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칼날과 가문 사전
나선형 계단은 유일한 출구였고, 핀레이 관장의 램프 불빛은 이미 아리아가 숨어 있는 서가 모퉁이의 바닥을 천천히 비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노란 불빛이 대리석 바닥을 따라 길게 늘어지며 그녀의 로브 자락 끝을 스치기 직전, 아리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 엘레나의 감정 통제 명상법을 끌어올렸다.
‘은빛 유리벽을 세운다. 내 숨소리도, 마력의 미세한 흐름도 이 어둠 속에 완전히 동화된다.’
심장 박동이 극한으로 가라앉으며 신체의 대사마저 멈춘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아리아는 왼손끝을 튕겨 미세한 마력 파동을 반대편 서가 모퉁이로 날려 보냈다.
툭.
가벼운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침묵을 깼다. 핀레이 관장의 고개가 즉각 그 방향으로 돌아갔고, 노란 램프 불빛 역시 아리아의 사각지대를 벗어나 소리가 난 곳을 비추었다. 그 찰나의 틈을 타 아리아는 몸을 날렸다. 유클리드 교수가 일러주었던 비밀 통로, 즉 소포르궁과 연결된 고대 회랑의 숨겨진 석문 앞으로 신속하게 이동한 그녀는 품속의 은빛 출입증을 벽면의 음각 홈에 밀어 넣었다.
스르륵.
소리 없이 열린 석문 안으로 몸을 던진 아리아는 간신히 금서고의 삼엄한 감시망을 탈출할 수 있었다. 비밀 회랑을 빠져나와 황궁 외곽의 차가운 밤 공기를 마셨을 때, 그녀의 전신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른손끝은 여전히 굳어 감각이 없었고, 귀에서는 삐-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을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안도할 시간은 없었다. 아리아는 품속에 단단히 숨긴 가죽 수첩, 대현자 알베리히의 일지 필사본을 로브 안쪽으로 다시 한번 고쳐 쥐었다. 이것은 황제의 저주를 풀 유일한 열쇠이자, 동시에 발각되는 즉시 가문 전체를 단두대로 보낼 수 있는 치명적인 물증이었다. 아리아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수도 아스가르드의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에르하르트 남작 저택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수도의 밤거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안개에 가려 흐릿한 주황색 얼룩처럼 번져 보이는 골목길. 아리아가 남작 저택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름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스산한 밤바람을 타고 기묘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벅, 저벅.
무겁고 축축한 장화 소리가 골목 앞뒤에서 동시에 울렸다. 아리아는 즉각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경계했다. 안개 속에서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는 세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화려하지만 때가 찌든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살벌한 철퇴와 단검을 쥐고 있었다.
“이 밤중에 몰락 영애께서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실까?”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비열한 목소리로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탐욕스럽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소매 속에서 굳어버린 오른손을 가만히 숨겼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거지?”
“역시 똑똑하군, 남작 영애. 지하 감옥의 바락 소장님께서 네가 아주 귀한 사전을 가지고 있다고 하시더군. 에르하르트 가문의 유일한 밥줄이자 비전이 담긴 사전 말이야.”
사내가 한 걸음 다가서며 철퇴를 바닥에 질질 끌었다. 거친 쇳소리가 골목길의 정적을 잔인하게 찢었다.
“사전을 넘겨라. 순순히 넘기면 네 아비가 감옥에서 고통 없이 굶어 죽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마. 하지만 거절한다면, 내일 아침 네 아비의 손가락 마디가 하나씩 잘려 나간 채 네 집 앞으로 배달될 것이다.”
바락 소장. 그 비열한 부패 관료가 결국 아버지를 인질로 가문의 마지막 남은 유산인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을 갈취하려 덫을 놓은 것이었다. 아리아의 가슴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가 끓어올랐다. 가문의 비전 사전이 저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황제의 악몽을 해독하는 주술적 비밀이 태후 세력에게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코 내줄 수 없었다.
스윽.
사내가 아리아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비린내 나는 숨결이 뺨에 닿는 순간, 아리아는 로브 안쪽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남동생 시온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쥐여주었던 ‘은탄환 호신용 권총’의 차가운 금속 그립이 손끝에 닿았다.
‘지금 쏘아야 해.’
하지만 골목길을 가득 메운 기묘한 주술적 안개가 아리아의 흐릿한 시야를 완전히 방해하고 있었다. 1단계 침식 부작용으로 인한 이명과 현기증까지 겹치며 초점이 흔들렸다. 단 한 발뿐인 은탄환을 빗맞춘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터였다. 아리아는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필사적으로 타이밍을 노리며 숨을 죽였다.
“순순히 내놓지 않겠다면, 직접 몸을 뒤져서 빼앗는 수밖에!”
사내가 사납게 웃으며 아리아의 로브를 찢으려 손을 뻗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쉭-!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눈부신 은빛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완벽한 은신 상태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아아아악!”
