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고의 붉은 사슬을 풀다
하인츠의 거친 손가락이 가죽 수첩의 모서리에 닿는 순간, 아리아의 은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며 깃펜을 쥔 왼손이 움직였다.
탁!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깃펜의 깃털 끝이 하인츠의 손등을 정확하게 때려눕혔다. 물리적인 타격은 약했으나, 아리아가 왼손끝에 미세하게 실어 보낸 정신 마력의 파동이 하인츠의 손등 신경을 찌릿하게 자극했다. 하인츠는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아윽! 이, 이 천박한 년이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것이냐!”
하인츠가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움켜쥐며 사납게 눈을 부릅떴다.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릴리는 겁에 질려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아리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손의 마비 증세를 숨기기 위해 로브의 넓은 소매 안으로 오른손을 단단히 밀어 넣은 채, 오직 왼손으로 가죽 수첩을 부드럽게 덮어 품속으로 밀어 넣었다.
“상급 번역관님, 황실 번역청 조례 제12조를 잊으셨습니까?”
아리아의 목소리는 고요하고도 차가웠다. 집무실의 쾌쾌한 종이 먼지 사이로 그녀의 단호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번역청에 소속된 모든 번역관의 개인 연구 자료와 필사 노트는 ‘황실 지적 재산 보호령’에 의거하여 황제 직속의 보안 문서로 취급됩니다. 수석 경쟁자라 하실지라도, 정식 수색 영장이나 행정관님의 공식 서명이 없는 한 타인의 노트를 무단으로 검열하거나 강탈하려는 행위는 명백한 황실 법률 위반입니다. 이를 어길 시 즉각 감봉 및 직위 해제 처분을 받게 됨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이, 이 교활한 년이……!”
하인츠가 이빨을 갈았지만, 아리아는 그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아치며 말을 이어갔.
“게다가 하인츠 님께서 조금 전 원로원에 제출하려 하셨던 영토 조약서의 치명적인 라틴어 격변화 오역 사건을 상기해 보십시오. 만약 제가 지금 당장 이 조약서의 원본과 오역본을 황제 폐하의 비서실에 직접 고발한다면, 과연 재상 벨리알 가문이 폐하의 진노로부터 하인츠 님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그 순간, 하인츠의 뒤에 서 있던 행정관 에르스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국경 세금 징수권이 걸린 외교 문서를 오역한 채 원로원에 넘기려 했다는 사실이 황제 카이젠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하인츠뿐만 아니라 예산 결재를 승인한 에르스트 자신의 목줄도 날아갈 터였다. 에르스트가 급히 하인츠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하, 하인츠 번역관! 그만두시오. 신입 번역관의 사소한 연구 노트를 가지고 이렇게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지 않소. 어서 오늘 오후 원로원 제출용 조약서의 격변화 수정 작업이나 서두르시오!”
“에르스트 님! 하지만 저 년의 수첩에 새겨진 문양들이 명백히 수상……!”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요!”
에르스트가 낮게 호통을 치자, 하인츠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아리아를 쏘아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굴욕감과 함께 호시탐탐 그녀의 약점을 잡아 파멸시키겠다는 살벌한 독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인츠는 붉게 물든 손등을 털어내며 쉭쉭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아리아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로브 소매 안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마비 증세가 다시금 찌릿한 통증과 함께 손끝을 타고 올라왔고, 귀에서는 이명이 희미하게 울렸다. 번역청 내부의 감시와 시기가 생각보다 훨씬 집요했다. 황제의 악몽을 해독한 공식이 적힌 이 가죽 수첩을 번역청이나 저택에 보관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가장 안전하고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장소에 숨겨야 했다.
‘황실 금서고 지하 3층.’
그곳은 고대 금지된 주술 서적들이 붉은 마력 사슬에 묶여 봉인된 어두운 방이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그 깊은 심연이야말로 가죽 수첩을 숨기고, 동시에 카이젠의 악몽 저주를 완전히 해체할 결정적 단서인 ‘대현자 알베리히의 일지’를 찾아낼 유일한 장소였다.
***
밤이 깊어지자, 발할라 제국의 수도 아스가르드는 칠흑 같은 어둠과 차가운 안개 속에 잠겼다.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은 사라지고, 황궁의 회랑들은 기괴한 고딕풍 장식들과 흔들리는 횃불 그림자만이 가득한 침묵의 미로로 변해 있었다.
아리아는 소포르궁의 비밀 침전으로 향하기 전, 은밀히 황실 도서관의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 11시경, 도서관의 거대한 석조 외벽은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전에 약조한 대로, 도서관의 늙은 청소부 프리다가 야간 순찰 기사들의 눈을 피해 뒷문의 무거운 자물쇠를 살짝 열어두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덕분이었다. 프리다는 과거 아리아의 부친 레오파드 남작에게 목숨을 빚진 은혜를 잊지 않고 묵묵히 아리아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끼이익.
