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혈초의 뜨거운 불꽃
지련실 화덕의 붉은 불꽃이 천위의 결연한 눈동자에 반사되는 순간, 그는 굳어버린 육체를 이끌고 창고 기습을 위한 한밤의 어둠 속으로 다시 몸을 던졌다.
황토현의 밤은 깊고도 무거웠다. 매캐한 석탄 타는 냄새와 쇳가루가 뒤섞인 차가운 안개가 대장간 거리의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상의 열기가 하수구의 차가운 습기와 만나 이질적인 연기를 피워 올리는 한밤중, 세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다리가 돌처럼 굳어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석천위는 덕구와 아란의 어깨에 무겁게 의지한 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 천위가 디딜 때마다 그의 하반신 뼈마디에서 천련심법(鐵鍊心法)의 내력이 삐걱거리는 둔탁한 소리를 냈으나, 자욱한 매연과 사방에서 밤낮없이 울리는 대장간의 망치 소리 덕분에 외부로 퍼지지는 않았다.
“형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철사분타의 폐쇄 창고는 이 골목을 지나 성벽 모퉁이를 돌면 바로 나옵니다.”
덕구가 목소리를 극도로 낮추며 천위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아란 역시 창백해진 얼굴로 천위의 오른편을 부축하며, 그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열기를 감지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천위 씨,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있어요. 가슴과 어깨의 열상에서 피가 스며 나와 붕대를 적시고 있단 말이에요.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쓰면 석화가 가슴 위로 번질 거예요.”
“괜찮다.”
천위가 가라앉은 쇳소리로 나직하게 답했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검푸른 안광을 발하며 오직 전방의 창고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기가 없는 무인은 이빨 빠진 맹수와 같다. 철기 노인이 강철 곡괭이를 다듬기 전까지는,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재료를 조달해야 한다.”
천위의 왼팔, 팔꿈치 아래로 완벽하게 회색 돌로 변해버린 화석마공(化石魔功)의 육체는 삼베 붕대 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촉각도, 온기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의 팔. 그러나 이 기괴한 팔이야말로 그가 가문의 원수들을 단죄하기 위해 지불한 처절한 대가이자, 유일한 방패였다.
이윽고 그들은 철사분타 외곽의 버려진 폐쇄 창고 뒤편에 도달했다. 한때 고순도의 철사광석을 임시로 보관하던 이곳은, 지반 침하와 유독 가스 분출로 인해 지금은 자물쇠가 굳게 채여 방치된 통제 구역이었다. 하지만 뇌진풍이 사적으로 수집한 비자금 자원인 ‘흑철 정수(黑鐵 精髓)’와, 습한 바위 틈새에서 자라나는 희귀 약초 ‘적혈초(赤血草)’가 이곳 지하 보관실에 은밀히 숨겨져 있다는 것을 철기 노인은 알고 있었다.
“보초는 둘입니다. 한 시진마다 교대하지만, 지금은 야간 수색령이 내려져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야 합니다.”
덕구가 창고 모퉁이 벽면에 바짝 붙어 상황을 살폈다. 천위는 아란의 부축을 받아 벽에 몸을 기댄 뒤, 왼손에 감겨 있던 철사일살의 유품인 철편 사슬을 소리 없이 풀었다. 무감각한 돌 손가락이 사슬을 쥘 때마다 쇠사슬이 짤랑거리는 차가운 마찰음을 냈다.
“내가 보초들을 유인하겠다. 덕구 너는 내가 신호를 주면 창고 뒷문을 따고 들어가 흑철 정수를 찾아라. 아란, 너는 지하 배수로 틈새에서 자라나는 적혈초를 채취해야 한다.”
“하지만 천위 씨의 다리가…….”
“걱정 마라. 좁은 창고 내부라면 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도 놈들을 내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찢어발길 수 있다.”
천위의 목소리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아버님의 녹슨 망치를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으며 마음속의 살기를 얼음처럼 차갑게 다듬었다.
쉬이익!
