 기류를 정상적인 흐름의 반대 방향으로 거칠게 밀어 올렸다.
기경팔맥 역천공(逆天功).
“크으으읍……!”
은랑의 목구멍에서 핏빛 신음이 흘러나왔다. 경맥의 흐름을 강제로 역류시키자, 전신의 모공에서 미세한 핏방울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전신의 혈관이 파열되려 요동쳤고, 심장 주변의 경맥이 타들어 가듯 검게 변사하기 시작했다. 수명이 3년이나 단축되는 가혹하고도 치명적인 내상이었으나, 그 대가로 얻은 내력의 폭발력은 심연의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물과도 같았다.
파아아앗—!
은랑의 전신에서 붉은색 핏빛 진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고막을 찢던 뇌화공법의 굉음 소음을 내면에서 강제로 지워버렸다. 이명으로 가득 차던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맑게 가라앉으며 마음의 거울, 맹인심경(盲人心鏡)이 극성으로 단련되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공기의 결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은랑은 청풍검의 검날을 가볍게 비틀며 천보벼랑의 사나운 강풍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심풍검의 (心風劍意).
바람의 흔들림에 자신의 검과 육체를 온전히 동조시키는 경지였다. 뇌영의 뇌사검이 뇌전의 기운을 내뿜으며 은랑의 어깨를 베어 들어오는 찰나, 은랑은 바람이 검날에 부딪혀 갈라지는 미세한 기류의 궤적을 온몸의 피부 촉각으로 포착했다.
‘정면 우측 3치, 하강 속도는 매초 8장.’
은랑의 신형이 강풍을 타고 부드럽게 휘어지며 뇌영의 검세를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갔다. 뇌사검의 뜨거운 열기가 은랑의 하얀 안대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은랑의 청풍검은 이미 소리 없이 뇌영의 무기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챙-! 츠츠츠츳!
청풍검의 얇고 푸른 검날이 뇌영의 검날을 부드럽게 감싸 쥐듯 얽어맸다. 청풍검 내부의 미세한 홈들이 뇌전의 폭발적인 기운을 흡수하여 지면으로 흘려보냈고, 뇌영이 검을 회수하려 힘을 주는 찰나의 무게중심 변화가 은랑의 손끝에 진동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이게 무슨……! 내 뇌화공법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
뇌영이 경악하며 검을 뒤로 빼려 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은랑은 바람의 저항을 완전히 베어내어 파공음조차 상쇄시킨 심풍검의의 찌르기를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
쉭—
완벽한 침묵 속에서 청풍검의 푸른 칼날이 뇌영의 가슴 팍, 심장 정확히 1치 옆을 관통했다.
“컥……!”
뇌영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손에 쥐여져 있던 뇌사검의 뇌전 불꽃이 힘없이 사그라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른 칼날이 그의 가슴을 꿰뚫은 채, 붉은 선혈이 칼날의 홈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은랑은 검자루를 쥔 채, 뇌영의 몸을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에 집중했다. 그의 초청각이 뇌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걸러내어 들었다.
‘쿵…… 쿵…… 쿵……’
그것은 배신자의 탐욕스러운 박동이 아니었다. 극도의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2년 동안 뼈에 사무치도록 품어온 무거운 속죄의 박동이었다. 은랑의 뇌리에 2년 전 천보벼랑에서 눈이 멀어 떨어지던 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뇌영의 검날이 자신의 눈을 스치던 순간, 분명히 느껴졌던 그의 망설임과 눈물 어린 심장 소리.
“은…… 랑…….”
뇌영이 피를 토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려 은랑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손등에 닿는 눈물의 온기가 은랑의 얼어붙은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탑주…… 독고황의 진짜 명령은…… 네놈의 목을 베어 즉각 처형하는 것이었다…….”
뇌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네 눈만 멀게 해 절벽 아래로 던지지 않았다면…… 넌 그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 흑탑의 개먹이가 되었을 터…….”
은랑의 전신 골격이 충격으로 가늘게 흔들렸다.
“우리는 모두…… 탑주의 장기말일 뿐이다…… 은랑…… 내 손으로 네 빛을 빼앗은 죄…… 여기서 갚고 가마…….”
뇌영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은랑의 청풍검 끝으로 자신의 심장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심장박동이 단단한 진동을 남긴 채, 점차 느려지다 결국 완벽히 정지했다.
‘쿵…… 쿵…… 툭.’
뇌영의 거구가 은랑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쓰러졌다. 은랑은 피 묻은 청풍검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며, 천보벼랑의 휘몰아치는 강풍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복수의 첫 마침표는 가슴 벅찬 승리가 아닌, 가혹한 운명의 장기판을 마주한 맹인의 쓸쓸하고도 비장한 슬픔뿐이었다.
은랑은 쓰러진 뇌영의 무덤 앞에 그의 부러진 뇌사검을 꺾어 놓아주며, 복수의 목적이 단순한 증오가 아닌 슬픈 구원임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러나 슬픔에 잠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저편 안개 속에서, 뇌영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남궁세가 밀거래 장부(南宮世家 密密契 帳簿)를 낚아채 달아나려는 흑탑 감시관 독고준(독고준)과 남궁세가 추격자 남궁참(남궁참)의 급박한 발소리가 은랑의 예민한 감각망에 포착되었다.
“장부를 태워라!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독고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석문진 외곽의 버드나무 다리 방향으로 도주하는 그들의 기척이 벼랑 끝의 거센 바람을 타고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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