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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의 검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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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으로 향하는 도로 위는 온통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암전된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서울을 벗어나 강원도 접경지대로 들어설수록 침엽수림의 검은 실루엣이 마치 거대한 창끝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설유진은 달리는 블랙 가디언 세단의 조수석에 앉아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차갑게 식은 유리창을 통해 엔진의 미세한 진동이 관자놀이로 전해졌다. 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백미러를 응시했다.


거울 속에는 대리석처럼 창백하게 질린 안색의 여자가 서늘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극심한 빈혈과 부정맥으로 인해 피부는 거의 투명해 보였고, 오직 입술만이 핏기를 머금은 듯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녀린 목덜미 위에는 백이준이 아침에 새겨놓은 선명한 손자국 피멍 자국이 시퍼렇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지독한 소유욕과 살기가 남긴 낙인이었다.


유진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약지에서 영롱하고 차가운 푸른빛을 발산하는 3캐럿 블루 다이아몬드 위성 GPS 추적 반지가 보였다. 이 반지는 그녀의 체온과 실시간 위치를 24시간 내내 백이준의 스마트폰으로 전송하고 있다. 사저 반경 1km를 벗어난 지금, 이준의 단말기에는 그녀의 가평행 이동 경로가 붉은 점으로 실시간 표시되고 있을 터였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이번 외출은 이준의 목숨줄을 쥔 약사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동시에 아수라의 손아귀에 갇힌 남동생 민우를 구하기 위한 첫 번째 전술적 포석이었으니까.


“설유진 씨.”


운전대를 잡은 한도현의 낮고 과묵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의 시선은 전방의 안개 낀 도로를 고시하면서도, 백미러를 통해 끊임없이 유진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안색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도현 씨. 익숙한 통증이니까.”


유진은 차분하게 대꾸하며 가운 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유리 실린더의 감각. 사용 완료되어 비어 있는 ‘피닉스 응급 해독 주사기’였다. 그것은 유진이 이준의 잔혹한 독배 시험을 버텨내고 살아남았음을 증명하는 승리의 전리품이자, 가문의 비방 기술이 담긴 비장의 카드였다. 유진은 실린더를 만지며 이성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세관 공무원 서동민이 최이사의 매수를 받고 우리가 정식 수입하려던 약초 종자들의 통관을 고의로 보류시켰습니다.”


도현이 조용히 상황을 보고했다.


“공식적인 루트로는 오렐리아의 원종을 구할 방법이 막힌 셈입니다. 최이사는 지금쯤 설유진 씨가 온실 오염 사태로 보스의 손에 처형당했을 거라 믿고 축배를 들고 있겠지요.”


“그 축배가 독배가 되도록 만들어 줘야죠.”


유진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차갑게 올라갔다.


“서동민이 통관을 막았다면, 우리가 직접 야생의 군락지로 들어가 채취하면 그만입니다. 최이사가 파놓은 덫이 가평의 설산에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요.”


도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유진이 자신의 은인인 설재희 교수의 딸임을 알고 그림자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준 앞에서는 충직한 사냥개로 군임하지만, 유진에게만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의 동생을 구출하겠다고 맹세한 든든한 방패였다.


세단은 이윽고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가평 산맥 해발 800m 군락지 초입에 도착했다.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로 난 험준한 임도는 폭설로 인해 완전히 폐쇄되어 있었다. 차가 멈춰 서자, 침엽수림의 어둠 속에서 등산복 차림에 흙 묻은 등산화를 신은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종자 밀수꾼, 박도식이었다.


“어이구, 도현 대장님! 진짜로 오셨네. 이 폭설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 험한 군사 통제 구역을 오겠다는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만.”


도식은 툴툴거리면서도 도현의 묵직한 살기에 눌려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도현의 뒤에 선 유진에게 머물렀다. 창백한 가운 차림의 유진을 보며 도식은 미묘한 호기심을 보였다.


“이 가녀린 아가씨가 그 전설적인 독초 종자를 캐겠다는 약사요? 제정신이 아니구만. 해발 800m 고지대는 지금 칼바람이 불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요. 군 감시 카메라도 피해야 하고, 잘못 발을 디디면 그대로 벼랑 밑으로 수장되는 지옥 같은 곳이라고.”


“돈은 원하는 만큼 지불하겠다고 했을 텐데요, 박도식 씨.”


유진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위기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우리는 가평 재배림의 오리지널 약초 종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저 군 감시망의 사각지대를 통해 군락지 입구까지 우리를 안내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참견은 사양하죠.”


도식은 유진의 기백에 움찔하며 콧등을 긁었다.


“어이구, 독한 아가씨네. 좋소. 돈만 준다면야 지옥의 독초라도 캐다 주는 게 내 일이니까. 대신 내 뒤를 바짝 따라붙으시오. 조금이라도 처지면 눈 속에 파묻혀 시체로 발견될 테니.”


도식의 안내에 따라 세 사람은 통제 구역의 철조망을 넘어 가평 산맥의 깊은 숲속으로 진입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깊은 눈과 빽빽하게 우거진 침엽수림이 그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해발 800m 능선에 도달할수록 바람은 칼날처럼 매서워졌다.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유진은 가벼운 기침을 터뜨렸다. 조제 과정에서 누적된 독성 가스의 부작용인 독성 누적 손상으로 인해 호흡기 점막이 서서히 손상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설유진 씨, 제 손을 잡으십시오.”


