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적암굴의 검풍, 명검 청풍의 기지개
적암굴(赤암窟)의 입구는 짐승의 벌어진 목구멍처럼 기괴하고 음산했다.
동굴 내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비린내 나는 피 냄새와 유황 가스의 매캐한 열기가 뒤섞여 있었다. 은랑은 젖은 진흙 바닥을 디디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두 눈을 가린 하얀 눈가림 천은 이미 반향계곡에서 흘린 붉은 선혈로 얼룩져 있었다. 곽철패의 거대한 무쇠 방패가 뿜어내던 고주파 음공의 여파로 인해, 그의 두 귀는 여전히 먹먹한 이명(耳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삐이이이—’
머릿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잡음이 멈추지 않았다. 평소라면 사방 십 보 안의 벌레 발소리까지 읽어내던 초청각의 영역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가청 범위가 영구적으로 축소되었다는 한 의원의 경고가 귓가를 때렸지만, 은랑은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을 눈멀게 하고 심연으로 던졌던 원수, 뇌영(雷影)이 바로 이 동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랑은 왼손에 쥔 대나무 지팡이 ‘청풍’의 끝부분을 바닥에 가볍게 짚었다. 백천동(白川銅) 철 촉이 화강암 바닥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진동이 그의 손바닥을 타고 척추로 흘러들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대지가 전해주는 골격의 울림은 여전히 정직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불규칙하고 둔탁한 바람의 굴절이 감지되었다. 은랑의 피부 모공이 비명을 지르며 경고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피를 갈구하는 서슬 퍼런 살기(殺氣)였다.
스으으으—
기이할 정도로 무겁고 붉은 기운이 동굴 내부의 공기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은랑의 코끝에 훅 끼치는 쌉싸름한 피비린내. 이윽고 어둠 속에서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괴이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우우우웅—’
그 소리는 동굴 벽면에 부딪혀 수십 번의 메아리로 왜곡되며 다가왔다. 소리만 들어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괴한 마찰음. 피를 먹을수록 붉은 기운을 뿜어낸다는 마검 유귀(幽鬼)의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그 검을 쥔 자는 돈을 위해서라면 부모 자식도 가차 없이 참살한다는 잔혹한 낭인 검객, 유귀검(幽鬼劍)이었다.
“뇌영 대장이 고작 장님 하나를 잡으려 나를 고용했을 때에는 콧방귀를 꼈거늘…….”
어둠 속에서 낡고 헤진 검은 삿갓을 깊게 눌러쓴 유귀검의 파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향계곡의 고수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오다니. 과연 탑주께서 직접 이빨을 뽑아 버린 사냥개답구나.”
유귀검이 천천히 마검 유귀를 비껴들었다. 검날이 붉은 횃불 불빛을 반사하며 기괴한 혈색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은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팡이 끝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하고 몸을 낮추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네놈의 사냥은 여기까지다.”
유귀검의 신형이 움직였다. 그의 보법은 가볍고도 잔인하여, 딛는 자리마다 붉은 모래가 소리 없이 비산했다.
스윽—!
유귀검이 허공을 가르며 유귀검법(幽鬼劍法)의 제1초식을 전개했다. 마검 유귀가 바람을 찢어발기며 귀신의 곡소리 같은 고주파 음파를 사방으로 방출했다. 안 그래도 곽철패의 음공으로 상처 입은 은랑의 고막에 그 기괴한 파공음이 정면으로 꽂혔다.
“윽……!”
은랑은 관자놀이가 쪼개지는 듯한 극심한 두통에 순간적으로 신형을 흔들었다. 소리의 발원지가 사방으로 뒤틀려 느껴졌다. 유귀검의 붉은 검날은 이미 은랑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은랑은 본능적으로 대나무 지팡이 ‘청풍’을 대각선으로 들어 올려 검로를 가로막았다.
깡—! 콰아아앙!
쇠붙이와 단단한 대나무가 부딪치는 소리가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백천동 철 촉이 장착된 지팡이 끝부분은 마검의 예리함을 견뎌냈으나, 유귀검이 뿜어내는 파괴적인 살신공(殺神功)의 내력은 지팡이의 몸통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쩍! 쩍쩍!
