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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의 푸른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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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유진 씨…… 보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사저가 피바다로 변하고 있습니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도로를 움켜쥐었다. 반파된 블랙 가디언의 찌그러진 휠 하우스에서 불길한 금속성 마찰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지만, 최강일은 가속 페달을 밟은 발에 한 치의 양보도 두지 않았다. 서울 도심으로 진입한 차체는 빗길과 눈밭이 뒤섞인 아스팔트 위를 폭풍처럼 질주했다.


유진은 조수석 시트에 몸을 깊숙이 묻은 채, 가운 안쪽 비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은제 보관병을 손끝으로 꼭 쥐었다. 가평의 아찔한 벼랑 끝에서 목숨을 걸고 채취한 야생 오렐리아의 종자. 그리고 동대문 밀수 연합의 윤성필을 통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주고 확보한 만년설 산삼 추출액(Alpine Ginseng Extract)의 묵직한 무게감이 가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양손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설산의 칼바람에 노출되어 감각을 잃은 동상 자국 위로, 야생 약초의 뿌리를 채취할 때 묻은 강산성 독소로 인해 피부 표면이 하얗게 탈색되고 벗겨진 화학 화상의 흔적이 선명했다. 뺨에는 저격탄이 고목을 때릴 때 비산한 나무 파편에 긁힌 미세한 자상이 붉은 핏방울을 머금은 채 굳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의 창백한 대리석 같은 얼굴에는 그 어떤 고통의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서늘할 정도로 가라앉은 차가운 이성만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형형하게 빛날 뿐이었다.


“강일 씨, 신호 무시하고 지름길로 진입하세요. 사저 내부의 전력망과 환기 시스템이 최이사의 사보타주로 교란되었다면, 보스의 발작 제어 장치도 멈췄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진의 잠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알겠습니다.”


강일이 핸들을 급격히 꺾었다. 블랙 가디언은 성북동 산자락의 가파른 경사로를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고풍스러운 한옥과 현대식 양옥이 기묘하게 뒤섞인 백이준의 사저 정문에 도달했을 때, 유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삼엄하게 입구를 지켜야 할 사설 경비대원 서너 명이 정원의 눈밭 위로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의 방탄조끼는 찢겨 나가 있었고, 정원의 고급 석등과 대리석 조각상들은 무지막지한 물리적인 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침입자의 흔적이 아니었다. 안에서 밖으로 폭발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야수 같은 무력이 휩쓸고 간 흔적이었다.


“보스께서…… 폭주하셨습니다.”


도현이 어깨의 총상 통증을 참아내며 글록을 고쳐 쥐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준을 평생 모셔온 그조차도, 오렐리아 향료가 완전히 고갈되었을 때 찾아오는 이준의 ‘신경 광기 폭주(Neurotic Madness)’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본능적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유진은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동상과 화상으로 짓무른 손가락 끝이 칼바람에 노출되자 뼈가 시리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녀는 은제 보관병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본관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


본관 내부의 대리석 복도는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사저 책임 집사인 김 집사가 경비대원들을 지휘하며 2층 침실로 통하는 계단을 봉쇄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계단 난간은 이미 통째로 뜯겨 나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쿠우웅! 콰장창!


2층에서 들려오는 파괴음은 대저택 전체를 뒤흔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백이준의 거친 노호성이 복도를 타고 음산하게 흘러내렸다.


“설 약사님!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보스께서 지금 이성을 완전히 잃으셨습니다! 피아 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김 집사가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절박하게 소리쳤. 경비원들이 전기 충격기와 그물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이준의 괴력에 당해 갈비뼈가 부러진 대원들이 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실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기 충격기조차 온갖 독소와 약물 내성 실험으로 다져진 이준의 특이 체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비키세요.”


유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김 집사를 쏘아보았다.


“지금 저 사람을 진정시키지 못하면, 뇌세포가 영구적으로 파괴되어 12시간 내에 사망합니다. 당신들이 들고 있는 그 장난감으로는 저 괴물을 멈출 수 없어요.”


그녀는 가운 주머니에서 은침 통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계단 위에서 덜덜 떨며 기화기 필터를 들고 서 있던 조수 강태오를 발견했다.


“태오 씨, 고밀도 약초 추출 기화기(High-Density Herb Vaporizer)를 들고 내 방으로 따라와요. 당장.”


“네, 넵! 약사님!”


태오가 구세주를 만난 듯 눈물을 흘리며 유진의 뒤를 따랐다. 유진은 도현의 호위를 받으며 일그러진 계단을 밟고 2층 이준의 침실 앞으로 향했다.


침실의 무거운 참나무 문은 이미 경첩이 떨어져 나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문틈 사이로 붉은 조명이 기괴하게 새어 나왔다. 이준의 개인 바이탈 모니터는 한계를 초과한 심박수와 혈압을 알리는 비상 경보음을 날카롭게 울려 대고 있었다.


유진이 문을 밀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녀의 전신을 짓눌렀.


방 안의 모든 가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나 있었고, 벽면의 고급 실크 벽지는 예리한 손톱자국처럼 찢겨 나가 있었다. 그 파괴의 중심에 백이준이 서 있었다.


그의 목덜미와 이마의 핏줄은 검푸른 뱀처럼 기괴하게 솟구쳐 있었고, 하얀 안구는 핏빛 실핏줄로 가득 차 흘러넘칠 듯 충혈되어 있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동공은 오직 파괴 본능만을 머금은 채 번뜩였다.


