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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붉은 안개의 구출, 회유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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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우웅!

백천동(白川銅) 철 촉이 장착된 대나무 지팡이 끝이 거구 금강의 오른쪽 무릎 관절을 정확히 관통했다. 무릎 뼈가 산산조각 나며 으스러지는 기괴한 진동이 지팡이 손잡이를 타고 은랑의 손바닥으로 찌릿하게 전해졌다. 금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미 은랑의 타격에 기맥이 뒤틀려 목구멍이 턱 막혀버린 탓이었다. 거구의 몸이 갱도 바닥으로 무겁게 쓰러지며 대지에 묵직한 진동을 남겼다.


하지만 은랑에게는 승리를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이명(耳鳴)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뇌공탄의 대폭발로 인해 양쪽 고막이 완전히 파열되어, 귀 주변에서 끈적하고 뜨거운 선혈이 흘러내려 하얀 눈가림 천을 붉게 물들였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한 침묵 속으로 침몰했다. 삐이이이— 하는 이명의 장벽 너머로, 오직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지면의 미세한 열기뿐이었다.


‘도화선이 타들어 가고 있다.’


은랑은 먼 눈을 질끈 감았다.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시야 속에서, 화약 냄새가 바람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는 궤적이 느껴졌다. 도화선의 붉은 불꽃이 조 할머니와 가난한 민초들이 묶여 있는 절벽 아래 화약 상자를 향해 기어가는 속도가 머릿속에 시간 단위로 계산되었다.


앞으로 삼息(약 9초).


그 시간이 지나면 조 할머니를 비롯한 석문진의 이웃들은 형체도 없이 폭사할 터였다. 은랑은 부상당한 옆구리를 움켜쥐며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백회혈에 꽂아둔 명문금침의 약효가 점차 흐려지며 단전의 진기가 거꾸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목구멍에서 비린 뜨거운 피가 울컥 치밀었다. 몸이 무거워 한 걸음조차 떼기 힘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폐채석장의 어두운 바위 그늘 속에서 한 사내가 움직였다.


그는 뇌영의 부하였으나 대나무 숲에서 은랑의 자비로 목숨을 건졌던 회유된 자객, 광태였다. 광태는 바위 뒤에 숨어 이 모든 처절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흑탑의 살수로서 평생을 냉혈하게 살아왔던 그였지만, 자신들을 착취하고 무고한 민초들마저 장기말로 쓰는 뇌영의 잔혹함에 깊은 환멸을 느끼던 차였다. 무엇보다 눈이 먼 상태에서도 이웃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연소시키는 은랑의 숭고한 의기가 그의 얼어붙은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저 장님은……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런데 나는 왜 여전히 이 지옥의 사냥개로 살아가고 있는가.’


광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심장박동이 거칠게 요동쳤다. 은랑은 귀가 멀어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지팡이 끝 백천동 철 촉을 통해 바닥으로 전해지는 광태의 급박한 발걸음 진동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진동 속에 담긴 살기가 자신이 아닌, 도화선을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은랑은 부러진 지팡이를 가볍게 짚으며 바닥에 특수한 주파수의 진동 신호를 흘려보냈다. 과거 흑탑의 지하 탁아소에서 사용되던 은밀한 수신호 진동이었다.


‘지금이다. 끊어라.’


광태는 은랑의 진동 신호를 발끝으로 느끼는 순간,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으아아아!”


광태가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뛰쳐나왔다. 그의 손에 쥔 단도가 허공에서 차갑게 번뜩였다. 뇌영의 눈길이 쓰러진 금강에게 쏠려 있던 찰나의 빈틈이었다. 광태는 몸을 날려 조 할머니의 발밑, 화약 상자 직전까지 타들어 가던 붉은 도화선을 향해 단도를 내리쳤다.


챙-!


날카로운 쇠붙이 마찰음과 함께 불꽃을 튀기며 기어가던 도화선이 단숨에 두 동강 났다. 화약 상자 바로 앞 1치(약 3cm) 거리에서 불꽃이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극적인 차단이었다.


절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뇌영의 전신 골격이 분노로 거칠게 뒤틀렸다. 은랑은 귀로 들을 수 없었으나, 뇌영의 심장박동이 미친 듯이 폭발하며 그가 들고 있던 철검의 검기가 사방의 바위를 긁어내는 진동을 피부로 느꼈다. 계획이 완벽히 어그러졌음을 깨달은 뇌영은 이빨을 갈며 절벽 벽면에 설치된 또 다른 가죽 레버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지하 갱도의 지지대를 무너뜨려 채석장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마지막 동귀어진의 덫이었다.


쿠구구구구!


