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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의 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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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드득! 하는 기괴한 균열음과 함께 유진의 바로 옆 나무 기둥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날카로운 나무 파편과 하얀 눈 가루가 유진의 투명한 뺨과 이마 위로 사정없이 흩날렸다.


뺨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파편에 얇은 살결이 찢어지며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얼어붙을 듯한 가평 설산의 칼바람 속에서, 그 핏방울은 유진의 창백한 피부와 대비되어 기괴할 정도로 선명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유진은 비명 한 자락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박살 난 나무 기둥 너머,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능선 위를 응시했다.


“설유진 씨! 고개 숙이십시오!”


한도현이 묵직한 목소리로 외치며 휴대용 전술 방탄 방패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개했다. 탕! 타앙! 방패 표면을 때리는 둔탁한 금속음이 대기를 흔들었다. 적의 저격수는 한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위협적인 탄도는 단 하나, 북동쪽 고지대에서 날아오는 사마 준의 라이플 탄환이었다.


유진은 도현의 방패 뒤로 몸을 밀착시킨 채, 가만히 자신의 뺨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손끝으로 훔쳐냈다. 차가운 눈가루와 피가 섞여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들었다. 주머니 안쪽에서 만져지는 빈 ‘피닉스 응급 해독 주사기’의 실린더가 차가운 감각으로 그녀의 이성을 깨웠다.


‘사마 준. 아수라의 일류 살수.’


유진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초탄은 가이드 박도식의 배낭을 맞췄고, 차탄은 그녀의 머리맡 나무 기둥을 박살 냈다. 탄도가 지나치게 정확하면서도 미묘하게 빗나가 있었다.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야. 다리를 묶어 생포하려는 거다. 한태성의 지령이 내렸겠지.’


적들의 의도가 ‘생포’라는 확신이 서는 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이 죽음의 설산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반격의 실마리였다. 적들은 그녀가 다치거나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 경계선을 파고들어야 했다.


“도현 씨, 적들의 목적은 내 생포예요. 함부로 날 조준해서 치명상을 입히지 못할 겁니다.”


도현은 권총을 쥔 채 방패 틈새로 적의 위치를 탐색하며 낮게 신음했다.


“그렇다 해도 저격수의 시야가 확보된 상황입니다. 이 엄폐물 뒤에서 벗어나는 즉시 다리를 조준할 겁니다.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 오렐리아의 종자는 어떻게 하죠?”


유진의 시선이 고목 아래, 아찔하게 깎아지른 절벽 가장자리로 향했다.


눈보라와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해발 800m의 벼랑 끝. 유진의 초감각적 후각은 그 거센 칼바람을 뚫고 풍겨오는 미세한 냄새를 이미 포착하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듯한 구리와 아몬드 향의 독소 잔해 냄새. 영하의 온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독성을 응축시킨 야생 오렐리아의 숨결이 바로 저 절벽 틈새에 숨겨져 있었다.


백이준의 발작 예정 시한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40시간 남짓. 이 가평의 야생 종자를 채취해 사저의 온실을 복구하지 못하면, 두 사람 모두 공멸한다. 이준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질식사할 것이고, 유진의 동생 민우 역시 아수라의 손에 목숨을 잃을 터였다.


“내가 내려가겠어요.”


유진의 단호한 선언에 도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미쳤습니까? 이 눈보라 속에서 저 벼랑을 내려가겠다는 건 자살 행위입니다!”


“자살이 아니에요. 계산된 도박이죠.”


유진은 왼손 약지에 끼워진 푸른 다이아몬드 위성 GPS 추적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반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백이준의 단말기로 그녀의 위치를 실시간 전송하고 있을 것이다. 이준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웠지만, 동시에 이 족쇄는 이준이 그녀를 살려야만 하는 지독한 중독의 고리이기도 했다.


“사마 준은 내가 절벽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 저격을 멈출 수밖에 없어요. 내가 추락해서 사망하면 한태성의 지령을 실패하는 셈이니까요. 도현 씨는 위에서 적들의 시선을 끌어주세요.”


