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가시 울타리
액정 너머로 전송된 사진은 지독하게 선명했다. 창백하게 질린 설민우의 손목에 감긴 시퍼런 쇠사슬, 그리고 그 뒤로 어른거리는 음습한 영등포 지하 창고의 콘크리트 벽. 동생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아수라의 행동대장, 박만수의 목소리는 대포폰 스피커를 통해 고스란히 유진의 고막을 긁어내렸다.
“똑똑히 들어, 설약사. 네 놈이 살 길은 하나뿐이야. 골든 크라운의 심장부, 백이준의 성북동 사저로 들어가라. 그 괴물 놈의 전담 독약 제조사 자리를 꿰차는 거야. 허튼짓할 생각은 마라. 일주일에 한 번씩 그놈의 건강 상태와 사저 내부 정보를 넘기지 않으면, 다음번엔 네 동생의 손가락이 하나씩 배달될 테니까.”
협박은 간결했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설유진은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는 신림동 옥탑방 마당에서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목에 걸린 은제 안개 분무기 펜던트의 차가운 감각만이 그녀의 유일한 현실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자 가문의 마지막 유산인 그 은빛 금속은, 미세한 화학 물질을 감지하면 색이 변하는 특수한 성질을 품고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이성을 수치화했다.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시간은 없었다. 동생을 살리려면, 그 괴물의 소굴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목숨줄을 쥐는 수밖에 없었다.
***
서울 성북동 산자락 깊숙한 곳. 빽빽한 대나무 숲길을 지나 나타난 백이준의 사저는 고풍스러운 한옥과 거대한 현대식 양옥이 기이하게 뒤섞인 요새였다. 높이 솟은 담벼락 위에는 열감지 CCTV가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고, 정문 앞에는 검은 수트를 입은 성북동 사저 경비대원들이 삼엄한 살기를 풍기며 버티고 서 있었다.
“신원 확인하겠습니다. 가방 내려놓으시고 양팔 벌리십시오.”
사저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군 특수부대 출신의 경비대원들이 유진을 가로막았다. 차가운 금속 탐지기가 그녀의 몸을 거칠게 훑어내렸다. 가녀린 몸에서 나올 무기가 없음을 확인한 경비원이 유진의 목에 걸린 은제 펜던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도 압수입니다. 사저 내부에 허가되지 않은 금속 장신구는 반입 금지입니다.”
“어머니의 유품입니다.”
유진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경비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 속에서 오직 그녀의 검은 눈동자만이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순한 은제 장식일 뿐입니다. 정 못 믿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성분 분석기를 가져와 검사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걸 빼앗긴다면, 저는 이 저택의 문턱을 넘지 않겠습니다. 백이준 씨의 마비를 치료할 약사도 필요 없어지겠지요.”
경비원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일개 인질로 들어온 약사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하고 이성적인 태도였다. 그들의 대치 상황을 깨뜨린 것은 안쪽에서 걸어 나온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만두게.”
단정하게 다듬어진 정장 차림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 사저의 살림과 인력을 총괄하는 김 집사였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경비원들에게 손짓했다.
“보스께서 기다리신다. 들여보내라. 단, 펜던트는 매일 아침 보안실에서 정밀 검사를 거칠 것이다.”
유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그녀는 머릿속으로 정문의 경비원 수, CCTV의 사각지대, 그리고 방금 통과한 이중 보안문의 개폐 주기를 정밀하게 계산해 기록해 두었다. 사저 감금의 굴레가 그녀의 발목을 묶었지만, 이성은 오히려 더 날카롭게 작동하고 있었다.
김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대저택의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갈 때였다. 저택 내부의 공기는 기이할 정도로 무겁고 차가웠다. 유진의 코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문의 가혹한 훈련으로 다듬어진 그녀의 초감각적 독소 후각이 공기 중에 잔류한 미세한 냄새를 잡아냈다.
‘이 냄새는…….’
오존의 비릿함 뒤에 숨겨진, 타들어 가는 구리와 달콤한 아몬드의 향. 일반인이라면 결코 인지하지 못할 0.01% 이하의 극미량이었지만, 유진은 즉각 판별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향료가 아니었다. 뇌척수 신경망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세포를 괴사시키는 지한성 신경마비 독소의 흔적이었다.
‘백이준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독소의 잔해인가. 그렇다면 소문대로 그 괴물은 매 순간 뼈가 으스러지는 마비 통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유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 냄새의 농도로 보아, 그 독소는 인위적으로 설계된 합성 변이 독물임이 틀림없었다. 이 지독한 요새의 보스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고, 동시에 상상 이상으로 망가져 있는 존재였다.
“여기가 설약사가 머물 방입니다.”
김 집사가 복도 끝의 무거운 목조 문을 열며 차갑게 경고했다.
“보스의 허락 없이는 이 방과 지하 온실 외의 구역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외부와의 모든 연락은 통제되며, 인터넷이나 개인 통신 장비의 사용은 엄격히 금지됩니다. 만약 탈출을 시도하거나 사저 내부의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려는 정황이 포착될 경우, 경비대의 즉각적인 처단이 있을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유진은 차분하게 대답하며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문이 무겁게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금속음이 방 안을 울렸다. 완벽한 감금이었다.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유진은 주저앉아 울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고, 즉시 방 안의 환기구 구조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경비원들의 순찰 동선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슴 안쪽에 숨겨둔 동생의 펜던트를 만지며 그녀는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이 저택의 심장부로 들어가 비밀 장부를 해독하고, 민우를 구해내겠노라고.
그때였다. 고요하던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유진의 척추를 타고 소름 끼치는 한기가 흘러내렸다.
복도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묵직하고 규칙적이며, 어딘가 미세하게 한쪽 발을 끄는 듯한 무거운 구두굽 소리. 그 발걸음 소리가 유진의 방 문 앞을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저택 전체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살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숨을 죽인 채 잠긴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차가운 금속 문고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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