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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의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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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지탱하던 장력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유진의 몸이 아찔한 벼랑 밑,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가평 설산의 칼바람이 낙하하는 유진의 온몸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시야가 하얗게 뒤집히고, 중력이 그녀의 가녀린 신체를 절벽 아래의 어둠 속으로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도 유진은 비명 한 자락 지르지 않았다. 가운 안쪽 비밀 주머니 속, 동생 민우를 살리고 백이준을 통제할 유일한 열쇠인 야생 오렐리아의 종자병을 감싸 쥔 손끝에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양손은 이미 동상으로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고, 뺨에 새로 생긴 파편 자상에서는 차가운 눈바람 속에서도 붉은 핏방울이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그녀의 차가운 이성이 죽음의 공포를 압도하는 바로 그 순간, 절벽 위에서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유진 씨!”


한도현의 노호성과 함께, 그의 손목에 차여 있던 골든 크라운 인장 시계의 측면 버튼이 강하게 눌렸다. 팅!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시계 내부에서 초소형 티타늄 와이어가 번개처럼 발사되었다. 와이어는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며 추락하던 유진의 등 등반용 하네스 잔해를 정확하게 휘감았다.


탁!


묵직한 반동과 함께 와이어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낙하하던 유진의 몸이 허공에서 턱, 하고 멈춰 섰다. 급격한 감속으로 인해 하네스가 허리를 조여왔고, 독성 누적 손상으로 약해져 있던 유진의 폐부에서 쿨럭하는 거친 기침과 함께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고였다. 안색이 대리석처럼 투명하게 질려갔지만, 유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절벽 위에서 도현이 이를 악물며 전신 근육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가슴 쇄골 밑에 새겨진 과거의 수술 흉터가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도현은 와이어를 단단히 쥐고 유진의 몸을 절벽 위로 거칠게 끌어올렸다.


타아앙! 타앙!


능선 저편에서 사마 준의 저격탄이 다시 한번 날아와 그들이 디디고 있던 암반을 타격했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사마 준의 총구는 유진의 몸을 직접 겨누지 못했다. 유진이 간파한 대로, 아수라의 목적은 그녀의 ‘생포’였기에 추락사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미세한 망설임이 도현에게 결정적인 시간을 벌어주었다.


“잡으십시오!”


도현이 뻗은 단단한 손이 유진의 동상 걸린 손목을 움켜쥐었다. 묵직한 악력과 함께 유진의 몸이 절벽 위로 끌어 올려졌다. 눈밭 위로 구른 유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운 안쪽의 은제 보관병이 무사한지 손끝으로 확인했다. 단단하고 차가운 유리병의 촉감이 전해지자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가야 합니다. 적들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습니다.”


도현이 유진을 부축해 일으키며 숲 아래쪽을 가리켰다. 침엽수림 사이로 헤드라이트의 거친 불빛들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수라의 살수들이 차량을 이끌고 산길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눈 덮인 숲길을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칼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유진의 잠긴 목소리에서 쌕쌕거리는 쇳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녀의 걸음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임도 초입에 도달하자,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육중한 검은색 세단이 헤드라이트를 번쩍였다. 최고급 장갑판과 유리 방탄이 적용된 골든 크라운의 특수 개조 세단, ‘블랙 가디언’이었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선글라스를 쓴 최강일이 날카로운 턱선을 굳힌 채 소리쳤.


“탑승하십시오! 도로가 완전히 차단되기 일보 직전입니다!”


도현이 뒷좌석 문을 열고 유진을 밀어 넣은 뒤, 자신도 빠르게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최강일이 가속 페달을 사정없이 밟았다. 콰아앙! 하는 엔진의 굉음과 함께 블랙 가디언의 사륜구동 타이어가 빙판길을 움켜쥐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블랙 가디언이 가평 산맥의 험준한 내리막길로 접어든 순간, 백미러 너머로 아수라 조직의 무장 SUV 두 대가 미친 듯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쿵!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적의 선두 차량이 블랙 가디언의 리어 범퍼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차량 내부가 거칠게 흔들리며 유진의 몸이 시트 옆벽에 부딪혔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추적 반지가 차가운 시트 가죽을 긁으며 영롱한 빛을 발했다. 이 반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성북동 사저에 있을 백이준에게 그녀의 실시간 위치와 요동치는 바이탈 데이터를 전송하고 있을 터였다.


“끈질긴 쥐새끼들이군.”


도현이 뒷좌석 창문을 열고 상체를 반쯤 내밀었다. 그의 손에 쥐인 글록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타타탕! 타탕!


경쾌한 격발음과 함께 탄환들이 뒤쫓아오는 아수라 SUV의 전면 유리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하지만 불꽃만 튈 뿐, 적들의 차량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치명적인 특수 방탄 장갑입니다. 일반 9mm 탄환으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습니다!”


도현이 이를 갈며 다시 차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의 어깨 부근 슈트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사마 준의 저격단에 스친 자상이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다시 터진 것이었다.


최강일이 룸미러로 뒤를 살피며 핸들을 꺾었다.


“급제동으로 충돌을 유도하겠습니다. 꽉 잡으십시오!”


