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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계약과 구원자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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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라. 나를 일시적으로 진정시켜 안심시킨 뒤, 네가 얻고자 하는 진짜 대가가 무엇이지?”


카이젠 황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소포르궁의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아리아의 귓가를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목덜미를 움켜쥔 그의 손아귀는 여전히 으스러질 듯한 완력을 품고 있었고, 벼려진 칼날처럼 예리한 핏빛 눈동자는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볼 듯 집요하게 타올랐다.


두통이 가라앉아 이성을 되찾았음에도 폭군 특유의 잔혹한 경계심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거친 숨결이 아리아의 뺨에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목덜미를 짓누르는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가 아리아의 온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아리아는 숨이 막히는 공포 속에서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머릿속에서는 어머니의 유산인 ‘엘레나의 감정 통제 명상법’이 차갑게 작동하고 있었다.


‘흔들리지 마라. 내 마음속에 단단한 은빛 유리벽을 세운다. 폭군의 살기도, 의심도 이 벽을 넘어오지 못한다.’


심상 속에서 솟구친 은빛 유리벽이 그녀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했다. 비록 육체는 멱살이 잡힌 채 차가운 대리석 벽에 밀착되어 있었지만, 아리아의 회색 눈동자만큼은 얼음 호수처럼 고요하고 투명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애원하는 대신,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철저히 계약의 이득만을 제시하는 ‘폭군 조율 대화법’이었다.


“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폐하.”


“……아비?”


카이젠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내일 새벽, 단두대에서 참수형을 기다리고 있는 에르하르트 남작이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가문의 몰락을 막고 아버지를 살리는 것. 그것이 제가 목숨을 걸고 이 침전에 숨어든 유일한 이유입니다.”


카이젠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서늘한 냉소가 가득했다.


“대역 죄인의 딸이로군. 감옥에 갇힌 아비를 구하기 위해 황제의 침소에 잠입했다라…… 지극한 효심이구나. 하지만 내 이성이 돌아왔다고 해서 자비까지 베풀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벨리알 재상이 조작한 기소장이라 할지라도, 이미 원로원의 승인을 거친 법 집행이다. 일낱 몰락 영애의 기묘한 주술 따위에 내 제국의 법을 바꿀 성싶으냐?”


그의 손가락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목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에 아리아는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황제의 가장 아픈 약점을 정확하게 겨냥했다.


“제국의 법이 아니라, 폐하의 왕좌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뭐라?”


“폐하께서 불면증으로 인한 광증에 시달리며 이성을 잃어가시는 동안, 제국의 실권은 누구의 손으로 흘러갔습니까? 황궁의 재정을 장악한 재상 벨리알과 폐하를 미치광이로 몰아세우는 태후 오필리아입니다. 폐하의 광증이 하루 더 지속될 때마다, 폐하를 지탱하는 황권의 주춧돌은 하나씩 뽑혀 나가고 있습니다.”


아리아의 음성은 낮았지만, 소포르궁의 정적을 깨뜨릴 만큼 명확하고 날카로웠다. 카이젠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아리아는 멱살을 잡힌 채로도 황제의 핏빛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신전의 고위 사제도, 제국의 이름난 명의도 폐하의 불면증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폐하의 악몽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사악한 주술의 결과물입니다. 그 독소가 폐하의 뇌 신경을 갉아먹고 있는 한, 폐하는 결코 스스로 잠들 수 없습니다.”


“그것을 네가 어찌 안다는 거지?”


“방금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제 은빛 마력이 폐하의 두통을 진정시키던 순간을 말입니다.”


아리아는 자신의 손을 움직여 카이젠의 뜨거운 손목을 다시 한번 살포시 맞잡았다. 그의 피부 아래로 흐르는 마력의 주파수가 여전히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아리아의 차가운 온기가 닿자 미세하게 안정을 찾아갔다.


