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의 밤과 철기 노인
푸드득거리는 전령매가 밤하늘의 장막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순간, 천위의 눈동자에 깃든 절망과 복수의 불꽃이 다시 한번 대나무 숲의 어둠을 붉게 태웠다.
날아가는 전령매를 요격할 힘은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아란의 빙심결(氷심訣)은 천위의 석화를 억제하느라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덕구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범인에 불과했다. 석천위 역시 하반신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겁게 굳어 있어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웠다.
“형님,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전령매가 날아갔으니 철사분타의 추격대가 한 시진도 안 되어 이곳을 포위할 것입니다.”
덕구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하며 천위의 오른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아란 역시 반대편에서 천위의 몸을 부축했다. 천위의 가슴과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열상에서 다시금 끈적한 선혈이 배어 나와 삼베 적삼을 붉게 적셨다. 쇠사슬처럼 단단하게 뼈를 엮어 고정하는 천련골경(鐵鍊骨勁)의 힘으로 출혈을 억제하고 있었으나, 육체의 한계는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가자. 산으로 올라간다.”
천위가 쇳소리 섞인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 사람은 어둠을 틈타 황토현 뒤편에 솟아 있는 험준한 바위산으로 향했다. 다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아 천위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고, 덕구와 아란의 이마에는 비 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밤바람이 칼날처럼 살을 에었지만, 세 사람의 등 뒤로 타오르는 생존의 집념은 그 어떤 한기보다 뜨거웠다.
바위산 중턱, 넝쿨과 잡목으로 빽빽하게 가려진 절벽 틈새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외부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천연의 은신처, 바로 은거의 동굴(隱居의 洞窟)이었다.
쿵.
동굴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천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무기를 내려다보았다. 광산 노예 시절부터 손때가 묻은 녹슨 철곡괭이. 철삼삼살의 묵직한 강철 도끼를 왼팔로 막아내며 가해진 충격 탓에, 곡괭이의 낡은 나무 자루는 반쯤 갈라져 있었고 무뎌진 철제 날 끝은 흉하게 휘어 있었다.
‘이 무기로는 다음 전투를 버텨낼 수 없다.’
천위는 회색 돌로 변해버린 자신의 왼팔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팔꿈치 아래로는 아무런 고통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바위의 질감뿐이었다. 이 기괴한 왼팔의 무시무시한 무게와 파괴력을 버텨내려면, 일반적인 병기로는 어림도 없었다. 휘두르는 순간 무기가 먼저 비명을 지르며 바스러질 것이 뻔했다.
“상처가 벌어졌어요. 가만히 계세요.”
아란이 다급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철 은침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천위의 굳어버린 다리와 가슴의 요혈에 침을 놓아 기혈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은침이 살을 뚫고 들어올 때마다 천위는 미세하게 신음했으나, 왼팔만큼은 그 어떤 자극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천위는 동굴 입구 너머, 어둠 속에 잠긴 황토현(黃土縣) 성읍을 내려다보았다. 성문 주변에는 이미 횃불을 든 흑철교 무사들과 관청의 포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성벽 기둥에는 그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령 초상화가 붙어 있을 터였다. 도시 전체가 그를 옥죄는 거대한 덫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황토현 내부로 들어가야겠다.”
천위의 서늘한 선언에 아란이 침을 놓던 손을 멈추고 경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쳤어요? 지금 성문마다 수색이 삼엄해요. 그 몸으로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려요!”
“무기가 파손됐다. 이대로는 추격대가 들이닥쳤을 때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황토현의 북부 대장간 거리(北部 大匠間 街)에 아버님의 옛 동업자가 계신다. 그분을 만나야만 한다.”
천위는 품속을 더듬어 묵직한 쇳덩어리를 꺼냈다. 부친 석철심이 평생 쇠를 두드릴 때 사용했던 석철심의 녹슨 망치(石鐵心의 綠錘)였다. 망치의 자루에는 석씨 가문의 문양이 희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철기 노인(鐵器 老人)…… 그분이라면 내 무기를 다시 rèn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란은 천위의 단호한 눈빛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은침을 거두었다.
“좋아요. 하지만 혼자서는 한 걸음도 못 가요. 저와 덕구가 같이 가겠어요.”
깊은 밤, 세 사람은 황토현 성읍의 삼엄한 경비망을 피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마비된 천위를 위해 덕구와 아란이 양옆에서 단단히 부축했고, 천위는 가문의 철련 심법(鐵鍊心法)을 운용해 체중의 하중을 최소화하며 그림자처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황토현 성문에는 예상대로 석천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흑철교의 하급 무사들과 관청의 포졸들이 지나가는 마차와 행인들을 샅샅이 검문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이쪽입니다. 대장간 거리로 통하는 은밀한 수로가 있습니다.”
덕구가 앞장섰다. 광산 주변의 지리를 꿰뚫고 있는 덕구의 인도에 따라, 그들은 성벽 아래 오물이 흘러나오는 어둡고 습한 하수구를 통해 성내로 잠입했다. 하수구의 악취와 차가운 물이 천위의 다리를 적셨지만, 돌로 변한 하반신은 차가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직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만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하수구를 빠져나오자, 매캐한 석탄 타는 냄새와 쇳가루 섞인 매연이 사방을 뒤덮은 북부 대장간 거리가 나타났다. 사방의 화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불빛과 쇠를 두드리는 둔탁한 망치 소리가 밤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간 거리 역시 안전하지 않았다. 골목길 모퉁이마다 흑철교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끄나풀 대장장이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바스락.