사택 사방의 단단한 암벽들이 그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뇌영은 잔당들을 이끌고 절벽 뒤편의 비밀 통로를 통해 안개 속으로 빠르게 퇴각했다. 그와 동시에 폐채석장의 천장이 완전히 무너지며 거대한 바위 파편들과 붉은 돌가루 안개가 폭풍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지하 광산 특유의 탁하고 무거운 붉은 먼지 장막이 피어오르며 시야는 물론이고, 소리의 반사 궤적마저 완전히 뒤틀어버렸다. 은랑의 고막 파열과 돌가루 소음의 이중 교란으로 인해 그가 신뢰하던 반향정위(反響定位) 심법이 완벽히 무력화되었다.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낙석 소리가 머릿속 3차원 지도를 엉망으로 찢어놓았다.


‘소리에 의존하면 죽는다.’


은랑은 차갑게 이성을 붙잡았다. 그는 청각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전신의 모공을 열어 피부 표면에 미세한 진기 막을 형성하는 기류 감지(氣流感知)를 극도로 전개했다.


바람의 흐름이 달라졌다.


거대한 바위가 천장에서 떨어질 때마다 공기를 밀어내며 발생하는 미세한 기압의 변화와 바람의 결이 전신의 피부 촉각을 통해 선명하게 읽혀왔다. 은랑의 머릿속에 소리가 아닌, 공기의 굴절 선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가 그려졌다.


쉬이이익!


머리 위에서 집채만 한 바위가 소리 없이 낙하했다. 은랑은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의 압력을 감지하고, 사천무 스승의 풍류보(風流步)를 전개해 몸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콰아앙! 거대한 바위가 그의 어깨 옷깃을 스치며 바닥을 뭉개버렸다. 폭풍처럼 불어오는 돌가루 안개 속에서도 은랑의 신형은 유령처럼 유연하게 낙석들의 사각지대를 찾아 비껴갔다.


“할머니! 이쪽입니다!”


안개 속에서 사냥꾼 똘복이 기침을 터뜨리며 주민들의 밧줄을 풀고 있었다. 광태 역시 단도로 주민들의 포박을 빠르게 잘라내며 탈출로를 확보했다.


은랑은 기류 감지를 통해 조 할머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소리 없이 다가갔다. 그는 겁에 질려 전신을 떨고 있는 조 할머니를 한쪽 팔로 가볍게 안아 올렸다.


“할머니, 제 어깨를 잡으십시오. 곧 나갈 것입니다.”


조 할머니는 대답 대신 은랑의 젖은 삼베옷 어깨를 굳게 쥐었다. 은랑의 전신 자상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할머니의 손을 적셨지만, 할머니는 그 차가운 청년의 몸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똘복이, 광태! 나를 따르라!”


은랑은 지팡이 끝 백천동 철 촉으로 바닥의 붕괴 속도를 읽으며 앞으로 질주했다. 천장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낙석들이 공기를 가르는 결을 피부로 읽어내며, 그는 동료들과 주민들을 안전한 사각지대로 인도했다. 붉은 돌가루 먼지가 허공을 가득 메워 숨이 막히고 눈이 따가운 지옥 같은 환경이었지만, 눈먼 사냥개의 보이지 않는 발걸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무리한 내력 운용과 화약 가스의 유독한 기운이 허파를 파고들면서, 은랑의 내부에서 파열음이 일어났다. 명문금침으로 억지로 묶어두었던 뇌 신경 과부하(腦神經過負荷)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것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하얀 눈가림 천 아래로,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전신의 경맥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은랑의 다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의식이 흐려지고, 피부로 느끼던 기류의 선들이 조금씩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안 된다. 조금만 더…….’


은랑은 이를 악물며 마지막 진기를 발끝에 모았다.


저 멀리, 무너지는 채석장 입구 너머로 쏟아지는 밤비의 서늘한 기류가 피부에 닿았다. 탈출구가 코앞이었다. 은랑은 전력을 다해 질주하여 조 할머니와 주민들을 붕괴하는 동굴 입구 바깥의 진흙바닥 위로 거칠게 밀어냈다. 광태와 똘복 역시 마지막 주민을 안고 극적으로 동굴을 탈출해 빗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모든 주민이 무사히 탈출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구구궁!


채석장 입구의 거대한 아치형 대들보 바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은랑은 주민들을 밀어내느라 미처 발을 빼지 못한 채 동굴 안쪽에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거대한 암석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이명 소리마저 사라진 완벽한 정적 속에서, 은랑의 뇌 신경이 완전히 방전되며 전신의 감각망이 꺼져갔다. 피부로 느끼던 바람의 결마저 지워지고, 그의 몸이 차가운 어둠 속으로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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