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계의 그림자
폭풍이 지나간 사저의 2층 전용 침실은 기묘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가평의 설산에서 채취해 온 야생 오렐리아의 푸른 안개는 이미 공기 중으로 흩어졌으나, 방 안에는 여전히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잔향이 맴돌았다.
백이준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폭주하던 그의 심박수와 혈압은 완전히 평정을 찾았고, 검푸르게 솟구쳤던 목덜미의 핏줄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지독한 열기를 품은 채 설유진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성북동 사저 생존 수칙 제1조를 되새기며, 그녀는 차갑고 단단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유진의 안색은 대리석처럼 투명하고 창백했다. 체내의 특이 면역 항체가 즉사성 독소인 '밤의 장막'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으로, 피부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고 오직 입술만이 붉은 피를 머금은 듯 선명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준의 시선이 유진의 가녀린 목선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이 폭주하며 움켜쥐었던 선명한 자줏빛 손자국 피멍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하얀 대리석 위에 붉은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낙인이었다.
"내 쓸모를 증명했으니, 이제 당신이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유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끝이 욱신거렸다. 가평의 혹한 속에서 야생 약초를 채취하느라 생긴 동상 자국과, 뿌리 끝의 극독성 진액에 노출되어 하얗게 탈색되고 진물이 흐르는 화학 화상의 흉터가 손가락 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준은 유진의 상처 입은 손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거칠지만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추적 반지가 그의 손가락과 맞닿으며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약속이라."
이준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흑색 눈동자에 기묘한 소유욕이 일렁였다.
"그래, 살려둔 보람이 있더군. 내 척수를 난도질하던 마비가 네 향기 한 번에 씻은 듯이 사라졌어. 설유진, 너는 내 완벽한 해독제다. 그러니 내 비호 아래 두는 것도 당연하지."
그가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백금 반지를 집어 들었다. 루비가 정교하게 박힌, 골든 크라운 전대 보스 백건우의 유품이자 보스의 전권을 대행함을 상징하는 '백이준의 가문 인장 반지'였다. 이준은 유진의 검지에 그 반지를 직접 끼워 넣었다.
"오늘 밤, 강남 클럽 헤븐 VIP룸에서 자선 파티가 열린다. 최이사를 비롯한 이사회의 하이에나들이 내 건강 이상설을 퍼뜨리며 반란을 준비하고 있지. 그들 앞에서 네가 내 공식적인 파트너이자 전담 약사임을 선포하겠다."
유진은 검지에 끼워진 묵직한 인장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 반지는 단순한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한도현과의 비밀 공조 과정에서 들었던 정보에 따르면, 이 인장 반지는 클럽 헤븐 지하에 숨겨진 VIP 전용 서버실의 도어락을 무력화할 수 있는 마스터 바이오 인증 키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최이사의 비자금 세탁 경로와 남동생 설민우가 갇힌 아수라 조직의 감금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최적의 기회가 제 발로 걸어온 것이다.
"최이사가 나를 아수라의 스파이로 의심하고 있을 텐데, 파티장에 나를 대동하는 것이 괜찮겠습니까?"
유진이 시험하듯 물었다.
"상관없다. 내 곁에 있는 한, 그 어떤 하이에나도 너를 건드리지 못해. 네가 내 소유물임을 그들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시켜 주지."
이준이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뺨에 남은 파편 자상을 스쳐 지나가자 미세한 통증이 일었지만, 유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드레스를 입어라."