“저는 대대로 정신 교감 능력을 숨겨온 에르하르트 가문의 후예입니다. 제게는 타인의 무의식에 동조하여 그 고통과 악몽을 대신 짊어지는 정화의 힘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제 아버지를 살려주신다면, 저는 매일 밤 폐하의 침전에 들어 폐하의 참혹한 악몽을 대신 꾸어드리겠습니다.”


“내 악몽을…… 대신 꾼다고?”


카이젠의 목소리에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정서적 충격이 깃들었다. 밤마다 자신을 갈가리 찢어발기던 그 지옥 같은 전장과 시체 더미, 가시덩굴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사교계에서 천박하다고 손가락질받던 몰락 남작가 가문의 영애가.


그는 아리아의 은빛 도는 잿빛 머리칼과 창백한 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거짓이나 탐욕이 아닌, 오직 가문을 구하겠다는 단호한 책임감과 이성적인 투지만이 서려 있었다.


“재미있군.”


카이젠이 마침내 아리아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완전히 풀었다. 아리아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차가운 벽을 짚고 버텼다. 카이젠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손때 묻은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을 구둣발로 툭 건드리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구두 계약 따위는 믿지 않는다. 황실의 정적들은 늘 달콤한 말로 독약을 건네왔으니까. 네가 정말로 내 악몽을 정화할 수 있는 구원자인지, 아니면 내 목숨을 노리는 정교한 첩자인지는 오직 피의 서약만이 증명할 수 있다.”


카이젠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그의 검은 마력이 실타래처럼 엉키며 기괴하고 웅장한 양피지 문서 한 장을 만들어냈다. 붉은 마법 진이 테두리를 따라 불길하게 일렁이는 문서, 바로 ‘피의 수면 계약서’였다.


“여기에 서로의 피를 섞어 서명한다. 계약의 조건은 간단하다. 너는 매일 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내 침전에 머물며 내 손을 잡고 수면을 보좌해야 한다. 하루라도 이 ‘피의 계약 이행 서약 규칙’을 어기거나 나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계약은 즉시 파기된다.”


카이젠은 자신의 검지 손가락 끝을 보검 ‘데스페라도’의 날카로운 칼날에 가볍게 그었다. 붉은 핏방울이 양피지 문서 위의 서약인에 툭 떨어지며, 마법 진이 붉게 타올랐다.


“서명해라, 대역 죄인의 딸이여. 네 피를 바쳐 네 아비의 목숨을 사라.”


아리아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춤에 숨겨두었던 작은 은침을 꺼내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깊게 찔렀다. 붉은 선혈이 베어 나왔다. 아리아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양피지 문서 위의 카이젠의 핏자국 바로 옆에 꾹 눌렀다.


지직, 지지직!


두 사람의 피가 양피지 위에서 융합되는 순간, 소포르궁 침전 내부의 공기가 미친 듯이 진동했다. 붉은색 마법 사슬 결계가 허공에서 기괴한 쇠사슬 소리를 내며 형성되더니, 이내 아리아와 카이젠의 손목을 단단하게 감싸 쥐며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혼이 강제로 결속되는 가혹하고 절대적인 비극의 사슬이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카이젠은 만족스러운 듯 서늘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황실의 피빛 옥새를 꺼내 또 다른 가죽 문서에 찍었다. 그것은 레오파드 남작의 단두대 처형을 즉각 유예하고 지하 감옥 내 특별 독방으로 이송하겠다는 ‘황제의 가사면 서약서’였다.


“내일 새벽, 네 아비의 목은 단두대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뻐하긴 이르다.”


서약의 붉은 사슬이 두 사람의 손목을 감싸 쥐며 완전히 스며드는 순간, 카이젠은 아리아의 턱끝을 차갑게 치켜올리며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단 하루라도 날 잠재우지 못한다면, 네 가문 전체를 단두대에 세우겠다. 내 안식을 깨뜨린 대가는 네 영혼의 소멸이 될 것이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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