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차가운 연못의 정화, 타오르는 이빨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암석이 대기를 짓누르는 압력은 지독하리만치 무거웠다. 고막이 터져 나가 이명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침묵 속에서, 은랑의 의식은 칠흑 같은 심연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부서진 대들보가 무너지며 뿜어낸 붉은 채석장 먼지가 허공을 가득 메웠고, 그 뒤로 쏟아지는 차가운 밤비 소리가 그의 꺼져가는 전신 감각을 쓸쓸히 두드렸다.
“어 서……! 어서 큰형님을 구해야 한다!”
광태는 가쁜 호흡을 내쉬며 진흙 바닥을 기었다. 온몸이 낙석 잔해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은랑이 쓰러진 돌더미를 향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뇌영의 가혹한 지옥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평범한 인간으로 보아주었던 장님 무사. 그를 이 무너진 돌무더기 아래에서 썩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광태는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것조차 잊은 채, 은랑의 상체를 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 파편들을 미친 듯이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빗속을 뚫고 가냘프지만 단단한 손길이 광태의 손을 덮쳤다. 설아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소녀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으나, 그녀의 맑고 깊은 눈망울에는 눈물과 함께 강인한 의지가 요동치고 있었다. 설아는 짓이겨진 은랑의 무명옷 소매를 붙잡고 힘껏 당겼다. 똘복 역시 사냥꾼 특유의 억센 완력으로 은랑의 허리를 감싸 안아 올렸다. 세 사람의 처절한 손길이 맞물린 끝에, 마침내 은랑의 만신창이가 된 육체가 붕괴하는 적암굴 입구 바깥의 진흙더미 위로 극적으로 끌어올려졌다.
우구구궁!
그들이 발을 뺀 찰나의 순간, 거대한 아치형 암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채석장의 입구를 영구히 봉쇄해 버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모두가 그 어두운 무덤 속에 영원히 갇혔을 터였다.
“여기 계속 머물 수는 없다. 뇌영의 자객들이 언제 다시 포위망을 좁혀올지 몰라.”
광태가 은랑의 한쪽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은랑의 전신 자상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광태의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은랑의 두 귀와 코에서는 폭발 소음의 충격으로 인해 검붉은 피가 여전히 번져 나오고 있었고, 그의 호흡은 쇠약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설아는 말없이 은랑의 가슴에 손을 대어 미세하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단호한 손짓으로 대나무 숲 깊은 곳을 가리켰다. 사천무 스승이 생전에 남겨둔 안가이자, 대나무 숲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천연 얼음 연못인 ‘한천담(寒冰潭)’이 있는 방향이었다.
세 사람은 밤비가 대나무 잎을 때리는 거친 소음을 장막 삼아, 은랑을 부축한 채 죽림의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들개 진진이 오른쪽 앞다리를 절면서도 그들의 앞길을 안내하듯 소리 없이 달렸고, 빗물은 그들이 남긴 핏자국을 신속히 지워나갔다.
***
대나무 숲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천연 동굴 청풍동 내부.
지상의 폭우 소리가 아득한 메아리가 되어 흘러드는 이곳의 공기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동굴 중앙에는 지하 빙하수가 솟아올라 형성된 얼음처럼 차가운 연못, 한천담이 푸르스름한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물결조차 일지 않는 한천담의 극음(極陰)의 냉기는 숨을 쉴 때마다 허파를 얼려버릴 듯 지독했다.
광태와 똘복은 은랑의 피 묻은 삼베옷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그의 상체를 차가운 한천담 물속에 천천히 담갔다.
치이이익—!
은랑의 살이 물에 닿는 순간, 기이하게도 물 표면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명문금침으로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렸던 대가와 뇌 신경 과부하로 인해, 은랑의 뇌와 전신 경맥이 불덩이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의 관자놀이 부근 푸른 경맥들이 터질 듯 요동치며 붉은 핏발을 세우고 있었다.
“으윽…….”
의식을 잃은 은랑의 입술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천담의 뼈를 깎는 듯한 한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뇌 세포와 충돌하며 극심한 기혈의 뒤틀림을 유발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열기가 식기도 전에 한독(寒毒)이 기경팔맥을 침범해 심장이 멈출 위기였다.