이준이 침대 옆에 걸려 있던 칠흑 같은 검은 실크 드레스를 가리켰다. 등 라인이 과감하게 파여 있어, 유진의 하얀 등 피부와 목덜미에 새겨진 자줏빛 손자국 피멍을 사교계 전체에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드레스였다. 자신이 그녀를 완벽하게 움켜쥐고 흔드는 포식자임을 과시하려는 지독하고 강박적인 소유욕의 발현이었다. 유진은 그 의도를 간파했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들의 혼란을 틈타 움직이는 것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
이준이 방을 나간 후, 유진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첩보 작전을 준비했다. 그녀는 먼저 정보 브로커 차수안과의 접촉을 시도해야 했다. 성북동 사저의 모든 통신망은 이준의 보안팀에 의해 철저히 도청되고 있었다. 일반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진은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목에 걸린 은제 안개 분무기 펜던트를 만졌다. 황실 약제사였던 증조부 대부터 내려온 가문의 유품. 그녀는 펜던트 하단의 미세한 톱니바퀴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두 번 돌렸다. 내부의 미세 회로가 작동하며 사저의 전파 차단망을 우회하는 국소 무선 주파수가 활성화되었다.
유진은 개인 노트북을 열고 암호화된 다크웹 브라우저를 가동했다. 펜던트의 무선 주파수 신호가 노트북의 가상 포트와 연동되며 철저히 세탁된 스위스 프록시 서버를 경유했다.
[접속 완료. 섀도우 넷.]
화면에 까칠한 해커 차수안의 고유 아바타가 나타났다.
- 웬일이야, 꼬마 약사님? 성북동 요새에서 살아남았나 보네?
유진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동상과 화학 화상으로 짓무른 손가락 끝이 키보드에 닿을 때마다 쓰라린 통증이 일었지만, 타이핑 속도는 빠르고 정확했다.
- 거래를 제안하지. 오늘 밤 강남 클럽 헤븐 VIP룸의 보안망을 해킹해 줘. 지하 VIP 전용 서버실의 도어락 프로토콜과 내부 CCTV 사각지대 도면이 필요해.
- 클럽 헤븐? 거긴 골든 크라운의 심장부잖아. 보안 등급이 국가 군사 기지 수준이야. 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대가는 준비됐어?
유진은 주저 없이 이준이 매주 월요일 아침 자신의 스위스 비밀 계좌로 송금해 주는 주당 1억 원의 연구비 계좌를 열었다. 이 초법적 자금은 이준이 그녀의 조제 능력을 인정하고 무제한으로 지원해 주는 돈이었다. 유진은 그중 정확히 1억 원을 차수안의 익명 비트코인 지갑으로 이체했다.
- 착수금 1억. 성공 보수는 데이터 확보 후 추가로 1억 더 주지.
화면 너머에서 수안의 껌 씹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가치 앞에, 돈을 가장 사랑하는 천재 해커의 방어선이 단숨에 무너졌다.
- 역시 우리 대기업 약사님, 스케일이 다르시네. 좋아, 거래 성립. 10분 내로 클럽 헤븐 내부 CCTV 사각지대 도면을 네 펜던트 수신기로 전송할게. 서버실 도어락은 바이오 인증 키가 필요한데,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건데?
- 마스터키는 내 손에 있어.
유진은 검지에 끼워진 백이준의 가문 인장 반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답했다.
- 완벽하네. 파티가 시작되면 내 신호에 맞춰 움직여.
수안의 메시지와 함께 노트북 화면이 꺼졌다. 유진은 펜던트를 다시 정돈해 목에 걸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
밤 9시. 강남의 화려한 빌딩 숲 지하에 숨겨진 '강남 클럽 헤븐 VIP룸'은 퇴폐적이고 사치스러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대한민국 정재계의 거물들과 사교계의 귀족들이 가면을 쓴 채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는 우아한 자선 파티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골든 크라운의 음성 자금을 세탁하고 아수라 조직과의 밀거래가 성행하는 타락한 소굴이었다.
"골든 크라운의 보스, 백이준 회장님 입장하십니다."
