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밀고
철문이 열리며, 이준의 묵직한 그림자가 실험실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백가운 안쪽 주머니에 숨겨진 오동나무 상자의 묵직한 부피감이 유진의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 안에는 방금 전 그녀가 정밀 분석을 마친 가짜 손가락과 박만수의 협박 편지가 들어 있었다. 들키는 순간, 이중 스파이로 몰려 즉각 처단당할 수 있는 치명적인 물증. 유진은 가운 자락을 가볍게 움켜쥐며 턱을 치켜올렸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퍼런 손자국 피멍 자국이 미세하게 욱신거렸으나,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단 일밀리미터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준의 어두운 눈동자가 유진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의 가죽 장갑 낀 손끝이 단도의 자루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임서준을 가차 없이 숙청한 직후의 피비린내가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준이 입을 열어 그녀의 숨통을 조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잉—!
사저 전체를 찢어발기는 듯한 적색 경보음이 지하 연구실의 차가운 공기를 강타했다. 천장에 설치된 적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며 붉은 빛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무슨 일이지?”
이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뇌척수 신경 마비 증세를 자극하듯, 경보음의 진동이 그의 목덜미 핏줄을 미세하게 부풀렸다.
[보스! 비상 상황입니다!]
이준의 손목에 채워진 무전기에서 보안팀장 이진우의 절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사저 외부 방화벽이 해킹당했습니다. 아수라의 IP로 추정되는 발신지에서 보스의 개인 단말기와 사저 메인 서버로 극비 메일이 투하되었습니다. 내용이…… 설유진 약사에 관한 것입니다!]
유진의 이성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최이사. 임서준의 배후이자 골든 크라운의 지배권을 노리는 그 늙은 여우가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박만수의 가짜 손가락 협박에 이어, 사저 보안망에 직접 조작된 스파이 메일을 투하해 자신을 이준의 손으로 직접 숙청하게 만들려는 정교한 덫이었다.
“메일 내용을 즉시 전송해.”
이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방 안의 산소를 전부 얼려버릴 것 같았다. 그의 태블릿 화면에 조작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수신되었다. 유진이 아수라의 보스 한태성의 하부 조직원인 박만수와 내통하며, 이준의 치료제에 지효성 독을 섞겠다는 은밀한 약속이 적힌 위조 계약서와 통화 로그였다.
이준의 시선이 천천히 태블릿에서 유진의 얼굴로 옮겨갔다. 그 충혈된 눈동자 속에 서린 의심은 방금 전 임서준을 죽일 때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맹렬했다.
‘지금이다.’
빨간 경보등이 점멸하며 사저 내부가 혼란에 빠진 찰나의 몇 초. 유진은 이준의 시선이 잠시 태블릿으로 향했던 그 찰나의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연구실 구석에 위치한 화학 폐기물 배출구 앞으로 향했다. 황산과 질산이 섞인 강산성 폐액이 상시 흐르는 고온 소각 슬라이드 슈트였다.
서랍을 여는 척하며, 유진은 가운 안쪽 주머니에서 오동나무 상자를 꺼내 슈트의 투입구 안으로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
치이익—!
강산성 액체에 실리콘 폴리머와 인공 혈액, 그리고 박만수의 협박 편지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는 미세한 소리가 요란한 경보음 묻혀 사라졌다. 유진은 태연하게 투입구 문을 닫고 다시 이준의 앞에 섰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자 이중 스파이의 직접적인 물증이 완벽하게 인멸되는 순간이었다.
쿵!
지하 연구실의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슈트를 입은 이 경호원과 무장 경비대원들이 총기를 손에 쥔 채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글라스 너머 눈빛은 유진을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 적대적이었다.
“보스,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 경호원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준은 태블릿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강화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묶어라.”