지팡이 표면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대나무 가죽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 전투들로 인해 미세한 균열 피로가 누적되어 있던 지팡이였다. 유귀검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검에 내력을 더 강하게 실어 내리눌렀다.
“부러져라!”
파지직—!
마침내 은랑의 눈 역할을 하던 소중한 대나무 지팡이 ‘청풍’이 버티지 못하고 반으로 쩍 갈라지며 공중으로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스승 사천무가 물려준 유품이자, 은랑이 세상과 소통하던 유일한 매개체가 완벽히 완파당하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지팡이를 잃은 장님이 어찌 내 검을 피하겠느냐!”
유귀검이 승리를 확신하며 쪼개진 지팡이 틈새로 마검 유귀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하지만 그 순간, 은랑의 얼굴에는 공포도, 당혹감도 없었다. 오직 차갑고 서늘한 해탈만이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 감돌고 있었다.
지팡이가 반으로 갈라지며 겉을 감싸고 있던 대나무 껍질이 사방으로 날아가는 찰나, 그 비어 있던 내부 구조 속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는 얇고 날카로운 검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으으으—
그것은 사천무 스승이 은랑에게 남겨두었던 진짜 무기이자, 소리 없이 바람을 가르는 명검 청풍검(靑風劍)이었다.
은랑은 뒤로 가볍게 신법을 펼쳐 물러나며, 오른손으로 지팡이 손잡이 속에 숨겨져 있던 청풍검의 칼자루를 굳게 쥐고 소리 없이 비틀어 당겼다.
스윽.
푸른 명검 청풍검이 마침내 기지개를 켜며 세상 밖으로 완전히 뽑혀 나왔다. 검날의 중심부에 새겨진 미세한 홈들이 동굴 내부의 공기를 소리 없이 흡수하며 대기의 흐름을 완전히 제어로 조율하기 시작했다.
유귀검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검세를 멈추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적의 검로를 소리로 들으려 두 귀를 극도로 쫑긋 세웠다. 흑탑의 살수라면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파공음만으로도 상대의 검의 위치와 궤적을 1치 오차 없이 읽어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는 마찰음도, 옷깃 스치는 소리도 없었다. 은랑이 청풍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동작조차 완벽한 진공 속을 지나는 것처럼 무음(無音) 그 자체였다.
“이, 이게 무슨……! 왜 검풍 소리가 나지 않는 거지?”
유귀검의 파리한 얼굴이 경악으로 뒤틀렸다. 보이지 않는 검이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면, 시각을 잃은 자신보다 상대의 검을 막아내기가 백 배는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은랑은 마음속의 거울, 맹인심경(盲人心鏡)을 맑게 닦아내며 단전의 모든 순양진기를 청풍검 날에 고르게 밀착시켰다.
심풍검의 (心風劍意).
바람의 저항 그 자체를 베어내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소리 없이 찔러 넣는 최고의 절기였다. 은랑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유귀검의 방어선 안쪽으로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유귀검이 비명을 지르며 마검 유귀를 미친 듯이 휘둘러 붉은 검막을 형성하려 했으나, 청풍검의 푸른 검날은 바람의 결을 따라 소리 없이 그 장막의 틈새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쉭—
파공음이 일시에 침묵하는 정적 속에서, 청풍검의 예리한 칼날이 유귀검의 목덜미를 소리 없이 깊숙이 관통했다.
“컥…… 으읍……”
유귀검은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선혈을 움켜쥐며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손에 쥐여져 있던 마검 유귀가 내뿜던 귀신 소리 검풍이 일시에 침묵하며 어두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은랑은 소리 없이 청풍검을 비틀어 빼내며 차갑게 속삭였다.
“보이는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소리조차 잃은 네놈이 내 검을 어찌 막겠느냐.”
유귀검의 거구가 바닥으로 둔탁하게 쓰러지며 적암굴의 어둠 속에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은랑은 피 묻은 청풍검을 비스듬히 쥔 채, 동굴 천장 저편에서 불어오는 더 거칠고 차가운 뇌전의 기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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