“크으으…… 아아악!”


이준이 머리를 감싸 쥐며 포효했다. 그의 체내에 주입된 변이 독소가 뇌의 전두엽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극심한 두통과 함께 온몸의 신경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핏빛 시선이 문가에 선 유진에게 닿았다.


“보스, 저입니다! 설유진입니다!”


도현이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총구를 바닥으로 내린 채 외쳤지만, 폭주한 이준의 귀에는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준은 바닥을 박차고 번개 같은 속도로 돌진했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거대한 트럭이 돌진하는 것과 같았다.


“도현 씨, 물러서세요!”


유진이 도현을 옆으로 밀쳐내는 것과 동시에, 이준의 거친 손길이 유진의 얇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쿵!


유진의 등 뒤로 박살 난 침대 프레임이 부딪히며 거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척추를 타고 뇌리까지 찌릿한 통증이 관통했지만, 유진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이준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움켜쥐고 단단히 조여왔기 때문이었다.


“컥……!”


그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유진의 목선에 남은, 과거 자신이 새겨놓았던 시퍼런 피멍 흔적 위를 다시 한번 짓눌렀다. 산소가 단숨에 차단되고 시야가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이준의 다른 한 손이 반사적으로 유진의 왼손목을 움켜쥐었다. 으스러질 듯한 악력이 가해지자, 유진의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추적 반지가 백금 프레임과 맞닿으며 유진의 살을 파고들었다. 동상과 화상으로 짓무른 손가락 끝의 상처가 다시 터지며 하얀 가운 위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유진은 그 파멸적인 고통 속에서도 눈동자를 흐리지 않았다.


‘성북동 사저 생존 수칙 제1조. 백이준과 독대할 때는 절대 눈빛을 흐리거나 피하지 말 것. 그의 광기 어린 의심과 폭주에는 감정이 아닌 철저한 논리와 신체적 장악으로 대응해야 한다.’


유진은 대리석처럼 투명하고 창백한 안색 속에서, 오직 붉은 피를 머금은 듯 상기된 입술만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동공이 풀린 이준의 눈을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했다.


“백…… 이준 씨. 나를 봐요.”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이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사저의 모든 요원들을 찢어발기던 괴물이, 오직 유진의 목소리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미세한 야생 오렐리아의 잔향에 반응한 듯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 속에서 아주 찰나의 이성이 명멸했다.


유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으로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3인치 은침을 이준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았다.


“전통 침구 기혈 조율술(Ki-Acupuncture).”


예리한 은침이 이준의 목덜미 백회혈(百會穴)과 아문혈(啞門穴)에 정확하고 깊숙하게 자침되었다. 침 끝이 척수 신경망의 중심을 관통하는 순간, 이준의 전신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일시적으로 경직되었다. 그의 뇌로 향하던 급격한 혈류의 압력이 차단되며 솟구쳤던 검푸른 혈관들이 눈에 띄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태오 씨! 지금이에요! 기화기 최대로 가동해요!”


유진이 목이 조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명을 지르듯 명령했다.


문가에서 대기하던 강태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밀도 약초 추출 기화기의 전원을 켰다. 유진이 가평에서 가져온 야생 오렐리아 종자와 만년설 산삼 추출액(Alpine Ginseng Extract)을 결합해 급속 정제해 낸 액상 향료가 기화기 내부의 정제 백금 앰플과 반응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기화기 노즐을 통해 짙고 영롱한 푸른빛의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온실의 인공 약초와는 차원이 다른, 혹한의 설산에서 스스로 독성을 정화하며 살아남은 야생 오렐리아의 순수한 생명력이 담긴 푸른 장막이었다.


차가운 흙 냄새와 알싸한 인삼의 극양(極陽) 성분이 뒤섞인 매혹적인 향기가 순식간에 침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유진은 이준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귀밑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었다.


“숨을 쉬어요, 이준 씨. 내 호흡에 맞춰서…… 깊게 들이마셔요.”


그녀의 약리학적 심리 조작술(Aroma Manipulation)이 시작되었다. 유진은 자신의 심장박동 템포를 인위적으로 늦추며, 이준이 그녀의 체온과 호흡에 동조되도록 유도했다.


푸른 안개가 이준의 호흡기를 통해 뇌신경망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만년설 산삼 추출액의 따뜻한 성분이 독초의 차갑고 거친 부작용을 완벽하게 상쇄하며, 이준의 뇌세포를 보호하고 자율신경계를 급속도로 이완시켰다.


“크윽…… 으음……”


이준의 목구멍에서 괴물이 아닌, 상처 입은 인간의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핏빛 눈동자가 서서히 맑은 흑색의 심연으로 돌아왔고, 유진의 목을 조르고 있던 거대한 손아귀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긴장이 풀린 이준의 거구가 앞으로 쓰러지며 유진의 가녀린 어깨 위로 묵직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유진의 하얀 목덜미, 자신이 새겨놓은 상처 위에 고개를 깊숙이 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렐리아의 푸른 안개 속에서, 이준의 심장박동이 유진의 평온한 심장 소리와 완벽하게 싱크를 맞추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그가 유진의 가느다란 허리를 으스러질 듯한 소유욕으로 끌어안으며, 낮고 서늘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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