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된 단두대와 숨겨진 온기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던 소포르궁의 침전에 난생처음으로 이질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밤마다 황제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발기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비명도, 심장을 조여오던 검은 가시덩굴의 속박도 없었다.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는 듯한 극심한 두통에서 벗어나 몇 년 만에 완벽한 안식을 취한 카이젠 황제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이 그의 핏빛 눈동자에 닿았다. 늘 광증과 살기로 충혈되어 있던 눈동자가 기묘할 정도로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이젠은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손끝에서 요동치던 파멸의 마력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침전 안은 고요했으나, 어두운 벨벳 시트 한편에 흩뿌려진 붉은 선혈이 어젯밤의 가혹했던 사투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아리아 에르하르트. 그의 악몽을 대신 짊어지고 가시덩굴을 맨손으로 움켜쥐던 창백한 은빛의 여인. 그녀의 흔적은 붉은 핏자국과 미세하게 남아 있는 차가운 온기뿐이었다.
“폐하, 깨어나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난 늙은 시종장 기드온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평생을 황제의 곁에서 보좌해 온 노인은 카이젠의 맑은 안색을 확인하고는 감출 수 없는 경악과 안도감을 눈빛에 띄웠다.
“그 여자는 어찌 되었지?”
카이젠의 목소리는 평소의 쇳소리 대신 낮고 묵직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 기드온은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기묘한 미안함과 집착을 예리하게 포착하고는 더욱 정중하게 답했다.
“에르하르트 영애는 새벽녘에 침전을 빠져나갔습니다. 각혈 흔적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으나, 안색이 유령처럼 창백했고 오른손끝이 단단히 굳어 움직이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폐하의 수면 상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홀로 고통을 참으며 걸어갔습니다.”
카이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 유일한 안식을 선물하기 위해, 그 가냘픈 몸으로 영혼이 찢겨 나가는 통증을 온전히 감내한 것이다. 멱살을 잡고 목을 조르던 자신을 향해 단호한 이성으로 계약을 속삭이던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사면 서약서를 가져와라.”
카이젠의 명령에 기드온은 즉각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양피지 서류를 바쳤다. 아리아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아버지를 위한 면죄부였다. 카이젠은 자신의 검지 손가락 끝을 검기로 살짝 베어 흘러나온 핏방울을 황제의 옥새에 묻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가사면 서약서의 하단에 붉은 직인을 찍어 내렸다.
쿵.
서약서 주변으로 붉은 마법 사슬의 파동이 일며 계약의 마력이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제 에르하르트 남작의 단두대 처형은 공식적으로 유예되었으며, 지하 감옥에서의 잔혹한 고문 역시 즉각 금지될 터였다. 카이젠은 붉은 사슬의 열기가 스며든 서약서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단 하루라도 나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가문 전체를 처형하겠다 협박했으나…… 이제는 내가 그 여자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잠들 수 없게 되었군.”
황제의 입가에 기묘하고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구원자를 향한 애절한 갈망이자,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폭군의 집착이었다.
***
그 시각, 수도 외곽의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변두리. 몰락한 에르하르트 남작 저택의 낡은 철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아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며 자신의 오른손을 로브의 넓은 소매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이 얼어붙은 대리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귀에서는 여전히 날카로운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고막을 찔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폐부가 뒤틀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들켜서는 안 돼. 내가 약해진 모습을 보이면 시온과 가신의 흔들림이 더 커질 뿐이다.’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차가운 서리가 내린 정원을 지나 저택의 문을 열자, 낡았지만 깨끗하게 닦인 집사복을 입은 늙은 집사 토마스가 촛불을 든 채 마중을 나왔다.
“아,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토마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산이 압류당하는 비참한 와중에도 아리아의 연구 자료와 어머니 엘레나의 유품을 목숨 걸고 숨겨주었던 충직한 노인이었다. 아리아는 마비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토마스의 주름진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 토마스. 저택은 별일 없었나요?”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그보다 영애의 안색이 너무 창백하십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시온 도련님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안쪽의 작은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서자, 가죽 옷을 입은 날렵한 체구의 청년이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아를 닮은 잿빛 머리칼을 지닌 남동생, 시온 에르하르트였다.
“누나! 어떻게 된 거야? 황궁의 감시가 너무 삼엄해서 접근조차 할 수 없었어. 무사한 거지? 몸은 어디 다친 데 없고?”
시온이 급히 다가와 아리아의 양어깨를 살폈다. 아리아는 소매 속에 감춘 마비된 오른손이 들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벽난로의 온기를 쬐었다.