설아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소녀는 젖은 옷을 입은 채 바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 의원이 남겨준 백년 한빙석 침통과, 눈으로 만져서 읽을 수 있도록 동판에 양각으로 새겨진 비밀 침술첩이 들려 있었다.
설아는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침통을 열었다. 침통 내부에서 차가운 영기를 품은 금빛의 명문금침(命門金針) 세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신침의 유산이자, 은랑의 무너진 기혈을 보수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소녀는 침술첩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금침봉경술(針封經術). 백회와 이문을 찔러 뇌 신경의 발열을 강제로 진정시키고, 찢어진 경맥의 구멍을 메워 진기의 누출을 막는다. 하나, 이 비술을 쓸 때마다 기경팔맥의 잠재된 생명력이 연소되어 수명이 단축될지니…….’
설아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 침을 놓을 때마다 은랑의 수명이 갉아먹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침을 놓지 않으면 은랑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뇌 신경이 완전히 타버려 죽음에 이를 터였다.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에 단단한 결의가 깃들었다. 설아는 은랑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그의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숨을 죽인 채, 첫 번째 명문금침을 은랑의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百會穴)을 향해 깊숙이 찔러 넣었다.
스윽.
침이 두피를 뚫고 들어가 뇌 신경의 혈맥을 자극하자, 은랑의 전신이 일시적으로 강하게 경련했다. 그의 단전에 머물러 있던 미약한 진기들이 백회혈을 향해 급격히 역류하기 시작했다.
설아는 흔들리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금침을 꺼내어 은랑의 양쪽 귀 뒤편에 위치한 이문혈(耳門穴)에 차례로 꽂아 넣었다. 침 끝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금빛 기운이 은랑의 귀 주변 혈류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 순간, 은랑의 뇌리로 흘러들던 뜨거운 피의 흐름이 일시에 멈추는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
‘……죽어라, 은랑.’
어두운 심연 속에서 차가운 환청이 울려 퍼졌다. 흑탑의 탑주, 독고황의 가면 뒤에 숨겨진 잔혹한 목소리였다.
‘너는 쓸모가 다한 사냥개에 불과하다. 사냥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면 어떻게 되는지 잊었느냐.’
사방에서 붉은 사슬들이 흘러나와 은랑의 온몸을 옭아맸다. 그 사슬의 끝에는 그가 평생 동안 뇌리에 박아두어야 했던 흑탑 살수십계명의 문구들이 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정심은 무덤을 파는 삽이다. 스승이라도 명령이면 목을 벤다. 배신한 동료는 사지를 찢어 발긴다.
그 비정한 세뇌의 굴레가 은랑의 영혼을 어두운 나락 속으로 사정없이 끌어내리고 있었다. 은랑은 그 어둠 속에서 홀로 검을 쥔 채 비틀거렸다.
‘나는…… 정녕 괴물에 불과한가.’
오 의원의 죽음이, 조 할머니의 비명이, 그리고 자신이 죽여야 했던 수많은 동료들의 망령이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에 쥔 청풍검 끝에서 피비린내 나는 붉은 살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살기가 심장을 잠식하려 할 때였다.
“소리를 이기려 하지 말거라, 은랑아.”
어둠을 깨뜨리고 따뜻한 바람 소리와 함께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을 뒤로 묶고 허름한 도포를 걸친 채 늘 술병을 차고 다니던 인자한 인상의 중년 고수. 그의 진정한 스승이자 아버지였던 사천무(司天武)였다.
“살기는 스스로의 눈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둘 뿐이다. 눈이 멀었기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더냐. 네 마음에 도사린 증오를 바람에 흘려보내고, 그저 만물이 내는 본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라.”
사천무의 목소리가 은랑의 뇌리를 맑게 씻어내렸다. 은랑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속 거울을 맑게 닦아내는 맹인심경(盲人心鏡)을 전개했다. 그리고 광해선사에게 배운 불가 비전의 대자비심법(大慈悲心法) 구결을 천천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대자비심(大慈悲心)은 곧 무형의 방패니, 마음속의 살기와 분노를 정화하여 마도에 빠지지 않게 하라…….’
