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을 넘는 항체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은색 노이즈로 격렬하게 점멸했다. 위장관을 타고 흘러내린 ‘밤의 장막’은 액체 불덩어리가 되어 설유진의 장기를 가차 없이 태워갔다. 입술 끝으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 한 방울이 창백한 턱선을 타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지가 마비되며 무릎의 힘이 풀리는 그 짧은 찰나, 유진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백이준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것은 철저한 무력과 오만으로 무장하고 있던 포식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거대한 해일 앞의 모래성처럼, 그의 칼날 같은 의심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충격의 잔해였다. 유진이 진짜 아수라의 밀정이었다면 결코 마시지 않았을 독배.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던져 보임으로써,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불신이라는 견고한 울타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설유진……!”
바닥의 차가운 콘크리트 격벽에 유진의 몸이 닿기 직전, 거칠고 단단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이준의 억센 악력이 유진의 가녀린 몸을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맨손이 유진의 뺨을 감싸 쥐었을 때, 유진은 전해지는 그의 손끝이 미치도록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평생 온갖 독에 내성을 지닌 채 타인의 고통을 비웃던 괴물이, 처음으로 타인의 죽음 앞에서 극단적인 공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진짜로 마신 거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준의 목소리가 붉은 방의 음산한 공기 속에서 사정없이 흔들렸다. 붉은 조명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포커페이스 독성 제어력이 그녀의 뇌를 강제로 지배하고 있었다. 내면에서는 신경망이 타들어 가고 장기가 난도질당하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포식자의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의 눈빛을 잃지 않았다.
‘기억해, 백이준. 이제 네 목숨은 온전히 내 거야.’
유진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순간, 이준은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치며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 지하 3층의 무거운 철문이 부서질 듯 열렸고, 묵직한 구두굽 소리가 복도를 사정없이 울렸다. 이준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계단을 뛰어 올라가 성북동 사저 2층의 자신의 전용 침실로 향했다.
***
사저 2층 침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유진의 몸이 침대 위로 눕혀졌다. 이준의 침실은 고풍스러운 양옥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이준의 바이탈을 모니터링하는 정밀 장비들이 늘어서 있어 흡사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을 연상케 했다.
“의료동! 당장 홍진호와 정은하를 불러와! 1분 내로 오지 않으면 이 사저의 모든 의료진을 지하실에 처박아버리겠다!”
이준의 폭포 같은 노호성이 사저 내부 인터폰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의 최측근이자 행동대장인 한도현이 문을 열고 들이닥쳤을 때 보인 것은, 침대 머리맡에 주저앉아 유진의 창백한 손을 움켜쥐고 있는 이준의 폭주하는 모습이었다. 도현 역시 유진이 독배를 마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 동공을 크게 흔들었다.
잠시 후, 주치의 홍진호가 허겁지겁 청진기와 응급 키트를 들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단정한 간호사복을 입은 정은하가 침착하지만 다급한 걸음으로 따랐다.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발작이 다시 시작된…….”
“내가 아니라 이 여자다.”
이준이 비켜서며 침대를 가리켰다. 유진의 안색은 이미 대리석처럼 투명하고 창백해져 있었고, 오직 입술만이 붉은 피를 머금은 듯 기이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안색의 투명화 및 입술 상기(Translucent Pallor). 체내의 특이 면역 항체가 맹독 ‘밤의 장막’의 탄소 고리 구조와 치열하게 격돌하며 혈류를 내부 장기로 집중시키고 있다는 신체적 징후였다.
홍진호가 신속하게 유진의 맥박을 짚고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 그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휴대용 모니터에 연결된 유진의 심박수는 이미 분당 40회 이하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고, 자율신경계 붕괴로 인한 부정맥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 이건…… ‘밤의 장막’ 아닙니까? 보스, 대체 이 약사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살려라.”
이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거절하는 순간 즉각적인 파멸을 가져올 괴물의 최후통첩이었다.
“이 여자가 죽으면, 너 역시 이 방을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홍진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강심제 아트로핀 아ンプル을 꺼내려 했다.
“밤의 장막은 신경 세포의 수용체를 영구 마비시키는 변이 독소입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완벽한 해독제가 없습니다! 당장 강심제를 투여하고 위 세척을 시도해야…….”
“안 돼.”
그 순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유진의 입술 사이로 아주 미세하고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유진은 눈을 뜨지 못한 채, 자신의 선천적 독성 저항력으로 뇌의 의식 제어 중추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완벽히 계산하고 있었다. 밤의 장막 독소는 강심제와 결합할 경우, 오히려 심근 세포의 괴사를 급격히 촉진하는 역반응을 일으킨다. 홍진호의 무능한 처방은 그녀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즉사시키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홍진호는 유진의 경고를 무시한 채 주사기를 치켜들었다.
“의식도 불분명한 대체의학 약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주사해야 합니다!”
철컥.
서늘한 금속음이 침실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렸다. 홍진호의 이마 바로 앞에, 흑철로 제련된 이준의 권총 구경이 정밀하게 조준되어 있었다. 이준의 눈빛은 이미 피비린내 나는 살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 손가락 하나라도 더 움직이면,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 홍진호.”
“보, 보스……!”