유진은 박도식이 버리고 간 반파된 배낭 잔해 속에서 빙벽용 등반 로프와 피켈을 신속하게 수거했다. 손가락 끝이 혹한의 날씨로 인해 서서히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고,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차가운 공기는 독성 누적 손상으로 약해진 그녀의 호흡기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쿨럭, 짧은 기침과 함께 목구멍에서 비릿한 핏물이 맴돌았지만 유진은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도현은 유진의 단단한 눈빛을 보며, 과거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은인 설재희 교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분의 딸을 이 설산에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도현은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기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 5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저격수의 시선을 완벽하게 교란하겠습니다. 종자를 확보하는 즉시 신호를 주십시오.”


“부탁해요, 도현 씨.”


유진은 로프의 한쪽 끝을 박살 난 고목 기둥에 단단히 고정하고, 다른 한쪽을 자신의 허리에 묶었다. 그리고 빙벽용 아이스 피켈을 양손에 쥔 채, 망설임 없이 절벽 가장자리로 걸음을 옮겼.


타아앙—!


그녀의 발걸음이 눈밭을 밟는 순간, 다시 한번 사마 준의 저격탄이 날아와 유진의 구두 굽 바로 옆 눈더미를 관통했다. 폭발하듯 솟구친 하얀 눈보라가 유진의 시야를 가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벼랑 밑 암반을 향해 몸을 던지듯 하강하기 시작했다.


절벽의 높이는 아찔했다. 칼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밧줄에 매달린 유진의 가녀린 몸이 허공에서 크게 흔들렸다. 얼어붙은 암벽 표면은 유리처럼 미끄러웠고, 피켈을 박아 넣을 때마다 손목을 타고 찌릿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추워…….’


손가락의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장갑을 끼었음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피켈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기가 서서히 얼어붙으며 가슴 통증이 극에 달했다. 독성 누적 손상으로 인한 부작용이 이 혹한의 환경에서 최악의 형태로 발현되고 있었다.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잠겨 숨을 쉴 때마다 쌕쌕거리는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유진은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오직 초감각적 후각에 의지해, 암벽 틈새에 숨겨진 그 기묘한 향기를 추적했다.


위에서 도현의 권총 격발음과 사마 준의 라이플 소리가 쉴 새 없이 설산을 울렸다. 도현이 스스로를 노출해가며 적의 사격 각도를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유진은 절벽 아래로 10미터, 15미터 더 깊숙이 내려갔다.


마침내, 얼어붙은 암반 틈새, 만년설이 덮인 작은 동굴 같은 균열부 속에서 기이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찾았다.’


유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눈과 얼음 속에 파묻힌 채, 영롱한 푸른 안개를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는 약초 군락지. 사저의 온실에서 자라던 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단단한 줄기를 가진 천연 야생 오렐리아의 군락이었다. 그 줄기 끝에 매달린 붉은빛의 미세한 씨앗들—가평 재배림 약초 종자였다.


유진은 피켈을 암벽에 깊숙이 박아 고정하고,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품속에서 작은 은제 보관병을 꺼냈다.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 병뚜껑을 돌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빨로 병뚜껑을 물어뜯어 열어젖힌 유진은, 조심스럽게 야생 오렐리아의 줄기를 흔들어 붉은 종자들을 병 안으로 쓸어 담았다.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이 얼어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종자만 있으면 온실을 정화하고 이준의 발작을 막을 수 있다. 동생 민우를 구출할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 종자 한 알까지 병 속에 담고 뚜껑을 단단히 닫아 가운 깊숙한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절벽 위에서 기괴한 파열음이 다시 한번 설산을 찢었다.


타아아앙—!


그것은 도현을 향한 총성이 아니었다. 사마 준의 예리한 저격탄이 유진의 머리 위, 밧줄이 고정되어 있던 고목의 바위 틈새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낙석이 쏟아지며 유진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툭, 지이익! 하는 불길한 마찰음과 함께 유진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등반 로프가 예리한 탄환의 열기에 쓸려 반쯤 뜯겨 나가더니, 이내 거센 칼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끊어져 나갔다.


“……!”


허공을 지탱하던 장력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유진의 몸이 아찔한 벼랑 밑,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심연 속으로 속절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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