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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상자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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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단도의 손잡이를 묵직하게 움켜쥐었다. 손잡이에 새겨진 정교한 각인이 그의 가죽 장갑 표면을 파고들며 낮게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가 손목을 가볍게 비틀자,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무광 흑색의 칼날이 허공에 서늘한 궤적을 그렸다.


“보, 보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정말로 골든 크라운을 위해, 보스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저 약초쟁이 년이 기계를 조작해 저를 모함하는 것입니다!”


임서준이 바닥을 기며 이준의 구두 앞코를 붙잡으려 애원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과 눈물이 뒤섞여 흘러내려 비싼 정장 깃을 더럽히고 있었다. 평소의 오만하던 지식인의 가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오직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비참한 짐승의 몰골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그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충혈된 눈동자는 오직 한 곳, 임서준의 범행을 증명하는 질량 분석기의 모니터 화면과 그 앞에 차갑게 서 있는 설유진만을 향해 있었다.


“치워라.”


이준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흘러나온 그 한마디는 연구실 내부의 온도를 영하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던 한도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비원들에게 손짓했다.


“보, 보스! 안 됩니다! 최이사님! 최이사님이 저를……!”


임서준이 마지막 순간 비명을 지르며 배후의 이름을 뱉으려 했으나, 경비원들의 거친 손길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단 일말의 자비도 없는 숙청이었다. 임서준의 몸이 지하 연구실 문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는 동안, 바닥에는 그가 흘린 식은땀의 흔적만이 기괴한 선을 그리며 남았다.


유진은 그 잔혹한 광경을 단 한 번의 동요도 없이 응시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대리석상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고,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추적 반지만이 인공 조명 아래서 영롱하고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퍼런 손자국 피멍 자국이 욱신거렸지만, 유진은 그 통증마저 자신의 차가운 이성 밑으로 억눌렀.


이준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유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오렐리아 향료의 잔향이 유진의 예민한 비강을 자극했다. 이준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유진의 턱끝을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악력으로 쥐어 올렸다.


“두려운가, 약사?”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유진은 그의 충혈된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다.


“배신자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백을 증명한 대가로 이 사저 내부의 연구 권한을 독점하게 되었군. 하지만 명심해라, 설유진.”


이준의 손가락이 유진의 목덜미에 남은 피멍 상처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예리한 칼날이 스쳐 지나간 듯한 찌릿한 열감이 목선을 타고 번졌다.


“네 쓸모가 다하는 순간, 혹은 네 눈빛에서 단 일밀리미터의 거짓이라도 발견되는 순간…… 저 바닥을 기어 나간 녀석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다.”


“제 쓸모는 당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영원할 것입니다, 백이준 씨.”


유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이준은 유진의 단단한 눈빛에 미묘한 만족감을 느끼는 듯, 서서히 손가락을 거두며 몸을 돌렸다.


“도현. 연구실의 모든 데이터를 백업하고, 임서준의 개인 캐비닛을 철저히 수색해라. 배후의 꼬리까지 완벽하게 잘라내야겠어.”


이준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도현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진은 이준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백가운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첫 번째 고비는 넘겼지만, 사저 내부의 암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


몇 시간 후, 유진은 사저 2층에 마련된 자신의 개인 침실로 돌아왔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손가락 끝의 가벼운 동상 통증이 다시금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침대에 앉아 약지에 채워진 푸른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반지는 그녀의 생사여탈권이자 도망칠 수 없는 족쇄였다. 동생 민우를 구하기 전까지는 이 지옥 같은 사저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방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사저의 살림을 총괄하는 김 집사였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설유진 약사. 방금 사저 외곽 배달 경로를 통해 당신 앞으로 배달된 물건이 있네. 정밀 보안 검사를 거쳤으나, 발신인 명의가 불분명하여 직접 전달하라는 보스의 지시가 있었네.”


김 집사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오동나무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상자의 표면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왠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상자를 열어본 뒤, 특이 사항이 있다면 즉시 비서실로 보고하게.”


김 집사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유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오동나무 상자로 천천히 다가갔다. 심장박동이 기분 나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2단계 초감각 감수성 체질인 그녀의 예민한 코끝에, 상자의 틈새를 타고 흘러나오는 미세한 냄새가 걸려들었다.


철분 냄새. 그리고 희미한 비린내.


그것은 피의 냄새였다.


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순간, 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듯한 극심한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강타했다.


상자 안쪽, 고급스러운 붉은 실크 천 위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은 사람의 손가락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뼈마디가 곱상하고 하얀, 분명히 누군가의 왼손 약지 손가락이었다.


“민우야…….”


