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뒤의 저격
지하 서버실 앞의 공기는 지독하게 차가웠다.
쿵,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구의 최태수가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졌다. 유진의 손끝에서 발사된 무색무취의 마비독 침이 그의 목덜미에 정확히 박힌 결과였다. 최태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벌어진 입으로 소리 없는 비명만을 흘려보냈다.
유진은 쓰러진 최태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흐트러진 검은 실크 드레스의 자락을 정돈했다. 등 라인이 깊게 파인 드레스 위로, 백이준이 남겨놓은 선명한 자줏빛 손자국 피멍이 지하의 붉은 경보등 조명을 받아 기괴하게 도드라졌다. 손가락 끝에 남은 가평 설산의 동상 흉터가 욱신거렸지만, 그녀의 차가운 이성은 통증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유진은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묵직한 백금 인장 반지를 들어 올렸다. 루비가 박힌 가문의 문양을 서버실 도어락의 생체 인식 센서에 밀착시켰다.
[마스터 바이오 인증 완료. 보스 권한 승인.]
치이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유진은 어두운 서버실 내부로 신속하게 진입했다. 중앙 콘솔 위에 놓인 것은 최이사가 아수라 조직과의 밀거래 내역을 숨겨둔 이중 암호화 장치, 바로 최이사의 보안 태블릿 PC였다.
유진은 태블릿을 집어 들고 은제 펜던트의 무선 주파수를 가동했다. 정보 브로커 차수안과의 통신망이 연결되자, 화면 위로 복잡한 데이터 스트리밍이 시작되었다.
[수안: 대박, 유진 언니! 진짜 탈취 성공했네? 지금 바로 백업 서버로 데이터 전송 시작할게. 암호 해독률 80% 돌파 중이야!]
귀밑에 꽂은 초소형 인이어를 통해 수안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태블릿의 화면에서 최이사의 비자금 세탁 경로와 동생 설민우의 이름이 적힌 암호화된 폴더를 확인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그녀는 강제로 숨을 죽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머리 위의 천장, 즉 지상의 VIP 파티장 방향에서 거대한 진동과 함께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수십 명의 비명과 유리잔이 깨지는 파열음이 지하 서버실까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유진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반지가 붉은빛을 발하며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착용자의 바이탈이 아닌, 연동된 이준의 심장박동 센서가 위험 수치를 돌파했다는 비상 신호였다.
“이준 씨…….”
유진의 안색이 투명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녀는 보안 태블릿 PC를 드레스 안쪽 깊숙이 숨긴 뒤, 최태수를 내버려 둔 채 비상 계단을 향해 폭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강남 클럽 헤븐 VIP 파티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화려한 클래식 가면을 쓴 정재계 인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출구를 향해 도망치고 있었고, 경호원들은 총을 뽑아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홀 중앙의 최고급 가죽 소파 옆, 백이준이 무릎을 꿇은 채 바닥으로 쓰러져 가고 있었다.
“보스! 정신 차리십시오!”
보안팀장 이진우가 이준을 부축하려 했으나, 이준의 신체 상태는 이미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이준의 목덜미와 턱선에 검푸른 혈관이 뱀처럼 기괴하게 솟구치고 있었고, 하얀 안구는 붉은 실핏줄로 가득 차올라 충혈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혈관 역류 및 안구 충혈(Vascular Reflux) 증세였다. 그의 목덜미 왼쪽에는 아주 미세한, 벌침보다 작은 검은색 독침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아수라의 일류 살수 사마 준의 저격이었다.
“비켜라! 보스께서 지병으로 쓰러지셨다!”
대기하고 있던 최이사(최진만)가 이사회의 주주들을 거느리고 군중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탐욕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보스의 만성 마비 증세가 마침내 뇌까지 침투한 것이다! 당장 내가 지정한 사설 특수 병원으로 이송해라!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보스의 신변 치료 권한은 내가 위임받는다!”
최이사가 손짓하자, 그가 미리 포섭해 둔 사설 구급대원들과 무장 경비원들이 이준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송 도중 이준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어놓으려는 치밀한 반란 공작이었다. 이진우와 한도현의 경호팀이 총기를 겨누며 저지하려 했으나, 파티장 내부의 VIP들이 인질처럼 뒤섞여 있어 함부로 발포할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려 있었다.
“그 몸에 손대지 마.”
그때, 지하 계단에서 걸어 나온 유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파티장의 혼란을 단숨에 가르며 울려 퍼졌다.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은 유진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그녀의 목덜미에 새겨진 시퍼런 손자국 피멍이 카메라 플래시 불빛 아래 노출되자, 주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진은 오른손 검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에 끼워진 묵직한 백금 인장 반지가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백이준 씨는 지병으로 쓰러진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입된 변이 독소에 피격당한 겁니다.”
유진은 인장 반지의 위엄으로 다가오던 최이사의 부하들을 제지했다. 보스의 전권을 대행하는 반지의 등장에 경비원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라? 감히 일개 약사 년이 어디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거냐! 저 여자는 아수라의 첩자다! 당장 끌어내라!”
최이사가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쳤지만, 유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예민한 후각은 이미 이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냄새를 맡아내고 있었다. 구리와 아몬드 향, 그리고 뱀의 비늘 냄새가 섞인 기괴한 악취. 아수라의 독약 조제사 독사 강혜수가 배합한 즉사성 변이 독소였다.
“이 독은 뇌신경을 마비시켜 3분 안에 심장을 터뜨리는 즉사성 독물입니다. 지금 이송하겠다고 움직이는 순간, 백이준 씨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할 것입니다.”
유진은 최이사의 음모를 대중 앞에서 완벽하게 폭로했다. 기자들과 정재계 인사들의 카메라 셔터가 유진의 하얗고 투명한 얼굴을 향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렇다면 네가 살려보든가! 못 살리면 네년도 스파이 혐의로 즉각 처형이다!”
최이사가 막다른 길에 몰려 발악하듯 소리쳤다. 유진은 대답 대신 쓰러진 이준의 곁으로 다가갔.
그녀는 이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이준의 전신은 이미 강철처럼 굳어가고 있었고, 입술 끝으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진은 가운 대신 입은 드레스 안쪽에서 가문의 비전이 담긴 가죽 침통을 꺼내 들었다.
찰칵, 침통이 열리며 3인치 길이의 예리한 은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개의 카메라 렌즈가 그녀의 손끝을 향해 조여왔다.
유진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이준의 목덜미를 응시했다. 기혈 차단 응급 침구술(Acupuncture). 그녀는 이준의 가슴 중앙 전중혈(膻中穴)과 목덜미의 풍지혈(風池穴)을 정확히 조준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는 광기 속에서, 유진의 손끝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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