천위가 돌 왼손으로 묵직한 돌덩이 하나를 멀리 성벽 너머로 던졌다.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자, 창고 앞을 지키던 두 명의 흑철교 하급 무사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
“뉘냐! 어떤 쥐새끼가 감히 분타의 금역을 서성이는 거냐!”
두 무사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경계하며 걸어 나간 틈을 타, 덕구는 날렵하게 기어가 창고 뒷문의 낡은 쇠사슬 자물쇠를 철사 고리로 툭 건드려 해제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창고의 문이 열렸고, 아란과 덕구는 천위를 부축해 신속하게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창고 내부는 오래된 먼지와 썩은 광물의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었으나, 천위의 돌 왼팔은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미세하게 붉은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갈라진 회색 피부 틈새로 흐르는 화석마공의 마기가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고밀도 흑철 정수의 자성과 반응한 것이다.
“저쪽이다.”
천위가 가리킨 어두운 선반 구석에 흙빛 단지가 놓여 있었다. 덕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단지의 뚜껑을 열자, 시커멓고 끈적한 액체 금속이 묵직한 광채를 뿜어냈다. 철사광석을 수백 번 제련하여 얻어낸 최고의 주조 재료, 흑철 정수였다.
동시에 아란은 지하 배수로로 이어지는 습한 석벽 바닥을 살폈다. 볕이 들지 않는 차가운 바위 틈새에서, 핏빛처럼 붉은 줄기를 뻗어 올린 기이한 약초들이 은은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적혈초예요! 찾았어요, 천위 씨.”
아란이 조심스럽게 은침통을 열어 적혈초의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약초를 캐내기 시작했다. 이 약초는 굳어가는 천위의 경맥에 혈류를 강제로 순환시켜 석화의 전이를 늦출 수 있는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한 순간이었다.
스스스슥.
어두운 창고 천장의 서까래 위에서, 뱀이 기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천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예리한 안광이 고양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비열하고 차가운 미소, 그리고 양손에 쥔 얇고 날카로운 단검 쌍도가 횃불의 잔광을 받아 번뜩였다.
흑철삼살의 둘째이자, 광산에서 도망치려던 수많은 노예들의 발목 힘줄을 소리 없이 끊어놓았던 살수, 철사이살(鐵二三殺)이었다.
“흐흐흐…… 전령매의 소식을 듣고 황토현 곳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설마 이 버려진 폐쇄 창고로 기어들어 올 줄이야. 뇌소룡 소분타주님과 내 막내동생을 죽인 돌괴물 놈이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철사이살이 서까래에서 소리 없이 낙하했다. 그의 신형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 지면에 닿을 때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속도 위주의 경신공(輕身功)을 극한으로 익힌 이류 중급의 강자였다.
“덕구, 아란! 물러서라!”
천위가 호령하며 대지에 다리를 단단히 고정하려 했으나, 굳어버린 양다리는 그의 의지대로 빠르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 찰나를 철사이살이 놓칠 리 없었다.
쉭!
철사이살의 신형이 어둠 속에서 잔영을 남기며 사라졌다. 잔영참(殘影斬)의 초식이었다. 보이지 않는 검로가 천위의 사방을 에워쌌고, 순식간에 예리한 칼날이 천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서걱!
“으윽!”
천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얇은 단검은 천련골경의 방어막을 교묘하게 비껴가며 근육의 틈새를 예리하게 찔렀다.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으나, 천위는 이빨을 악물며 오른손으로 철편 사슬을 휘둘렀다.
휘이이잉!
사슬 미늘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지만, 철사이살은 이미 가볍게 신형을 뒤로 꺾어 사슬의 궤적을 피해 간 상태였다. 놈은 천위의 느린 기동성을 비웃으며 어둠 속에서 조롱하듯 속삭였다.
“바보 같은 놈. 다리가 완전히 돌처럼 굳어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구나. 그런 굼뜬 몸으로 내 단검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놈의 발목 힘줄을 마저 끊어 진짜 석상으로 만들어 주마!”
철사이살이 다시 한번 공중으로 도약했다. 놈의 단검 끝에는 푸르스름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을 마비시키고 살점을 녹여버리는 가혹한 사독의 기운이었다.