아리아의 멱살을 잡고 있던 사내의 비명이 골목길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사내의 손목이 잘려 나가며 검붉은 피가 안개 속으로 비산했다. 사내는 잘린 손목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누구냐!”
놀란 졸개들이 무기를 치켜세우며 사방을 경계했다. 안개 속에서 잿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청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한 검은 가죽 가죽옷을 입고, 부러진 검날을 개조한 날카로운 단검을 쥔 사내. 아리아의 남동생이자 뒷골목 정보상으로 암약하던 시온 에르하르트였다.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거지, 이 더러운 사냥개들이.”
시온의 목소리는 평소의 능글맞은 장난기가 완전히 거세된 채,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에 서린 살기가 졸개들의 기세를 단숨에 제압했다.
“시온…….”
아리아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온은 누나의 찢어진 로브 깃과 창백한 안색을 확인하고는 이빨을 드드득 갈았다.
“누나, 뒤로 물러서 있어. 이 버러지들은 내가 청소할 테니까.”
“조심해, 시온. 바락이 보낸 자들이야. 무기를 조심해!”
불량배의 대장이 잘린 손목을 부여잡은 채 졸개들에게 소리쳤다.
“죽여! 저 쥐새끼 같은 년놈들을 당장 찢어 죽여라!”
졸개 한 명이 무거운 사설 철퇴를 허공으로 크게 휘두르며 시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철퇴가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골목 벽면을 흔들었다. 정면으로 맞선다면 뼈가 산산조각 날 위력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무모하게 힘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는 적들의 숫자가 많고 골목이 좁다는 지리적 한계를 역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철퇴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직전, 시온은 가벼운 단검 무빙으로 상체를 비틀어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우회했다.
쾅!
철퇴가 바닥의 돌바닥을 강타하며 불꽃을 뿜어냈다. 그 반동으로 졸개의 자세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찰나, 시온은 골목길의 좁은 지리를 이용해 옆 벽면을 강하게 딛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슉, 슉!
가문의 비전인 유엽검술의 날렵한 쾌검 합이 허공을 수놓았다. 시온의 단검이 졸개의 무릎 관절과 어깨 힘줄을 정확하게 그어 내렸다. 졸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이 자식이!”
남은 한 명의 졸개가 단검을 쥐고 시온의 등 뒤를 기습하려 했다. 아리아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공포의 색채 감지 스킬을 가동했다. 기습하려는 졸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열한 보랏빛 살기가 선명하게 읽혔다.
“시온, 오른쪽 뒤 3걸음!”
아리아의 단호한 경고가 떨어짐과 동시에, 시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회전시키며 단검을 투척했다.
퍽!
정확하게 졸개의 목덜미에 꽂힌 단검의 충격으로 졸개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마지막 남은 대장이 잘린 손목을 움켜쥔 채 도망치려 했으나, 시온은 번개 같은 속도로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목덜미에 차가운 검날을 들이밀었다.
“바락 소장이 보낸 자들이 전부냐? 아니면 배후에 다른 놈이 더 있나?”
시온의 서늘한 질문에 대장은 공포에 질려 사들사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 소장님이 전부다! 가문의 사전을 가져오면 큰돈을 주겠다고 하셔서…… 힉!”
시온은 망설임 없이 검날을 그어 대장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세 구의 시신이 차가운 안개 속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시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아리아에게 다가왔다.
“누나,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시온. 네가 제때 와주었어.”
아리아는 마비된 오른손을 숨기며 나직하게 답했다. 시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객들의 시신을 뒤져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바락 소장의 비리가 황궁 내부까지 촘촘히 엮여 있는 상황에서, 단순한 불량배들의 습격으로 끝날 리가 없다는 본능적인 의구심 때문이었다.
시온이 죽은 대장의 가죽 품안을 헤집던 순간, 그의 손끝에 기묘하게 차갑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물체가 걸려들었다.
“……이건?”
시온이 품속에서 꺼내 올린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기괴한 검은색 광물 결정이었다. 달빛조차 빨아들이는 듯한 칠흑 같은 표면 위로, 핏빛의 미세한 룬 문자들이 기괴하게 요동치며 안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의 하단에는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교한 태후궁 고유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검은 눈물의 결정…….”
아리아는 그 결정을 마주하는 순간, 귀에서 울리는 이명이 폭발하듯 강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것은 밤마다 소포르궁 침전에서 황제 카이젠의 영혼을 좀먹고 미치게 만들던, 악몽 저주의 진짜 물리적 매개체였다.
시온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황궁 깊은 곳에만 존재해야 할 저주의 결정이…… 어째서 뒷골목 불량배의 품에서 나오는 거지? 설마 이 사악한 결정이 이미 황궁 밖 암시장에서도 은밀히 유통되고 있었던 건가?”
황제의 정신을 갉아먹는 저주의 근원이 이미 황궁의 장벽을 넘어 수도 아스가르드의 지하 세계 전체로 깊숙이 뻗어 나가고 있다는 가혹한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