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의 독배
지하 3층 붉은 방의 공기는 성북동 사저 그 어느 곳보다도 무겁고 축축했다. 사방을 물들인 붉은색 조명은 마치 응고되지 않은 피처럼 벽면의 콘크리트 격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허공에 매달린 녹슨 쇠사슬들이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반응해 기분 나쁜 금속음을 내며 부딪쳤다.
설유진은 방 중앙에 놓인 차가운 강철 의자에 결박된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백이준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두꺼운 플라스틱 zip-tie가 가녀린 손목을 파고들어 이미 붉은 피멍이 새롭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고 단단하게 빛났다.
이준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갈색 약병을 천천히 쥐었다. 아수라 신디케이트에서 유출된 즉사성 지효성 맹독, ‘밤의 장막(Curtain of Night)’이었다. 무색무취의 액체지만, 그 파괴력은 단 한 방울로도 성인 남성의 자율신경계를 즉각 마비시켜 3분 내에 심장을 멈추게 만들 수 있는 치명적인 독극물이었다.
“내 목숨줄을 쥐고 아수라와 거래를 하려 했다면, 그 대가 역시 네 목숨으로 치러야겠지.”
이준의 서늘한 음성이 붉은 방의 격벽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충혈된 안구에는 핏발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최이사가 조작해 보낸 이중 스파이 메일이 그의 이성을 완벽하게 난도질해 놓은 상태였다. 평소라면 차분히 정황을 따졌을 그였지만, 발작 주기가 임박해 정수리를 짓누르는 극심한 두통과 마비 증세는 그의 의심을 광기 어린 폭력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유진은 성북동 사저 생존 수칙 제1조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각인했다.
‘백이준과 독대할 때는 절대 눈빛을 흐리거나 피하지 말 것. 그의 광기 어린 의심에는 감정이 아닌 철저한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조작된 메일 한 통에 이성을 잃고 흔들리는 포식자라니. 골든 크라운의 보스가 고작 이 정도 수준이었습니까?”
유진의 차가운 도발에 이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진 맨손으로 유진의 턱끝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턱뼈가 부러질 듯한 강한 악력이 가해졌지만, 유진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입만 살아있는 약사군. 네가 아수라의 밀정이 아니라면, 이 잔을 비우고 결백을 증명해 봐라.”
이준이 다른 한 손으로 철제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한 크리스탈 잔에 밤의 장막 독액을 따랐. 쪼르륵, 소리 없이 채워지는 투명한 액체. 무색무취라고 알려진 독이었지만, 유진의 초감각적 독소 후각은 공기 중으로 미세하게 퍼지는 특유의 비릿한 석탄산 계열의 냄새를 잡아냈다.
‘밤의 장막.’
유진의 머릿속에서 분자 고리가 정밀하게 조립되기 시작했다. 가문의 비전 의서 사본과 현대 생화학 공식을 결합한 기억이 빠르게 회전했다. 탄소 고리 구조의 신경독. 이를 중화하기 위해서는 강원도산 야생 백합 추출물과 정제된 탄산칼슘의 배합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에는 아무런 약재도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유진은 결박된 팔을 의자 모서리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그리고 겨드랑이 밑과 대퇴부의 대동맥 부위를 정밀하게 압박하는 동맥 혈류 제어술을 조용히 가동했다. 인위적으로 혈류의 흐름을 늦추어, 독소가 심장과 뇌로 전달되는 물리적인 시간을 강제로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마시지 못하겠나? 역시 아수라가 보낸 쥐새끼가 맞았군.”
이준이 비웃으며 흑철 단도를 유진의 목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칼날이 하얀 살결을 파고들어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Confess. 누구의 사주를 받고 내 치료제에 손을 댔지?”
“내가 마신다면.”
유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이준의 말을 끊었다.
“내가 이 독을 마시고도 살아서 네 눈앞에 서 있는다면, 그때는 나를 어떻게 대할 겁니까, 백이준 씨?”
이준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크게 흔들렸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도망칠 곳 없는 외통수에서 오히려 포식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지독한 전의가 서린 눈동자였다.
“살아남는다면…….”
이준이 유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밀착시키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내 심장이라도 뜯어 네 발밑에 바치지. 하지만 그전에 네 위장부터 녹아내릴 거다.”
이준은 단도로 유진의 오른손을 묶고 있던 플라스틱 zip-tie를 단숨에 그어 끊어버렸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오른손이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사슬은 그녀의 몸을 의자에 단단히 묶고 있었다. 이준이 투명한 독배를 유진의 오른손에 쥐여주었다.
유진은 잔을 들어 올렸다. 잔을 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것은 공포가 아닌 동맥 제어로 인한 일시적인 마비 현상일 뿐이었다. 그녀는 가슴 안감 깊숙이 숨겨진 피닉스 응급 해독 주사기의 묵직한 감각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준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것은 의심의 임계점을 돌파하기 위한 목숨 건 도박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품은 칼날 같은 경계심을, 자신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강박적인 중독과 소유욕으로 뒤바꿔놓을 유일한 기회.
“기억하십시오, 백이준 씨. 이 독배를 비운 순간부터, 당신의 목숨은 온전히 내 것입니다.”
유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단숨에 독배를 비웠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유진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무색무취의 장막 뒤에 숨겨져 있던 맹독이 식도와 위장관의 세포막을 사정없이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마치 액체 불덩어리를 삼킨 듯한 화학적 화상의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아…… 윽…….”
유진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이빨을 꽉 깨물었다. 포커페이스 독성 제어력이 극도로 가동되었다. 내면에서는 신경망이 타들어 가고 장기가 난도질당하는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준을 바라보며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신체의 물리적 붕괴는 이성만으로 막을 수 없었다. 자율신경계가 마비되면서 유진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급정지하기 시작했다. 호흡기가 조여들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은색 노이즈로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툭.
유진의 붉게 상기된 입술 끝으로, 검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창백한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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