천위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속도로는 저 날렵한 살수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살을 내주고 놈의 무기를 직접 묶는 수밖에 없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비장한 결사 전술이었다.
“와라.”
천위가 낮게 읊조리며, 가슴 안쪽의 철련 심법 내력을 왼팔의 돌 껍질로 폭발적으로 밀어 넣었다.
철사이살이 천위의 목덜미를 조여오며 단검 쌍도를 매섭게 내리꽂았다.
쉬이익! 탁!
그 순간, 천위는 피하는 대신 자신의 회색 돌 왼손을 뻗어 날아오는 단검 날을 정면에서 그대로 움켜쥐었다. 철편박쇄(鐵鞭縛鎖)의 초식이었다.
치이이익!
단검에 발려 있던 특수 산성 독약이 천위의 돌 손바닥에 닿자 하얀 연기와 함께 기괴한 냄새를 풍기며 끓어올랐다. 일반적인 살을 지닌 인간이었다면 손가락 뼈가 녹아내리는 극통에 비명을 질렀겠지만, 천위의 왼손은 이미 촉각과 고통을 영구히 상실한 차가운 바위였다.
“뭐, 뭐라고……!”
철사이살의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찢어졌다. 자신의 필살 단검이 회색 돌 손아귀에 잡혀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놈이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단검을 빼내려 했으나, 화석마공의 가공할 완력이 실린 돌 손가락은 무쇠 바이스처럼 단검 날을 꽉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쩌적! 쩌적!
천위의 돌 손바닥에 힘이 들어가자, 수십 번 제련된 한철 단검의 날이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잡았다.”
천위의 서늘한 음성이 어두운 창고를 울렸다.
“이, 이 괴물 놈! 놓아라!”
철사이살이 패닉에 질려 소매 속에서 미세한 기습용 독침인 무형사독침(無形沙毒針)을 소리 없이 튕겨 날렸다. 침이 허공을 갈라 천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으나, 천위는 이미 굳어버린 왼쪽 어깨를 들어 올려 날아오는 독침들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독침들이 돌 어깨에 부딪혀 무력하게 퉁겨 나갔다.
천위는 오른손으로 철사이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대장장이의 완력과 마공의 살기가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손아귀가 놈의 숨통을 조여왔다.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내 가문을 도멸한 너희 사파 놈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천위는 그대로 철사이살의 몸을 들어 올려 창고의 단단한 바위 바닥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팽개쳤.
콰아아앙!
지하 보관실 전체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철사이살의 척추가 바스러지는 처참한 소리가 창고 내부에 울려 퍼졌다. 놈은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핏물을 토해내며 즉사했다.
“형님!”
덕구가 단지를 품에 안은 채 다급히 달려와 천위를 부축했다. 아란 역시 적혈초를 가죽 주머니에 소중히 담아 천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은 찰나에 불과했다.
“으윽……! 컥……!”
천위가 갑자기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마기가 섞인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방금 전 철사이살의 단검을 막아내고 내력을 과도하게 폭발시킨 부작용이었다. 단전에서 역류한 화석마공의 탁한 마기가 그의 기경팔맥을 타고 왼쪽 상반신으로 급격히 솟구치기 시작했다.
“천위 씨! 안 돼요! 내력이 역류하고 있어요!”
아란이 경악하며 천위의 붕대를 풀어헤쳤다.
그곳에는 기괴하고도 절망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팔꿈치 아래에 머물러 있던 회색 돌의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덩굴처럼 기어올라 왼쪽 어깨와 쇄골, 그리고 가슴 전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고 있었다. 피부가 거칠게 갈라지며 하얀 돌 장갑처럼 부풀어 올랐고, 천위의 왼쪽 폐가 돌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호흡이 극도로 가빠졌다.
“하아…… 하아……!”
천위의 눈동자가 마성의 붉은 빛으로 충혈되며 이성을 잃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둔탁하고 육중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석화가 가슴 전면을 잠식하며 그의 목숨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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