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뒤의 눈물과 폭군의 약속
“비켜라, 기드온. 내 검이 저 간사한 벨리알의 목을 직접 가르기 전에.”
소포르궁 침전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고 차가웠다. 폭군 카이젠 황제가 뿜어내는 검붉은 파멸의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방 안의 모든 대리석 바닥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인 황실 보검 ‘데스페라도’가 서늘한 검기를 내뿜으며 기괴한 마찰음을 냈다. 3일 뒤 특별 사법 재판을 강제 개정해 레오파드 남작을 단두대에 세우겠다는 재상 벨리알의 오만한 선포는, 카이젠의 역린을 완전히 찢어놓은 상태였다.
“폐하, 이성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지금 근위대를 움직여 사법부를 무력으로 도륙 내신다면, 태후 세력에게 ‘폭군이 마녀에게 홀려 법치주의를 파괴했다’는 명분을 줄 뿐입니다!”
늙은 시종장 기드온이 무릎을 꿇은 채 온몸으로 황제의 살기를 받아내며 울부짖었으나, 카이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핏빛 붉은 눈동자는 광증과 분노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어깨의 주술 자상이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그가 발산하는 마력은 침전 내부의 무거운 벨벳 커튼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기드온이 황제의 살기 어린 파동에 밀려나 대리석 벽면에 부딪히기 직전, 소포르궁의 놋쇠 문이 느리게 열렸다.
“그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폐하.”
회랑의 어둠을 뚫고 걸어 들어온 이는 아리아 에르하르트였다. 그녀는 단정한 감청색 번역청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영혼의 침식으로 인해 머리칼 끝자락이 눈부신 은빛 백색으로 탈색된 흔적은 에밀리가 묶어준 청색 실크 리본 아래 간신히 숨겨져 있었고, 오른손은 마비 증세가 팔꿈치까지 차갑게 올라와 로브 소매 속에 무력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은빛 눈동자만큼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단호했다.
“아리아…….”
카이젠이 으르렁거리며 검끝을 아리아를 향해 비스듬히 내렸다.
“내 손으로 저 가증스러운 벨리알과 사법부의 개들을 전부 찢어 죽이겠다. 감히 내 침소에 자객을 보내 너를 상처 입히고, 이제는 네 아비의 목숨을 담보로 나를 협박해? 제국의 법 따위는 필요 없다. 내 분노가 저들의 피를 원한다!”
카이젠이 검을 쥐고 아리아를 지나쳐 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아리아가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마비되지 않은 왼손을 뻗어 카이젠이 쥐고 있던 데스페라도의 검자루를 직접 움켜쥐었다. 살결이 검날의 서늘한 기운에 닿는 순간, 거친 불꽃 같은 마력이 아리아의 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
“비켜라, 아리아! 너조차 내 검을 막아선다면—!”
“막아설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성을 잃고 제국을 피로 물들이는 괴물이 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으니까요.”
그 순간, 두 사람의 손목에 새겨진 피의 서약 붉은 흉터가 은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생명 공유의 서약(Shared Life Covenant).
두 사람의 수명과 영혼이 강제로 동기화되어 오감과 고통을 나누는 붉은 사슬의 파동이 피를 타고 역류했다. 카이젠의 핏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황제의 뇌리에 아리아가 현재 겪고 있는 가혹한 신체적 고통이 고스란히 복사되어 전송된 것이다. 오른팔 전체를 지배하는 얼어붙을 듯한 냉기와 감각 상실,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때리는 삐- 하는 이명 소리, 그리고 영혼의 장벽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느껴지는 찢어지는 듯한 편두통.
카이젠은 숨을 들이켜며 멈칫했다. 아리아가 이 가혹한 통증을 숨긴 채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가슴속 통증을 통해 생생하게 자각한 것이다. 그의 살기 어린 마력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아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폭군 조율 대화법’을 가동했다. 그녀는 나약하게 눈물을 흘리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차갑고 명확한 이성적 논리로 황제의 불안한 의심을 꿰뚫었다.
“무력 숙청은 가장 쉬운 도피처일 뿐입니다, 폐하. 벨리알 재상이 노리는 것은 폐하가 스스로 법을 파괴하여 원로원과 제국 백성들의 신뢰를 잃는 것입니다. 법이 저들의 무기라면, 우리 역시 법으로 저들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그것이 황실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저를 지키는 유일한 방패입니다.”