강일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급격히 돌려 드리프트를 시도했다. 적 차량을 빙판길 옆 옹벽으로 밀어내려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설산의 빙판길은 혹독했다. 블랙 가디언의 타이어가 접지력을 잃고 미끄러지더니, 차량의 후미가 도로변의 거대한 암반을 거칠게 긁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철판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블랙 가디언의 오른쪽 휠 하우스가 완전히 찌그러졌다. 조향 장치에 이상이 생겼는지 핸들이 미세하게 떨렸고, 차량의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적의 SUV 두 대가 블랙 가디언의 양옆을 포위하듯 좁혀왔다. 창문 너머로 총구를 겨누는 아수라 조직원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유진은 그 혼란 속에서도 눈동자를 굴려 적 차량의 구조를 관찰했다. 그녀의 초감각적 시각과 지능이 적들의 장갑판 표면에서 튀는 스파크의 색상과 질량을 분석해 냈다.


‘고니켈 합금 방탄 강판…….’


물리적인 타격에는 극도로 강하지만, 특정 화학적 산성 부식에는 결합 구조가 순식간에 붕괴되는 특성을 지닌 합금이었다. 유진의 머릿속에서 화학 공식이 빛의 속도로 조립되었다. 가평의 절벽 끝에서 채취한 야생 오렐리아의 뿌리에는, 영하의 온도에서 버티기 위해 응축된 극독성의 천연 산성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유진은 백가운 주머니 속에서 가평에서 채취한 야생 약초의 생잎과 뿌리 조각들을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숨겨두었던 빈 ‘피닉스 응급 해독 주사기’의 실린더를 꺼내 들었다.


“도현 씨, 예비 탄창을 주세요.”


유진의 잠긴 목소리가 차 안의 소음을 뚫고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도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이내 군말 없이 허리춤에서 예비 탄창을 꺼내 건넸다.


유진은 동상으로 감각이 죽어가는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는 주사기 실린더를 이용해 야생 오렐리아 뿌리에서 극도로 농축된 황색의 강산성 독소 원액을 정밀하게 추출해 냈다. 원액이 주사기 끝에서 흘러내려 도현의 탄창 내부 탄두 끝에 닿는 순간, 치이익—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탄두 표면이 검붉게 변하며 코팅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산성 독소가 유진의 손가락 끝에 묻어 하얀 피부가 하얗게 탈색되며 타들어 가는 극심한 화학 화상을 유발했다. 손끝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유진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모든 탄환의 끝에 정밀하게 독소를 주입했다.


“산성 독소 탄환입니다. 적 차량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방탄유리의 접합부를 조준하세요. 물리적 타격이 아닌 화학적 부식을 일으킬 겁니다.”


유진이 탄창을 도현에게 돌려주며 차갑게 말했다. 도현은 검붉은 빛으로 변한 탄환들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무력이 아닌, 오직 약학적 지식만으로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그녀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압도당한 순간이었다.


도현은 신속하게 탄창을 글록에 장전했다. 그리고 다시 창밖으로 몸을 던지듯 내밀며 적 차량의 전면 라디에이터 그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


타앙! 타앙!


독소 탄환이 적 SUV의 그릴에 명중했다. 물리적인 파괴는 없었지만, 탄두가 깨지며 묻은 고농도 산성 독소가 고니켈 합금의 강판을 순식간에 녹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식은 무서운 속도로 번져 라디에이터 파이프를 녹여버렸고, 내부의 냉각수가 급격히 유출되며 적 차량의 엔진룸에서 백색의 유독성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 나왔.


“먹혔습니다!”


도현이 외치며 이번에는 적 차량의 방탄유리 모서리 접합부를 저격했다.


타앙!


탄환이 명중한 유리의 접합부가 순식간에 누렇게 변색되며 녹아내렸다. 방탄유리를 지탱하던 프레임이 부식되어 장력을 잃자, 거센 바람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방탄유리가 통째로 차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시야를 잃고 유독 가스에 노출된 적의 운전자가 경악하며 핸들을 꺾었다.


쿠과과광!


통제력을 잃은 아수라의 선두 SUV가 도로변의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공중으로 한 바퀴 굴러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뒤따라오던 두 번째 SUV 역시 비산하는 파편과 연기를 피하려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옹벽을 들이받고 멈춰 섰다.


사마 준의 추격대가 완벽하게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최강일은 반파된 블랙 가디언의 스티어링 휠을 꽉 쥔 채, 가평의 산악 도로를 벗어나 마침내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는 도시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차 내부에는 차가운 침묵과 함께, 유진의 손끝에서 풍기는 비릿한 독초 향만이 감돌고 있었다.


유진은 뺨에 흐르는 피를 대충 가운 소매로 닦아내며, 동상과 화상으로 엉망이 된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통은 살아있음의 증거였고, 그녀의 품속에 있는 오렐리아 종자는 이 지옥 같은 사저에서 살아남아 동생을 구할 완벽한 무기였다.


그때였다.


지직, 지지직—.


블랙 가디언의 대시보드에 매립된 암호화된 전술 무전기에서 기괴한 노이즈와 함께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성북동 사저의 보안 주파수였다.


수신기를 쥔 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수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사저 경비대원들의 비명 소리와 무언가 박살 나는 파괴음이었다.


도현이 무전기를 귀에 밀착시키자, 수하 요원의 절박한 목소리가 차 안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도, 도현 대장님! 보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약초가 공급되지 않아 만성 마비 발작이 임계치를 넘었습니다! 보스께서 이성을 완전히 잃고 사저 내부의 경비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컥! 아악!]


단선되는 무전음 너머로 짐승의 포효 같은 백이준의 노호성이 들려왔다. 도현이 무전기를 꽉 쥐며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극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설유진 씨…… 보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사저가 피바다로 변하고 있습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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