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전장의 첫 걸음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소포르궁의 깊은 침전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오직 구석에 놓인 거대한 괘종시계의 태엽 소리만이 심장의 박동처럼 무겁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어둠은 벨벳 커튼을 뚫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조차 집어삼킬 만큼 칠흑 같았다.
아리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목에는 방금 전 체결된 ‘피의 수면 계약서’가 남긴 붉은 사슬 모양의 흉터가 기묘한 열기를 뿜어내며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손끝을 찔렀던 은침의 상처에서는 아직도 미세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그녀의 옆에는 제국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밤마다 광증에 울부짖는 폭군 카이젠이 누워 있었다. 수면 부족으로 인해 그의 눈가는 붉게 짓물러 있었고, 조각 같은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성을 되찾았을 때의 서늘하고 오만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지금의 그는 고통에 신음하는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야수에 불과했다.
“……단 하루라도.”
카이젠이 잠꼬대처럼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허공을 헤매다 아리아의 가냘픈 오른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하지만 그 움켜쥔 완력만큼은 아리아의 뼈가 삐걱거릴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시작해야 해.’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차갑게 이성을 가라앉혔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이 남자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내일 새벽 아버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고, 에르하르트 가문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매장될 터였다. 그녀는 품에 소중히 품고 있던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의 감촉을 느끼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2단계: 수면 동조 및 정신 침투.’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읽었던 고대의 정신 감응 기술이 그녀의 신경계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눈을 감고, 카이젠의 손을 맞잡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은빛 마력을 미세한 바늘처럼 뾰족하게 벼려 쏘아 보냈다.
지직, 지지직.
두 사람의 피가 닿았던 손목의 서약 흉터가 붉은 빛을 내며 강렬하게 진동했다. ‘피의 정신적 동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순간, 아리아의 의식이 현실의 육체를 이탈해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심연 속으로 무섭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바람 소리와 함께 온몸의 감각이 비명을 질렀다. 암흑의 소용돌이 속을 얼마나 떨어졌을까. 마침내 발바닥에 차갑고 눅눅한 감촉이 닿는 것과 동시에, 아리아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
아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으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하다는 말조차 부족한 지옥 그 자체였다. 하늘은 핏빛 안개와 칠흑 같은 검은 연기로 뒤덮여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고, 발밑의 대지는 검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방에는 부러진 창검과 찌그러진 투구, 그리고 발할라 제국군 제복을 입은 군인들의 시체 더미가 끝없이 쌓여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녹과 구리 냄새, 그리고 시체가 썩어가는 악취가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정신체임에도 불구하고 구역질이 밀려올 정도로 생생한 감각이었다.
이곳이 바로 카이젠 황제의 내면, ‘무의식의 심연’이었다.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쌓인 황제의 참혹한 전쟁 트라우마와 피비린내 나는 기억들이 아스트랄 차원에 그대로 형상화된 공간. 그 거대한 공포의 파동이 폭풍처럼 밀려와 아리아의 얇은 정신 장막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아리아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타인의 무의식이 내뿜는 가혹한 고통의 무게가 그녀의 영혼을 통째로 으스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자칫 이 공포에 휩쓸려 자아를 잃어버린다면, 그녀는 현실의 육체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고 뇌가 녹아내려 폐인이 될 터였다.
그녀는 이빨을 악물며 마음속에 차가운 은빛 유리벽을 세우는 심상을 필사적으로 유지했다.
그때, 피비린내 나는 바람을 타고 나직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시체 더미가 성벽처럼 쌓인 광장 중앙에서 울려 퍼지는, 아주 작고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아리아는 홀린 듯 그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척척한 소리가 발밑에서 기괴하게 울렸다. 마침내 시체 더미의 그늘진 틈새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곳에는 몸집이 작은 어린 소년이 피 묻은 무릎을 안고 웅크려 울고 있었다. 흑발에 핏빛 눈동자. 비록 흙먼지와 피로 더러워져 있었지만, 소년의 얼굴은 분명 어린 시절의 카이젠 황제였다.
