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덩굴을 걷어내는 손길
머리 위로 떨어지는 괴수의 핏빛 칼날을 피하고 황제의 자아를 구출해야 한다.
콰아아아앙—!
귓전을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핏빛 대검이 대지를 내리쳤다. 아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정신체임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강타하는 충격파에 숨이 턱 막혔다. 대검이 스쳐 지나간 왼쪽 어깨 부근의 정신 장막이 검게 그을리며 acid처럼 타들어 가는 통증이 일어났다. 현실의 육체였다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을 파괴력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아리아는 울부짖는 괴수의 살기 속에서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눈앞의 괴수는 단순한 악몽의 피조물이 아니었다. 태후 오필리아의 주술과 카이젠 황제가 지닌 전쟁의 트라우마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저주의 핵. 그 괴수의 몸체 표면을 덮고 있는 불길한 붉은 문양들이 아리아의 눈에 기하학적인 도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3단계: 악몽 구조 해체.’
가문의 비전인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 표지 안쪽에서 보았던 고대 룬 문자의 변형 공식들이 아리아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저 기괴한 괴수의 움직임, 칼을 휘두르는 궤적, 그리고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는 모두 고대 룬 제국 ‘티르’의 멸망한 방언으로 이루어진 주술식이었다. 아리아의 ‘번역관의 눈’이 괴수의 목덜미와 가슴 관절 부근에서 붉게 진동하는 약점 룬 문자를 정확히 특정해 냈다.
‘배신과 파멸을 뜻하는 티르(Tir)의 변형 룬…… 저기가 핵이다.’
크어어어어어!
괴수가 다시 한번 대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피할 공간이 없었다. 사방에서 검은 가시덩굴들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아리아의 발목과 사지를 조여왔기 때문이었다. 정신 장막을 아무리 두껍게 쳐도 가시의 부식 성분은 사정없이 장막을 갉아먹었다. 단순한 방어만으로는 시간 제한 내에 황제를 살릴 수 없었다.
자신의 수명과 마력을 깎아내더라도 저주의 핵을 직접 타격해야만 했다.
아리아는 눈을 감고 대뇌의 연산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 암흑의 심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정신력을 은빛 마력의 실타래로 자아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아리아의 손끝에서 눈부신 은빛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정화의 룬 문자 ‘솔(Sol)’을 그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은빛 글자들은 어두운 심연의 조도를 단숨에 끌어올릴 만큼 성스러웠다.
“해체(Dismantle)되라……!”
아리아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치며 은빛 룬 문자를 괴수의 가슴을 향해 날렸다.
파아아아앙!
은빛 정화의 파동이 괴수의 붉은 약점 룬에 부딪히는 순간,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괴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약점 룬이 해체되자 괴수의 거구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관절들이 모래성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괴수가 소멸해가는 와중에도, 시체 더미 틈새에서 무릎을 안고 울고 있던 어린 카이젠의 자아를 조이고 있던 검은 가시덩굴들이 더욱 폭악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저주의 주술이 침입자의 정화를 감지하고 황제의 영혼을 완전히 부수어 함께 자폭하려는 것이었다.
“흐윽…… 추워…… 살려줘……”
소년의 모습을 한 카이젠의 영혼이 피를 흘리며 신음했다. 가시들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 때마다 황제의 현실 육체는 영원한 광증의 나락으로 떨어질 터였다.
아리아는 망설임 없이 소년 황제를 향해 달렸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은 가시들이 그녀의 반투명한 정신체를 사정없이 찔렀다. 어깨와 허벅지가 찢어지는 극심한 고통이 현실의 신경계를 타고 역류해 뇌를 흔들었지만, 아리아는 이빨을 악물고 버텼다.
마침내 소년의 앞에 도달한 아리아는 가장 굵고 검은 가시줄기를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치이이익!
가시의 독소가 아리아의 정신체 손바닥을 태우며 검게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말할 수 없는 비명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리아는 손에 쥐고 있던 힘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끝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정신체 피를 매개로 가문의 정화 마력을 폭발적으로 주입했다.
피의 계약으로 묶인 두 사람의 주파수가 하나로 공명했다. 아리아가 흘린 피의 정화력이 가시덩굴의 뿌리를 타고 흐르며 은빛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바스스스스…….
검붉은 저주의 가시덩굴들이 눈부신 은빛 모래 가루로 변하며 바스러져 내렸다. 황제의 심장을 조이던 끔찍한 억압이 한순간에 걷히는 순간이었다.
울고 있던 소년 카이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어 있던 그의 핏빛 눈동자에 처음으로 아리아의 은빛 실루엣이 온전히 담겼다. 그의 얼굴에 감돌던 지독한 광증과 살기가 온화하게 누그러지며, 차가운 전장이었던 무의식의 심연이 안개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정화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정화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키이이이잉—!
정화의 거대한 반동과 함께 아리아의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균열이 가며 뇌 신경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이명이 일어났다. 정신체가 강제로 산산조각 나며 현실의 육체로 튕겨 나가는 감각이 몰려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암전 속에서 아리아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듯 자신의 정신체를 보았다. 그녀의 잿빛 머리칼 끝자락이, 아주 미세하게 창백한 은빛 백색으로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헉!
아리아는 소포르궁 침전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번쩍 떴다.
“우욱, 콜록……!”
폐부가 뒤틀리는 고통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리아는 격렬한 각혈과 함께 침대 시트 위로 쓰러졌다. 입술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선혈이 어두운 벨벳 이불을 축축하게 적셨다.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과 함께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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