도현이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으나,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내 발로 걷겠어요. 기온이 낮아질수록 야생 오렐리아의 종자는 생존을 위해 독성 포자를 스스로 응축시킵니다. 내 후각으로 그 미세한 성분을 찾아내야 해요.”


유진은 초감각적 독소 후각을 극도로 가동했다. 눈 밑에 파묻힌 야생 식물들의 냄새가 비강을 스쳤다. 차가운 흙 냄새, 얼어붙은 솔잎의 향, 그리고 그 사이로 미세하게 풍겨오는 타들어 가는 듯한 구리와 아몬드 향의 독소 잔해 냄새.


‘있다. 이 근처야.’


유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목의 뿌리 아래 쌓인 눈을 손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거친 얼음 조각들이 하얀 손가락 끝을 긁어 미세한 상처를 남겼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식은 혀를 내둘렀다.


“진짜 독종이네. 저 눈더미 속에서 냄새만으로 약초를 찾아내다니, 괴물이 따로 없구만.”


그때였다.


묵묵히 주변을 경계하던 도현의 귀에 꽂힌 비공식 위성 무전기에서 지익, 지이익— 하는 날카로운 노이즈가 발생했다. 도현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단순한 산악 지대의 전파 방해가 아니었다. 군용 무선 주파수를 강제로 교란할 때 발생하는 인위적인 간섭 신호였다.


도현이 신속하게 권총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유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설유진 씨, 멈추십시오. 무언가 이상합니다.”


“왜 그러죠, 도현 씨?”


“무전 신호에 이상 간섭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외에 이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는 침입자가 이 구역 내에 잠복해 있다는 뜻입니다.”


도현의 경고에 도식은 사색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뭐라고? 침입자라니! 이 눈보라 속에 군인들도 안 다니는 통제 구역인데 누가 온단 말이오?”


“최이사가 보낸 살수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은…… 아수라의 놈들이거나.”


도현의 음성이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침엽수림의 고요함이 기괴할 정도로 무겁게 그들을 짓눌렀다. 바람 소리조차 멈춘 듯한 침묵 속에서, 유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목덜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앙—!


고요한 설산의 공기를 찢는 날카롭고 묵직한 총성이 사방으로 메아리쳤다.


“으악!”


비명과 함께 도식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지대에 잠복해 있던 아수라의 일류 살수 사마 준의 초탄 저격이었다. 총탄은 도식의 어깨를 스치며 그가 메고 있던 특수 약초 보존 배낭을 정확히 관통했다. 배낭이 박살 나며 내부의 장비들이 눈밭 위로 흩어졌다.


“저격수다! 엎드려!”


도현이 호통을 치며 유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는 초인적인 반사 신경으로 유진의 몸을 덮치듯 밀쳐내며, 거대한 두께의 고목 기둥 뒤로 그녀를 엄폐시켰.


동시에 도현의 왼손에서 철컥 소리와 함께 휴대용 특수 방탄 방패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지며 유진의 전면을 완벽히 방어했다.


피격당한 도식은 눈밭 위를 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살려줘! 내, 내 배낭이! 총 맞았어! 저 자식들 진짜로 쏘잖아!”


도현은 냉정하게 주변 지형을 분석했다. 저격의 궤적과 탄도를 미루어 볼 때, 적은 최소 300m 거리의 북동쪽 고지대 능선 위에서 조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사마 준의 백발백중 저격술이었다.


하지만 이준의 철저한 지령을 받은 사마 준의 저격 각도는 이상하게도 유진의 머리가 아닌, 그녀의 발끝과 엄폐물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죽이려는 게 아니다. 생포하려는 거다.’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현의 방패 너머로 떨어지는 눈가루를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그녀의 이성은 오히려 차갑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적들의 목적은 유진 자신의 납치와 조제 공식의 탈취. 그렇기에 사마 준은 그녀를 즉사시키지 않고 도주 경로만을 차단하고 있었다.


“도현 씨, 적들의 저격 각도가 낮아요. 날 죽이려는 게 아니라 다리를 묶어 생포하려는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도현이 무광 흑색의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격수가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는 한, 우리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눈보라가 더 거세지기 전에 위치를 이탈해야 합니다.”


도현이 품속에서 연막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타아앙—!


두 번째 총성이 설산을 다시 한번 진동시켰다. 이번 탄환은 도현의 방패 표면을 비껴가 유진이 기대고 있던 고목의 기둥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콰드득! 하는 기괴한 균열음과 함께 유진의 바로 옆 나무 기둥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날카로운 나무 파편과 하얀 눈 가루가 유진의 투명한 뺨과 이마 위로 사정없이 흩날렸다.


“설유진 씨!”


도현의 절박한 외침이 비바람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유진의 뺨 위로 파편에 긁힌 미세한 핏방울이 차가운 눈 위로 붉게 떨어져 내렸다. 사선에 갇힌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벼랑 끝의 사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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