그 한마디에 이 경호원과 대원들이 유진을 거칠게 포박하기 시작했다. 두꺼운 플라스틱 zip-tie가 유진의 가녀린 손목을 자비 없이 조여왔다. 억센 악력이 가해지자, 손가락 끝의 동상 상처와 손목의 핏줄이 비명을 질렀다. 살이 씹히며 붉은 피멍이 새롭게 자리 잡았지만, 유진은 신음 한 자락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빛났다.
“안 됩니다! 보스! 설 약사님은 결백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오염된 시약을 밝혀내고 보스를 살리신 분입니다!”
실험실 구석에서 초자 기구를 정리하던 조수 강태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려 소리쳤다.
“태오 씨, 가만히 있어요.”
유진의 차가운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오는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보안팀장 이진우가 태오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누르며 바닥에 메쳐버렸다.
“윽!”
“이 녀석도 공모자일 가능성이 있다. 독실에 격리 감금해라.”
이진우의 냉혹한 지시에 태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질질 끌려 나갔다. 유진은 멀어지는 태오를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신이 저항하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태오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터였다. 그녀는 철저한 침묵의 전술을 선택했다.
이준이 천천히 유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구두굽 소리가 경보음 사이를 뚫고 묵직하게 울렸다.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가락이 유진의 턱끝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턱뼈가 부러질 듯한 악력에 유진의 고개가 강제로 꺾였다. 그의 충혈된 안구에 핏발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내 목숨줄을 쥐고 아수라와 거래를 하려 했나, 설유진?”
그의 목소리는 낮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믿기 시작했던 해독제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찾아온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었다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파멸적인 광기였다.
“조작된 이메일 한 통에 이성을 잃고 날뛰는 포식자라니. 골든 크라운의 보스가 고작 이 정도 수준이었습니까, 백이준 씨?”
유진은 턱이 조여오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성북동 사저 생존 수칙 제1조. 그의 광기에는 감정이 아닌 철저한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결백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 꼿꼿한 주둥이로 지하 3층에서도 그렇게 지껄여봐라.”
이준은 유진을 내팽개치듯 손을 거두었다.
“지하 3층 붉은 방으로 압송해라.”
이 경호원들이 유진의 양팔을 붙잡고 거칠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도 작동을 멈춘 사저의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그들은 한 층 더 깊은 심연으로 내려갔다.
지하 3층. 사저 내부에서도 철저히 금지된 구역이자, 과거 이준의 부친 백건우가 배신자들을 고문하고 인체 독성 내성 실험을 자행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음산한 지옥 같은 공간이었다.
두꺼운 철갑 보안문이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내며 열리자, 사방을 가득 채운 붉은색 조명이 유진의 눈을 찔렀. 벽면에는 녹슨 쇠사슬과 정체불명의 고문 도구들이 기괴한 실루엣을 그리며 걸려 있었고, 공기 중에는 수십 년간 축적된 유독한 화학 약품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여 기괴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경비원들은 유진을 방 중앙에 위치한 차가운 강철 의자에 거칠게 앉히고, 사지를 결박했다. 쇠사슬이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촉감이 전신을 타고 번졌다.
쾅—!
두꺼운 철갑 보안문이 닫히며 외부와의 모든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오직 붉은 조명 아래, 유진과 백이준 단둘만이 마주 서 있었다.
이준은 천천히 가죽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무광 흑색의 차가운 흑철 단도를 꺼내어 손끝으로 가볍게 매만졌다. 칼날이 붉은 조명을 받아 섬뜩한 핏빛으로 빛났다.
이준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아수라로부터 유출된 극비의 맹독, 무색무취의 치명적인 지효성 신경독인 ‘밤의 장막(Curtain of Night)’이 담긴 갈색 약병이 들려 있었다.
이준이 약병을 테이블 중앙에 툭 내려놓았다. 유리병이 철제 테이블과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유진에게 가해지는 마지막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이것이 네가 내 잔에 타려 했던 아수라의 독약이다.”
이준의 서늘한 음성이 붉은 방의 격벽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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