아리아는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도서관 내부로 스며들었다. 거대한 돔형 천장 아래 수만 권의 고서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마르고 매캐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는 품속에서 유클리드 교수에게 전달받은 은빛 금속 패, ‘황실 금서고 출입증’을 꺼내 쥐었다. 교수가 그녀의 학술적 깊이를 보증하며 건네준 이 출입증이야말로 지하의 삼엄한 결계를 돌파할 유일한 통행증이었다.
도서관 중앙의 거대한 나선형 계단을 지나,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지하 1층과 2층을 지나갈 때마다 공기는 점점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마침내 두꺼운 철문이 가로막은 지하 3층 입구에 도달했다. 아리아는 숨을 가다듬고 은빛 출입증을 문가에 서 있는 마법 석상의 이마에 가볍게 접촉했다.
웅 웅 웅.
석상의 감겨 있던 돌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며 푸른 마력의 빛을 뿜어냈다. 이윽고 거대한 철문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열리며,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황실 금서고 지하 3층의 실체가 드러났다.
“……!”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서고 내부의 조도는 지극히 낮았고, 오직 서가들을 칭칭 감고 있는 ‘붉은 마력 사슬’들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붉은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흑마법의 살기가 아리아의 얇은 정신 장막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귀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고막을 찔렀다.
‘금서고 지하 3층 열람 금기.’
아리아는 유클리드 교수에게 들었던 가혹한 보안 규칙을 되새겼다. 이 금서고의 사슬들은 침입자의 물리적 접촉이나 철제 도구의 사용에 즉각 반응하여 경보 주술을 발동시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책을 꺼내거나 사슬을 풀기 위해서는 일체의 도구를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미세한 정신 마력만을 손가락 끝에 실어 사슬의 매듭에 각인된 룬 문자를 해제해야만 했다. 단 한 치의 오차라도 발생하면 경보가 울려 즉각 이단 주술 절도죄로 현장에서 체포될 터였다.
월, 월!
그때, 멀리 서고 깊은 곳에서 침입자의 미세한 마력 흔적을 감지한 마법 탐지견의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소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제한 시간은 길어야 10분 남짓이었다.
아리아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가슴속 엘레나의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를 꽉 쥐었다.
‘내 마음속에 단단한 은빛 유리벽을 세운다. 외부의 공포도, 이명도 나를 흔들지 못한다.’
그녀는 소매 안에서 마비된 오른손을 꺼내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아주 미세하고 투명한 정신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신비로운 은빛 주파수로 떨리며 사슬을 묶고 있는 고대 룬 문자의 변형 패턴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룬 문자 변형 패턴 분석법.’
사슬의 매듭 중앙에 새겨진 불길한 붉은 룬 문자 ‘라드(Rad)’가 왜곡되어 움직이는 주기가 아리아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기하학적 수식으로 도식화되었다. 그녀는 철제 도구 대신 자신의 은빛 미세 마력을 정밀한 바늘처럼 벼려 사슬의 매듭 틈새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스스스스.
아리아의 손가락 끝이 닿자, 사납게 요동치던 붉은 마력 사슬들이 일시적으로 정화의 주파수에 길들여지며 스르륵 풀려 내렸다. 경보 결계가 울리지 않는 완벽한 지적 잠입이었다. 사슬이 풀린 서가 틈새에서, 아리아는 마침내 먼지 쌓인 검은 가죽 장정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대현자 알베리히의 악몽 해독 일지.’
책 표지에 새겨진 고대 제국의 룬 문자가 은은하게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숨이 멎을 듯한 전율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그 안에는 카이젠 황제의 악몽 속에 등장하는 기괴한 가시덩굴과 핏빛 괴수들의 공격 패턴이 단순한 환각이 아닌, 태후 오필리아의 흑주술 공식의 변형체임을 증명하는 해독 공식들이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탐지견의 발소리가 지하 통로 계단 위까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리아는 품속에서 철 촉이 없는 깃털 펜과 고대 룬 잉크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고대어 정밀 필사 수칙에 따라 한 획의 오차도 없이 일지의 핵심 정화 공식을 자신의 비밀 노트에 미친 듯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잉크가 양피지에 스며들 때마다 은빛 마력의 미세한 온기가 노트를 채웠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마지막 획의 필사를 완수하고 노트를 품속 깊은 곳에 안전하게 숨긴 순간, 서고 내부의 붉은 사슬들이 다시금 요동치며 원래의 자리로 감겨 들어갔다. 아리아는 은빛 출입증을 챙겨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고의 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탁, 탁, 탁.
그러나 채 세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지하 3층으로 내려오는 나선형 석조 계단 위쪽에서 무겁고도 위엄 있는 장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이어서 어둠을 가르는 노란 램프의 불빛이 지그재그 모양의 계단 벽면을 따라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금서고의 수장이자, 태후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도 황실의 모든 지식을 독점 관리하는 까다롭고 냉혹한 학자, 핀레이 관장의 무거운 발소리였다.
아리아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나선형 계단은 유일한 출구였고, 핀레이 관장의 램프 불빛은 이미 그녀가 숨어 있는 서가 모퉁이의 바닥을 천천히 비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