은랑은 마음속 붉은 사슬들을 향해 청풍검을 휘두르는 대신, 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가 살기를 거두고 대자비의 마음을 품는 순간, 전신을 옭아매고 있던 흑탑의 세뇌 사슬들이 연기처럼 소리 없이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한천담의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그의 백회혈과 이문혈을 통해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뜨겁게 끓어오르던 기혈이 차가운 냉기와 조화를 이루며 정돈되기 시작했다. 찢어진 경맥의 구멍들이 금침의 약효와 한천담의 영기에 의해 미세하게 메워졌고, 거꾸로 솟구치던 진기들이 정상적인 대주천의 흐름을 타고 온화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심장 주변의 경맥 일부가 금침 사용의 부작용으로 인해 미세하게 검게 변사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만, 그의 타들어 가던 뇌 신경만큼은 완벽한 침묵 속에서 정화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은랑은 비로소 차가운 이성과 한층 더 단단해진 이빨을 얻게 되었다.
***
스으으으.
귀를 때리던 이명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정적 속에서, 은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두 눈은 여전히 먼지 묻은 하얀 천으로 굳게 가려진 실명 상태였지만, 그의 머릿속 3차원 공간 지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맑은 선들로 재구성되어 있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한천담 표면에 부딪혀 내는 미세한 동심원의 파동, 동굴 벽면의 미세한 틈새로 흘러드는 바람의 결이 그의 뇌리에 거울처럼 투명하게 그려졌다.
은랑이 가볍게 상체를 일으키자, 그의 가슴가에 닿아 있던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설아였다. 소녀는 은랑의 침상 옆에 엎드린 채 밤새 그의 상태를 보살피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은랑의 미세한 움직임에 설아가 즉시 눈을 떴다. 소녀는 소리를 내지 못했으나, 은랑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은랑은 설아의 손등을 다른 한 손으로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걱정 끼쳤구나. 이제 괜찮다.”
은랑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동굴 내부에 맑게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폭주하던 살기 대신,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고요하고 서늘한 의기(義氣)가 담겨 있었다.
설아는 은랑의 손바닥을 펼치더니, 가냘픈 손가락 끝으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글씨를 써 내려갔다.
[광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마을이 위험해요.]
은랑의 두 눈가림 천 아래로 서늘한 안광이 언뜻 스쳤다. 그는 지면에 놓여 있던 대나무 지팡이 청풍을 쥐고 일어섰다. 비소와의 대결로 인해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지만, 백천동 철 촉이 장착된 끝부분만큼은 여전히 단단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은랑이 동굴 안쪽의 바위 통로로 걸어 나가자, 어둠 속에 대기하고 있던 광태가 즉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큰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광태의 목소리에는 은랑을 향한 깊은 경외심과 진심 어린 충성심이 깃들어 있었다.
“정리되었다. 석문진의 상황은 어찌 되었느냐.”
은랑이 묻자, 광태는 무거운 호흡을 내쉬며 보고를 시작했다.
“뇌영 그 악독한 놈이 석문진 관청의 서문 수비대장과 결탁했습니다. 관청의 힘을 빌려 큰형님을 ‘민초들을 학살한 극악무도한 대역죄인’으로 관아에 공식 수배했습니다. 지금 수백 명의 포졸들과 관군들이 석문진의 모든 출입구를 촘촘히 봉쇄하고, 마을 주민들을 이 잡듯 뒤지며 큰형님의 행방을 쫓고 있습니다.”
광태의 보고를 듣는 은랑의 손끝이 대나무 지팡이를 굳게 쥐었다.
뇌영이 관청의 공권력까지 끌어들여 자신을 고립시키고, 석문진의 민초들을 다시 한번 압박하려 덫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은 눈먼 사냥개의 이빨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정교하게 벼려져 있었다.
그때, 설아가 은랑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소녀는 자신의 품속 깊은 곳에서 아버지가 남겨준 소중한 비전 약상자를 열어, 맑고 단단한 향내를 풍기는 우황청심단(牛黃淸心丹) 한 알을 꺼냈다. 오 의원이 은랑의 경맥 파열과 급격한 진기 소모 시 심장마비를 막기 위해 특별히 조제해 두었던 마지막 구명 단약이었다.
설아는 은랑의 손바닥 위에 우황청심단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둥글고 단단한 단약의 촉감과, 소녀의 간절한 눈빛이 은랑의 마음을 서늘하게 채웠다.
은랑은 단약을 쥐어쥔 채, 멀리서 불어오는 차가운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를 향해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복수의 사냥개는 이제 멈추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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