“무사해, 시온. 그리고…… 약속했던 것을 가져왔어.”
아리아는 왼손으로 로브 안쪽에서 황제의 피 묻은 옥새가 선명하게 찍힌 ‘황제의 가사면 서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 마법 사슬의 잔여 온기가 양피지 표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건…… 황제의 친필 서약서잖아! 누나, 정말로 그 폭군을 잠재운 거야?”
시온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렸다. 토마스 집사 역시 서약서를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가문의 몰락과 아버지의 처형이라는 벼랑 끝에서, 아리아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기적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단두대에 서지 않으실 거야. 특별 독방으로 이송되어 고문도 멈추겠지. 하지만 이건 임시 사면일 뿐이야. 재상 벨리알과 태후 오필리아가 가문에 씌운 반역 누명을 완전히 벗기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아리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그녀는 벽난로 불빛에 비친 자신의 머리칼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잿빛 머리칼의 끝이 창백한 은빛 백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마력을 과도하게 소모해 영혼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비극적인 징후였다.
“누나, 머리색이 왜 그래? 그리고 왜 오른손은 계속 소매 속에 숨기고 있는 거야?”
예리한 기사 지망생이자 정보상인 시온이 아리아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다가왔다. 아리아는 다급히 소매를 여미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황궁의 차가운 밤바람을 오래 맞아서 기력이 조금 소해진 것뿐이야. 번역청에 첫 출근을 해야 하니 피로가 쌓여서 그렇겠지. 걱정하지 마, 시온.”
“하지만……”
“시온,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직접 만나 상태를 확인하는 거야. 이 서약서를 들고 황궁 지하 감옥으로 가야 해.”
아리아의 단호한 어조에 시온은 더 이상 캐묻지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토마스 집사는 가문의 복권 가능성을 보며 떨리는 손으로 아리아에게 따뜻한 감자 수프 한 그릇을 바쳤다. 비록 압류 딱지가 붙은 초라한 저택이었으나, 황궁의 차가운 대리석 침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가슴 저린 가족의 온기가 수프의 열기와 함께 아리아의 폐부를 채웠다.
***
몇 시간 뒤, 아리아는 에단 브란트 경의 비밀 호위를 받으며 황궁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피의 감옥으로 향했다.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죄수들의 비명 소리가 정신 감응 능력을 지닌 아리아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오른손의 마비는 은빛 박하 안약을 미량 복용하여 겨우 손가락을 까딱일 수 있을 정도로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감각은 둔했다.
특별 독방 회랑의 철문을 지나 아버지가 갇힌 곳으로 향하는 아리아의 앞을 거구의 사내가 가로막았다. 기름진 대머리에 가죽 제복을 입고, 채찍을 허리에 찬 비열한 인상의 사내. 지하 감옥 소장 바락이었다.
“오호, 이게 누구신가. 반역자 에르하르트 남작의 그 똑똑한 딸내미 아니신가?”
바락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아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몸에서는 탐욕스러운 검붉은색 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리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가사면 서약서를 바락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황제 폐하의 가사면 서약서입니다. 레오파드 에르하르트 남작의 처형은 유예되었으며, 즉각 고문을 중단하고 특별 독방으로 이송하라는 폐하의 어명입니다. 당장 아버지를 면회하게 해 주십시오.”
바락은 서약서 하단의 붉은 옥새 직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황제의 서약 마력이 깃든 진짜 서약서임을 확인한 그의 눈등에 순간적으로 초조함과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태후파의 돈을 받고 남작을 고문해 죽이려던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바락은 이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처형이 유예되었다라…… 확실히 황제 폐하의 직인이 맞군. 하지만 영애, 사법부의 최종 판결이 나기 전까지 남작은 여전히 내 감옥의 죄수야.”
그는 아리아의 어깨를 툭 치며 비틀거리는 그녀의 오른손 소매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처형은 미뤄졌으나 말이야…… 이 어둡고 습한 지하 감옥 안에서, 늙고 병든 아비가 굶어 죽거나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급사하는 것까지 막을 조항은 이 서약서 어디에도 없거든. 안 그런가?”
바락이 채찍 자루를 툭툭 치며 노골적으로 막대한 금화 뇌물과 가문의 비전 사전을 요구하는 협박을 던졌다. 아리아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인배 부패 관료의 야비한 추가 협박이, 그녀가 마주해야 할 황궁의 잔혹한 전장이 이제 겨우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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