소년의 가슴팍에는 불길한 검은 가시덩굴들이 박혀 있었다. 가시덩굴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소년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고, 그 가시가 살을 파고들 때마다 소년의 몸에서 검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저것이…… 저주의 본질이구나.’
아리아는 직감했다. 황제의 영혼을 좀먹고 있는 저 검은 가시덩굴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친모인 태후 오필리아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했던 깊은 트라우마의 상징이자, 누군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사악한 흑주술의 물리적 실체였다.
아리아는 소년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스스스스.
그 순간, 소년의 심장을 찌르고 있던 검은 가시덩굴들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침입자의 은빛 마력을 감지한 저주의 주술이 방어 본능을 드러낸 것이다. 가시덩굴은 순식간에 수십 배로 팽창하며 뾰족한 가시날을 벼렸다.
슈우욱!
검은 가시들이 허공을 가르며 아리아의 정신체를 향해 뱀처럼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살상 의지가 가득 담긴 공격이었다.
“정화되라……!”
아리아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에서 외웠던 고대 정화의 주문을 크게 암송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공간을 지배하는 흑주술의 마력 농도가 너무도 짙은 탓에,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퍽!
피하지 못한 가시 하나가 아리아의 반투명한 왼쪽 어깨를 사정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윽!”
정신체에 가해진 타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뇌 신경을 타고 흐르는 극심한 통증이 그녀의 온몸을 강타했다. 어깨 부위의 정신체가 검게 그을리며 부식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몇 번 더 피격당한다면 영혼 자체가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가시덩굴들은 아리아가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그물을 짜듯 촘촘하게 뻗어 나오며 그녀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했다. 핏빛 안개 속에서 수백 개의 뾰족한 가시 끝이 아리아를 조준했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어. 이곳은 저들의 영토야. 그렇다면…….’
아리아는 머리를 쥐어짜며 이성적인 돌파구를 찾았다. 그녀는 에르하르트 사전에 기록되어 있던 가문의 비기, ‘꿈의 궤적 추적’ 공식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모든 주술은 일정한 마력의 흐름과 주기를 지닌다. 아무리 기괴하게 날뛰는 가시덩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움직이는 흑마법의 주파수에는 반드시 빈틈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아리아는 눈동자를 빛내며 날아오는 가시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첫 번째 가시가 왼쪽에서 날아오고 0.2초 뒤 두 번째 가시가 오른쪽에서 교차한다. 그 흐름의 결을 읽어내야 했다. 아리아는 날아드는 가시의 궤적을 예측하며 몸을 날렸다.
스윽, 스쳐 지나가는 가시날이 뺨을 스쳤지만 깊은 상처는 피했다. 그녀는 가시들이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사각지대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파고들며 날렵하게 무빙했다. 낡은 사전 속 고대 룬 문자의 기하학적 도식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나침반이 되어 길을 밝혀주었다.
그러나 가시의 숫자는 끝이 없었다. 소년 카이젠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가시덩굴들은 더욱 거대하게 뭉치며 장벽을 형성했다. 아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그녀의 등 뒤는 시체 더미와 검은 가시 장벽으로 꽉 막혀 있었다.
완벽한 포위였다.
현실의 소포르궁 침대 위에서, 아리아의 실제 육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을 단단하게 굳혔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갔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아리아는 절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방을 메운 검은 가시덩굴들이 일제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그리고 그 가시덩굴 너머, 핏빛 안개가 가장 짙게 소용돌이치는 심연의 틈새에서 거대한 어둠의 형상이 서서히 일어섰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녹슨 갑옷을 입고, 정체불명의 기괴한 주술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핏빛 대검을 손에 쥔 괴수였다. 괴수는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아리아를 내려다보았고, 그가 치켜든 대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피가 대지를 오염시켰다.
괴수가 서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벼락같은 속도로 아리아의 머리 위를 향해 핏빛 칼날이 사정없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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