천위 일행이 좁은 골목을 지날 때, 한 대장간의 인부가 횃불을 들고 어둠 속을 향해 걸어왔다. 흑철교의 표식이 새겨진 가죽 앞치마를 두른 사내였다.
천위는 급히 아란과 덕구를 벽면에 밀착시키고 기척을 완전히 감추었다. 숨소리마저 극도로 낮추는 기만책이었다. 사내의 횃불이 그들이 서 있는 골목 입구를 비추었으나, 자욱한 매연과 어둠 덕분에 천위 일행의 실루엣은 그림자 속에 완벽히 녹아들었다. 사내가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린 후에야 그들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대장간 거리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낡은 작업장 앞에 도달했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대장간 내부에서는 희미한 화덕의 붉은 불빛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위는 소리 없이 문을 밀고 안마당으로 침투했다.
화덕 앞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불꽃처럼 붉은 수염을 기르고 한쪽 다리를 저는 노인, 바로 북부 최고의 대장장이이자 황토현 장인조합(黃土縣 匠人組合)의 조합장인 철기 노인이었다. 노인은 낡은 화덕 앞에서 홀로 독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서늘한 인기척을 느낀 철기 노인이 순식간에 눈빛을 번뜩였다. 노인은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용광로 옆에 놓여 있던 백 근 무게의 거대한 주조용 망치를 거머쥐었다. 일류(一流) 하급의 내력이 망치 끝에 묵직하게 실리며 공기를 짓눌렀.
“뉘라시기에 이 야삼경에 늙은이의 마당에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왔느냐?”
노인의 거친 호령이 마당을 울렸다.
천위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뻗어 품속에 지니고 있던 석철심의 녹슨 망치를 노인의 발치 앞으로 굴려 보냈다. 투박한 쇳덩어리가 먼지 쌓인 바닥을 구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철기 노인은 발밑에 떨어진 망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망치 자루에 새겨진 석씨 가문의 문양을 확인하는 순간, 노인의 전신이 굳어버렸다. 노인의 손에 쥐여 있던 거대한 주조 망치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 이 망치는…….”
노인은 기어가듯 망치를 집어 들었다. 거친 손가락으로 가문의 문양을 어루만지는 노인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눈물 한 방울이 뜨거운 망치 머리 위로 떨어져 치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철심이…… 내 아우 철심이의 망치구나. 네놈이…… 네놈이 어떻게 이 망치를 가지고 있느냐?”
“제가 석철심의 아들, 석천위입니다.”
천위가 나직하게 답했다.
철기 노인은 고개를 들어 천위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넝마가 된 몰골, 그리고 회색 삼베 붕대로 감싸여 있지만 바위처럼 거대하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왼팔을 보며 노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노인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다가와 천위의 어깨를 꽉 쥐었다.
“살아 있었구나…… 철심이의 핏줄이 살아 있었어!”
노인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렸다. 그는 천위를 안방 지하의 비밀 지련실로 인도했다. 지련실 내부는 지상의 열기보다 훨씬 뜨거웠으며, 사방에 온갖 신병이기의 재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철기 노인은 천위에게 과거의 숨겨진 진실, 철기 노인의 옛 서약(鐵器 老人의 옛 誓約)을 들려주었다.
“과거 대장간에 거대한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 부친 철심이가 목숨을 걸고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 나를 구해냈다. 그 화재로 나는 다리를 잃었지만 목숨을 건졌지. 그때 나는 철심이에게 약속했다. 네 가문이 위험에 처하거나, 네 후손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필요로 할 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고의 병기를 rèn해 주겠노라고…….”
노인은 천위의 왼팔을 감싼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하얗게 갈라진 회색 돌 피부와 그 사이로 흐르는 서늘한 마기를 보며 노인은 탄식을 내뱉었다.
“화석마공(化石魔功)…… 복수를 위해 금단의 길을 걸었구나. 이 돌 팔의 하중과 가공할 완력을 견디려면, 웬만한 강철로는 휘두르는 순간 박살이 날 터다.”
노인은 천위의 부러진 철곡괭이를 받아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약속을 지키마. 네 돌 왼팔의 하중을 완벽히 견디고, 적들의 철갑과 방패를 종이처럼 찢어발길 특제 강철 곡괭이(鋼鐵 曲괭이)를 만들어 주겠다. 하지만……”
노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무기를 완성하려면 흑철교의 철사분타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된 희귀한 흑철 정수(黑鐵 精髓)와, 네 석화를 억제할 적혈초(赤血草)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들을 구해올 수 있겠느냐?”
천위는 돌로 변한 왼손을 꽉 쥐었다. 촉각은 없었으나, 복수를 향한 뜨거운 의지만큼은 뼛속 깊이 요동치고 있었다.
“구해오겠습니다.”
새로운 무기의 탄생을 향한 비장한 약속이 뜨거운 지련실의 열기 속에서 굳건하게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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