유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동생의 이름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눈앞의 시야가 급격히 흐려지고, 심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공포와 죄책감이 그녀의 영혼을 덮쳤. 아수라의 박만수가 동생의 신체를 훼손해 경고장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성북동 사저 생존 수칙 제3조. 사저 내부의 그 어떤 고용인이나 경비대원에게도 남동생 설민우의 존재 및 아수라 조직과의 접촉 사실을 흘리지 말 것.’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유진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강제로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상자 밑바닥에 접혀 있는 쪽지를 꺼냈다. 거친 필체로 적힌 글씨가 유진의 눈을 찔렀.


[백이준의 다음 발작 예정일인 월요일 새벽, 그의 잔에 맹독을 타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 배달물은 네 동생의 손목이 될 것이다. 쥐새끼처럼 굴지 마라, 설유진.]


박만수의 잔혹한 협박이었다. 유진은 숨이 막히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동생의 잘린 손가락을 눈앞에 두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준의 방으로 달려가 독약을 달라고 구걸하고 싶은 충동이 그녀의 이성을 흔들었다.


하지만 유진은 가슴을 쥐어짜며 벽에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그녀의 흩어지려는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았다.


‘아니야. 냉정해져야 해. 박만수는 내가 이성을 잃고 백이준을 독살하게 만들기 위해 이 짓을 벌인 거야. 내가 흔들리면 민우는 정말로 죽어.’


유진은 떨리는 호흡을 정돈하며 다시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끼고, 조심스럽게 상자 속의 손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미세 미각 분석력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유진은 손가락 단면에 묻은 붉은 액체를 아주 미량, 손가락 끝에 묻혀 혀끝에 살짝 대었다. 극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가문의 극한 분석법이었다.


아릿한 철분의 맛이 느껴진 직후, 유진의 미각 신경이 기이한 이질감을 감지했다.


‘이 맛은…….’


진짜 인간의 혈액이라면 느껴져야 할 특유의 끈적함과 단백질의 풍미가 결여되어 있었다. 대신 미세한 인공 방부제의 쓴맛과, 타르 색소 특유의 아릿한 화학적 잔향이 혀끝을 자극했다.


유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축소되었다.


그녀는 즉각 손가락을 들고 사저 지하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준의 감시 카메라가 사방에서 회전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철저히 평정심을 연기하며 분석기 앞에 앉았다. 질량 분석기(LC-MS)에 붉은 액체 시료와 손가락 표면의 미세 조각을 투입했다.


초정밀 분석 기기가 구동음을 내며 작동하고, 모니터 화면 위로 분자 구조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그래프를 그리며 나타났다. 유진은 화면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정밀 화학 기기 분석술을 가동했다.


분석 결과가 모니터에 인쇄되는 순간, 유진의 차가운 눈동자에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폴리디메틸실록산(PDMS) 고분자 화합물. 일치율 100%.’


그것은 진짜 인간의 피부 조직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제작된 특수 의료용 실리콘 모형이었다. 붉은 액체 역시 철분 성분을 인위적으로 융합한 인공 합성 혈액과 타르 색소, 그리고 에틸렌글리콜 방부제의 혼합물이었다.


아수라의 박만수가 보낸 손가락은 완벽하게 조작된 가짜 모형이었다.


“……가짜였어.”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심해보다 더 차가운 분노를 머금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절망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 같은 복수심으로 치환되었다.


머릿속에서 가문의 비전 지식과 아수라의 생태적 특징이 빠르게 연결되었다.


‘설민우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진짜 이유…….’


민우 역시 유진과 동일한 가문의 특이 면역 유전자를 지니고 있었다. 온갖 마비 독소와 약물에 내성을 가진 그의 혈액은 아수라가 개발 중인 신종 마약 ‘블루 헤븐’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합성 공정을 완성할 유일한 ‘생체 실험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수라의 한태성과 박만수는 민우를 쉽게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짜 손가락 상자는 유진의 멘탈을 붕괴시켜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부리기 위한 잔혹한 가스라이팅 도구에 불과했다.


유진은 실리콘 손가락을 오동나무 상자 안에 다시 넣고 뚜껑을 닫았다. 상자를 움켜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를 흔들어서 백이준을 죽이려 했겠지, 박만수.”


유진은 빈 연구실의 어둠을 응시하며 차갑게 속삭였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아수라 조직을 향한 잔혹한 적개심과, 동생을 반드시 구출해 내겠다는 맹목적인 집념이 각성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수라의 협박에 끌려다니는 가녀린 인질이 아니었다. 적들이 동생을 함부로 죽이지 못한다는 확신을 얻은 이상, 판은 완전히 뒤집혔다. 이제 그녀는 백이준이라는 가장 위험한 포식자의 힘을 이용해, 동생을 납치한 아수라의 심장부를 직접 도려낼 준비를 시작할 터였다.


실험실 문 너머 복도에서 묵직한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은 오동나무 상자를 가운 깊숙이 숨기고, 흔들림 없는 차가운 포커페이스로 문을 향해 돌아섰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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