지배인의 웅장한 안내와 함께 VIP룸의 육중한 황금 문이 열렸다. 사교계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로 쏠렸다. 단정한 수트 차림의 백이준은 만성 신경 마비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꼿꼿하고 위압적인 풍채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칠흑 같은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은 설유진이 그의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군중 속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등 라인이 과감하게 파여 수많은 시선에 노출된 유진의 하얀 등 피부. 그리고 그 위로 선명하게 드러난 자줏빛 손자국 피멍 자국들. 그것은 폭력적이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관능적인 소유의 표식이었다. 창백한 대리석 같은 피부와 붉게 상기된 입술, 그리고 왼손 약지에서 퍼져나가는 푸른 다이아몬드 GPS 반지의 광채는 그녀를 사교계의 가장 매혹적이고 위험한 뮤즈로 만들었다.
"저 여자가 보스의 전담 약사인가?"
"목덜미의 상처를 봐…… 보스의 광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살아남은 유일한 여자라더니, 진짜였군."
최이사는 파티장 구석에서 샴페인 잔을 쥔 채 이빨을 갈았다. 유진이 가평의 설산에서 사마 준의 저격을 피하고 보스를 살려내어 이 자리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은 그의 모든 계산을 어그러뜨렸다.
그때, 화려한 이목구비에 실크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교계 천재 조향사 서예지가 다가왔다. 그녀는 이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인물이었다. 예지의 몸에서는 남성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합성 페로몬 성분이 함유된 최고급 '골드 앰버 향수'의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준 씨, 오랜만이에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제 향수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예지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준의 품으로 은밀히 다가왔다. 그녀의 향수 향이 공기 중으로 퍼지며 이준의 코끝을 자극하려 했다. 그러나 유진은 예지의 행동을 차갑게 관찰하고 있었다. 유진의 초감각적 독소 후각은 예지의 향수 속에 뇌신경을 인위적으로 자극하는 미량의 합성 페로몬과, 아수라 조직이 공급한 불법 성분이 섞여 있음을 즉각 판별해 냈다.
"서예지 씨."
유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예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향수, 백이준 씨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위적으로 중추신경을 흥분시키는 합성 페로몬 성분은 만성 신경 마비를 앓고 있는 분의 혈관 역류 증세를 극대화할 뿐이죠. 당장 그 향수를 거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라고요? 일개 약사 주제에 사교계의 조향사인 내 배합 공식을 논하는 건가요?"
예지가 불쾌한 듯 얼굴을 붉히며 쏘아붙였다.
"논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하는 겁니다. 이미 이준 씨의 신경망은 내가 조제한 오렐리아의 숨결 향료로 완벽하게 장악되어 있으니까요. 당신의 그 조잡한 페로몬 향수는 그에게 불쾌한 두통만 유발할 뿐입니다."
유진은 검지에 끼워진 백이준의 가문 인장 반지를 예지의 눈앞에 슬며시 들어 보였다. 루비가 박힌 묵직한 반지가 조명을 받아 붉게 빛났다. 보스의 전권을 대행한다는 무언의 선포였다. 예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이준은 예지의 향수 향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아 자신의 품으로 밀착시켰다.
"서예지. 내 약사의 말이 들렸을 텐데. 당장 내 시야에서 꺼져라. 그 불쾌한 냄새가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군."
이준의 냉혹한 축객령에 예지는 주주들의 시선 속에서 수치심에 몸을 떨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최이사가 준비한 일차적인 사교계 덫이 유진의 완벽한 약리학적 지식과 이준의 절대적인 총애 앞에 무참히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
"잘했어, 유진."
이준이 유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수많은 군중 앞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사교계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유진은 이준의 팔짱을 낀 채, 그의 보폭에 맞춰 우아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유진의 목에 걸린 은제 안개 분무기 펜던트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차수안이 보내온 신호였다. 클럽 헤븐의 보안망이 일시적으로 교란되어 지하 서버실로 통하는 CCTV 사각지대 경로가 확보되었다는 신호였다. 유진은 이준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준 씨."
이준은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위성 GPS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반지의 푸른 다이아몬드가 차갑게 반짝였다. 이준이 유진의 가녀린 목덜미에 직접 보석 목걸이를 걸어주며 낮게 속삭였다.
"오늘 밤, 수많은 포식자들이 너를 노릴 거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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