“저 여자의 말이 법이다. 저 여자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이준은 홍진호의 오만한 표준 처방을 불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전신 마비 발작을 단숨에 잠재웠던 유진의 신비로운 조제술을 직접 목격했던 그였기에, 이 순간 유진의 희미한 경고가 현대 의학의 권위보다 훨씬 더 절대적임을 본능적으로 확신한 것이다.
이준이 홍진호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는 사이, 침대 옆에서 바이탈을 체크하던 정은하 간호사의 눈빛이 영민하게 빛났다. 정은하는 과거 이준의 주치의 홍진호의 보수적이고 오만한 처방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유진이 보여준 기적적인 향료의 효능을 비밀리에 동경하고 있었다.
은하는 유진의 창백하게 떨리는 왼손 손가락이,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백가운 왼쪽 안감 비밀 주머니를 향해 아주 미세하게 긁듯이 움직이는 것을 포착했다.
‘주머니 안에…… 무언가 있어.’
은하는 유진의 의도를 즉각 알아차렸다. 유진은 사지가 결박당해 붉은 방에 갇히기 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옷 안감 깊숙이 ‘피닉스 응급 해독 주사기’를 숨겨두었다. 자신의 특이 면역 혈청과 아드레날린을 정밀 배합해 만든 자가 소생용 비장의 카드. 하지만 지금 유진은 독성 흡수로 인한 극심한 오한과 신경 마비 쇼크로 인해 스스로 가운 주머니를 열어 주사기를 꺼낼 물리적인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은하는 이준의 시선이 홍진호에게 쏠려 있는 이 순간이 유일한 기회임을 직감했다.
“보스, 환자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고 있습니다! 기도를 확보하고 흉부 압박을 준비해야 하니 주치의 선생님은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은하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여 홍진호와 이준의 시야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그녀의 넓은 간호사 가운과 트레이가 침대 위의 유진을 완벽하게 엄폐하는 장벽이 되었다.
“무슨 소리야! 간호사 주제에 감히 내 처방을 가로막고……!”
홍진호가 분노하며 은하를 밀치려 했지만, 한도현이 묵직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눌러 고정시켰다. 도현 역시 은하의 미묘한 움직임에서 무언가 계획이 있음을 직감하고 묵묵히 조력한 것이었다.
시야가 차단된 단 5초의 틈.
유진은 필사적으로 마지막 정신력을 가동했다. 5단계 특이 면역 항체 체질이 혈관 속에서 밤의 장막 독소 분자를 황금빛 면역 세포로 감싸 안으며 붕괴 속도를 늦추는 동안, 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을 가운 안감 비밀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손끝에 차갑고 묵직한 유리 실린더의 감각이 닿았다.
‘피닉스…….’
유진은 이빨을 악물며 주사기를 꺼냈다. 그리고 정은하가 흉부 압박을 하는 시늉을 하며 유진의 하반신 이불을 들쳐 올린 찰나, 유진은 자신의 왼쪽 대퇴부 외측 광근에 주사 바늘을 망설임 없이 깊숙이 내리꽂았다.
푹!
가운의 천을 뚫고 들어간 3인치 은침 바늘이 근육 깊숙이 박혔고, 플런저가 끝까지 밀려 내려갔다. 고농도의 자가 면역 혈청과 급속 강심 성분이 대동맥을 타고 전신으로 무섭게 분사되었다.
“으윽……!”
유진의 몸이 침대 위에서 활처럼 크게 꺾이며 튀어 올랐다. 심장에 직접 작용하는 강력한 약물이 체내에 주입되자, 멈춰가던 심근 세포들이 미친 듯이 수축하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닉스의 해독 성분이 밤의 장막 독소 고리를 정밀하게 타격해 해체해 갔다. 극심한 근육통과 함께 체온이 40도까지 급격히 치솟는 고열의 후유증이 전신을 덮쳤다.
“설유진!”
이준이 은하를 밀치고 유진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유진의 피부는 마치 속이 비치는 투명한 대리석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목덜미에는 이준이 졸랐던 선명한 시퍼런 손자국 피멍 흔적이 기괴할 정도로 붉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반지는 그녀의 급격한 바이탈 변화를 감지하고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유진은 헐떡이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입술 끝에 묻어 있던 검붉은 피가 이준의 하얀 셔츠 소매 위로 번져나갔다.
“살아…… 날 겁니다.”
유진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이준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내 허락 없이는, 당신도 나도 죽지 못한다고.”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은 다시 한번 깊은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모니터의 심박수는 더 이상 떨어지지 않고, 분당 70회의 안정적인 궤도를 그리며 규칙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적적인 바이탈의 소생이었다.
홍진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밤의 장막’을 마시고 자가 소생을 했다고? 대체 이 여자의 몸속에 무슨 항체가 흐르고 있는 거지?”
이준은 홍진호를 차갑게 무시한 채, 유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그의 눈빛에 서린 살기는 어느새 가라앉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지독할 정도로 강박적인 소유욕과 집착이었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자신을 향한 의심의 임계점을 완벽하게 깨부수고, 스스로 그의 유일한 해독제이자 영원한 지배자가 될 자격을 입증하며 사선을 넘어 돌아온 것이다.
이준은 유진의 창백하고 차가운 손을 다시 한번 움켜쥐며, 그녀의 붉게 상기된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밤의 장막이라는 맹독보다 더 치명적인 유진이라는 존재에, 그는 이미 완벽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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