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심연의 실명, 바람을 듣는 자
암흑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신을 짓누르는 무겁고 끈적한 심연의 아가리였다.
“억……!”
은랑은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가슴을 찢는 듯한 격통과 함께 무참히 꺾였다. 단전에서부터 역류한 탁기가 기경팔맥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찢어진 경맥 사이로 진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전신이 불타는 듯한 고열에 휩싸였다. 은랑은 다시 침상 위로 무너지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눈을 뜨려 했다. 그러나 눈꺼풀 위를 무겁게 덮고 있는 것은 축축하고 거친 삼베 안대였다. 안대 너머로 단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오직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눈가를 찌르는 타는 듯한 화끈거림뿐이었다.
‘내 눈이…….’
기억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천보벼랑의 칼바람, 자신을 둘러싸고 차가운 눈빛을 보내던 동료들. 그리고 평생을 아버지이자 신으로 모셨던 흑탑의 탑주, 독고황의 가면 뒤 차가운 목소리.
- 사냥개가 너무 영민해지면 주인의 목을 노리는 법. 은랑, 너의 이빨은 여기까지다.
동료들의 배신으로 두 눈에 독검이 박혔던 그 순간의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며 바람에 찢기던 육신의 감각이 전신을 엄습했다. 은랑은 공포에 질려 거칠게 발버둥 쳤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허공을 휘저었다.
“진정하게! 기혈을 억지로 움직이면 단전이 완전히 깨져 나갈 걸세!”
그때, 귓가에 낮고 거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투박하지만 굳건한 손길이 은랑의 가슴 명치 부근인 전중혈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쌉싸름하고 매캐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억, 으구……!”
은랑은 몸을 뒤틀었으나, 노인의 손길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설아야, 침통을 가져오너라! 어서!”
노인의 다급한 외침 뒤로, 가볍고 빠른 발소리가 서둘러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락거리는 거친 무명옷의 마찰음. 아주 작고 가냘픈 기척이었다.
이윽고 은랑의 이마와 관자놀이, 그리고 쇄골 부근에 얼음처럼 차가운 쇠붙이들이 빠르게 꽂히기 시작했다. 백 년 묵은 한빙석으로 만든 오 의원의 은침이었다. 생사경맥을 조율하는 신침기법이 전개되자, 미쳐 날뛰며 경맥을 찢어발기던 진기들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타들어 가던 단전의 열기가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후우…… 후우……”
은랑은 간신히 호흡을 고르며 침상에 몸을 묻었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네만, 전신의 경맥이 걸레짝처럼 찢겨 나갔네. 지금 자네의 몸으로는 삼류 무사의 내력조차 온전히 다루기 버거울 걸세. 게다가 자네의 두 눈은…….”
오 의원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안대 너머로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닌 끈적한 핏물이었다.
‘실명(失明).’
살수에게 눈이 멀었다는 것은 곧 죽음보다 더한 선고였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 적의 숨통을 끊는 도구로 살아왔거늘, 이제는 스스로 한 걸음조차 떼지 못하는 고기덩어리에 불과하다니.
귓가에 다시 이명처럼 환청이 울려 퍼졌다. 흑탑의 지하 탁아소 시절부터 뼈에 사무치도록 외워야 했던 가혹한 규율, 흑탑 살수십계명이었다.
- 쓸모가 다한 도구는 즉시 폐기한다.
- 살수는 개인의 감정을 품지 않으며, 동정심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삽이다.
- 스승이라도 조직의 명령이라면 망설임 없이 목을 벤다.
독고황의 차가운 음성이 뇌리를 헤집을 때마다 은랑은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을 키워준 양아버지이자 사부였던 이에게 도구처럼 쓰이고 버려졌다는 배신감, 그리고 평생을 살수로 살며 흘렸던 무고한 이들의 피가 환청이 되어 울부짖었다. 차라리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나을 터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은랑이 입술을 짓씹는 순간, 아주 작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떨리는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거칠고 굳은살 박힌 자신의 손과 대비되는, 때 묻지 않은 맑은 온기였다. 은랑은 흠칫 놀라 손을 빼려 했으나, 그 부드러운 손길은 더욱 단단하게 그의 손가락을 맞잡아왔다.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소녀, 설아였다.
설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규칙적인 맥박과 따뜻한 체온은 은랑의 살기 어린 내면을 차분하게 보듬어 주었다. 피비린내 나는 살수의 지옥 속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때 묻지 않은 온기였다.
이윽고 설아는 은랑의 손을 이끌어 침상 옆에 놓여 있던 길쭉하고 단단한 물건을 쥐여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매끄럽고 서늘한 감각. 마디가 굵고 단단하게 여문 늙은 대나무의 질감이었다. 은랑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그 물건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그의 옛 참된 스승이자, 독고황에게 처형당했던 사천무가 남겨준 유품, 대나무 지팡이 ‘청풍’이었다.
“이것은…… 스승님의…….”
은랑의 마른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팡이를 쥐는 순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대나무 지팡이의 내부는 비어 있었다. 그 빈 공간을 타고 청풍헌 마당을 세차게 뒤흔드는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가 미세한 공명음이 되어 은랑의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지팡이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은랑의 손가락 끝 신경을 자극하고, 팔의 경맥을 타고 내려가, 오 의원의 침술로 간신히 고정된 단전의 기혈과 기적적으로 동조하기 시작했다. 미쳐 날뛰던 내력이 대나무 지팡이의 자연스러운 공명과 하나가 되며 완벽한 평정을 찾았다.
은랑은 자신도 모르게 대나무 지팡이 끝을 방바닥에 가볍게 내리디뎠다.
탁.
맑고 가벼운 타격음이 청풍헌의 좁은 방 안을 울렸다.
그 순간, 지팡이 끝에서 시작된 미세한 파동이 방바닥의 나무판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동은 가구에 부딪히고, 벽에 닿았으며, 은랑의 손을 잡고 있는 설아의 작은 발끝을 타고 돌아왔다.
은랑의 머릿속 칠흑 같던 암흑 위에, 하얗고 푸른 미세한 진동의 선들이 거울처럼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방 안의 고저차, 가구의 위치,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설아의 가냘픈 실루엣이 소리의 반사파가 되어 뇌리에 3차원의 지도로 투영되었다.
눈은 멀었으나, 세상이 비로소 다른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은랑의 입꼬리가 비장하게 굳어졌다. 흑탑의 눈먼 사냥개는, 이제 바람의 진동을 타고 다시 사냥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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