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독된 의심
셋째 날, 오전 5시 45분. 성북동 사저 2층, 백이준의 전용 침실.
어스름한 새벽빛이 두꺼운 실크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침대 위를 희미하게 밝혔다. 머리맡에 늘어선 정밀 의료 장비들의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박자를 맞추는 방 안에서, 설유진은 서서히 눈을 떴다.
온몸의 뼈마디가 잘게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오한과 통증이 전신을 짓눌렀다. 맹독 ‘밤의 장막’이 체내에서 분해되며 남긴 지독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 어떤 순간보다 차갑고 명징하게 깨어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렸다. 침대 바로 옆,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백이준.
그는 유진이 독배를 마시고 쓰러진 이후,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듯했다. 단정하던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었고, 굳게 다물린 입술 주변에는 피로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평생 타인의 고통을 비웃으며 공포 위에 군림하던 골든 크라운의 절대자가, 지금은 영락없이 소중한 생명줄을 빼앗기기 직전의 절박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창백한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이 그의 거친 뺨에 닿았다. 차가운 얼음 같은 그녀의 체온이 이준의 뜨거운 피부에 닿는 순간, 그가 들이마시는 숨결이 크게 흔들렸다.
“……눈을 떴군.”
이준의 목소리는 밤새 쇠를 긁은 것처럼 낮고 쩍 갈라져 있었다. 그는 유진의 차가운 손을 움켜쥐었다. 으스러뜨릴 듯 강한 악력이었지만, 그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살아났어. 내 눈앞에서, 진짜로.”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유진은 억지로 목구멍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안색은 대리석처럼 투명하고 창백해져 있었지만, 오직 입술만은 붉은 피를 머금은 듯 기이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5단계 특이 면역 항체 체질이 각성하여 독소를 완벽하게 해독했음을 보여주는 신체적 징후였다.
“내 허락 없이는…… 당신도, 나도 죽지 못한다고.”
이준은 유진의 오만한 대답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지독할 정도로 강박적인 소유욕과, 그녀라는 존재에 완전히 압도당한 구원자의 맹목적인 안도감이었다.
그때, 침실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주치의 홍진호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유진을 즉사시킬 뻔했던 강심제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보, 보스…… 환자가 깨어났으니 당장 정밀 검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제 처방이 맞았던 게 분명…….”
“닥쳐라, 홍진호.”
이준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의 음성에는 뼈를 얼리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네 무능한 주사기가 저 여자의 목숨을 끊을 뻔했다. 내 사저에서 현대 의학의 권위를 내세우며 오만을 떨던 대가는 가볍지 않을 거다.”
“보스! 저는 표준 프로토콜에 따라……!”
“도현.”
이준의 나지막한 부름에, 문가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행동대장 한도현이 즉각 한 걸음 앞으로 나섰.
“홍진호를 사저 주치의 직위에서 해임한다. 당장 이 방에서 끌어내고, 다시는 내 눈앞에, 그리고 설유진의 눈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라. 만약 한 번만 더 내 구역에 발을 들인다면, 그 무능한 손가락들을 전부 부러뜨려 지하실에 처박아버리겠다.”
“예, 보스.”
도현이 냉혹하게 홍진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홍진호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은하 간호사는 숨을 죽인 채 유진의 눈빛을 살폈다. 유진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은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은하는 주머니 속에 숨겨진 바이탈 기록 USB를 꽉 쥐며, 유진의 비밀 동맹으로서 사저 의료동의 실권을 장악할 준비를 마쳤다.
방 안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을 때, 이준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유진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유진의 목덜미에 남은 시퍼런 손자국 피멍 자국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칼날 같은 예리한 상처와 피멍 위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닿을 때마다 유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이 사저의 2층 전체는 온전히 네 구역이다.”
이준이 선포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타협을 불허하는 독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 침실과 개인 실험실을 이곳에 완벽하게 리모델링해 주지. 경비대원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된다. 넌 이곳에서 오직 나만을 위한 해독제를 조제하면 돼.”
“그 대가로, 약속했던 것을 주셔야 할 텐데요.”
유진이 창백한 입술을 열어 차갑게 대꾸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반지가 새벽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위치는 구속당했을지언정, 권력의 균형은 이미 그녀의 손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준은 품속에서 묵직한 백금 합금 카드키를 꺼냈다. 사저 지하 2층의 비밀 온실과 희귀 약초 군락지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보안 장치, ‘지하 온실 마스터키’였다.
이준은 마스터키를 유진의 창백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키를 쥐여준 뒤,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왼손 약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차갑고 퇴폐적인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 유진의 심장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이것이 네가 목숨을 걸고 쟁취한 권력이다, 설유진.”
이준이 그녀의 손등에 코끝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너는 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유일한 열쇠를 가졌다. 그러니 절대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라. 만약 네가 사라진다면, 난 이 저택과 함께 미쳐버릴 테니까.”
그것은 보스의 명령이 아닌, 완벽하게 오염된 중독자의 애절한 간청이자 맹세였다. 유진은 그의 머리칼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정밀한 계산을 시작했다.
6단계 약리학적 절대 지배자 (Overlord).
그녀는 마침내 사저 내부의 실세로 거듭났다. 이준이 자신에게 완벽히 신체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오렐리아 안개 향료 조제 공식’의 전권이 그녀에게 넘어온 것이다. 유진은 이제 이 권력을 이용해 동생 민우를 구출할 구체적인 동선을 짜야 했다.
***
몇 시간 후, 유진은 새로 획득한 지하 온실 마스터키를 손에 쥐고 지하 2층 온실의 무거운 철갑 보안문 앞에 섰다. 무장 경비대원들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깍듯이 경례를 올렸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질 약사로 취급하던 그들의 태도가 완벽하게 달라져 있었다.
삐익—.
마스터키를 접촉하고 지문을 스캔하자, 육중한 철문이 부드러운 기계음과 함께 열렸다. 푸른 인공 조명 아래 기괴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희귀 독초들이 유진을 맞이했다.
유진은 조수 강태오에게 온실 입구의 시약 정리를 지시한 뒤, 홀로 온실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공 폭포의 거센 물소리가 온실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진의 초감각적 독소 후각이 작동했다. 공기 중의 습도와 미세한 화학 성분을 읽어내던 그녀의 코끝에, 폭포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흙먼지와 바람 냄새가 잡혔다. 단순한 인공 온실의 냄새가 아니었다. 외부와 연결된 자연의 냄새였다.
유진은 물보라를 헤치고 인공 폭포 뒤편의 어두운 바위 벽면으로 다가갔다. 축축하게 젖은 이끼를 손으로 쓸어내리던 순간, 그녀의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닿았다.
바위 틈새에 교묘하게 숨겨진 수동 톱니바퀴 개폐 장치.
유진은 마스터키의 끝부분을 장치의 홈에 맞춰 밀어 넣고 힘껏 돌렸다.
쿠구구구—.
폭포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거대한 바위 격벽이 소리 없이 옆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푸른빛의 안개가 서서히 흘러나왔다.
유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곳은 사저 내부의 그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던, 전설적인 약초 ‘오렐리아의 숨결 군락지’가 봉인되어 있는 비밀의 심장부였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