“법이라니? 저들은 이미 사법부를 장악하고 네 아비의 처형 집행장에 서명했다!”
“그 집행장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칼날을 제가 찾아냈습니다.”
아리아는 로브 소매 안에서 왼손으로 고대 황실 헌법 조약서의 사본을 꺼내 들어 보였다.
“고대 제국 헌법 제14조 조항입니다. ‘황실 공헌 가문에 대한 신전의 이단 심문 시, 근위대장의 배석 및 심문 과정 참관 의무가 존재한다.’ 이 조항을 무시하고 진행된 이단 심문 기록은 사법적으로 원천 무효입니다. 저는 이미 이 문서를 근위대장 에단 경에게 전달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에단 경이 이끄는 정예 근위대가 지하 감옥 특별 고문실로 들이닥쳐 이단심문관 크루거의 심문을 합법적으로 저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카이젠의 눈동자에 어린 광증이 서서히 걷히고, 이성적인 경탄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더불어, 신전이 사용하는 심문 도구 ‘고해의 종’이 사악한 주술 결정으로 오염되었음을 법정에서 입증해 낸다면, 저들의 기소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폐하의 칼은 사법 재판 당일, 저들이 도망칠 구멍을 완벽히 차단할 때 가장 높은 곳에서 내리치셔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검을 거두어 주십시오.”
카이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데스페라도를 천천히 검집에 밀어 넣었다. 쇳소리가 멎으며 침전의 마력 폭풍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황제의 눈동자에 서린 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리아를 향한 무서운 집착과 독점욕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카이젠은 갑자기 아리아의 손목을 낚아채듯 움켜잡았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상처 입은 어깨를 배려하듯 미세한 온기가 실려 있었다. 황제는 아리아를 이끌고 침실 한편에 놓인 대형 전신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옆의 장식용 촛대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자, 묵직한 거울이 회전하며 두터운 석문이 열렸다. 소포르궁의 침전 거울 뒤 비밀 공간. 외부의 그 어떤 마법 탐지 장치와 도청 주술도 차단하는 완벽한 방음 밀실이었다.
카이젠은 아리아를 밀실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고 석문을 닫았다. 사방이 소리를 흡수하는 어두운 석벽으로 가로막힌 좁은 공간. 촛불 하나 없는 칠흑 같은 조도 속에서, 두 사람의 가쁜 호흡 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채웠.
“아리아.”
카이젠이 아리아를 밀실 벽면으로 밀어붙이며 다가섰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아리아의 시야를 완벽히 가로막았고, 핏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야수처럼 번뜩였다. 그의 손이 아리아의 청색 실크 리본을 건드려 은빛 백색으로 변해버린 머리칼 끝자락을 거칠게 쥐었다.
“너는 매번 내게 이성을 요구하는구나. 내 영혼이 악몽에 난도질당할 때도, 네가 내 곁에서 고통을 대신 짊어지며 죽어갈 때도…… 너는 한낱 계약서의 조항만을 읊조리며 나를 길들이려 해.”
카이젠의 낮은 목소리가 아리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생명 마력이 생명 공유의 사슬을 타고 아리아의 차가운 위장과 신경계를 따뜻하게 보듬어왔다.
“하지만 기억해라. 내가 법정에 배석하고 저들을 살려두는 것은 오직 네 계획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네 아비를 구하고 가문을 복권시킨 뒤, 네가 내 침실에서 영원히 벗어나려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제의 숨결이 아리아의 창백한 이마에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비호가 아닌, 구원자를 향한 폭군의 애절한 서약이자 집착 어린 약속이었다.
“재판 당일, 나는 내 모든 황권을 동원해 네 뒤를 지킬 것이다. 네가 저들을 사법적으로 도륙 내는 동안, 도망치려는 자들의 목을 베는 것은 내 몫이다. 그러니 절대 내 허락 없이 쓰러지지 마라.”
카이젠이 아리아의 손목을 강하게 맞잡고 자신의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지그시 맞대었다.
스으으으—!
그 순간, 아리아의 손목에 장착되어 있던 아스트랄 실버 재질의 은색 룬 마법 팔찌가 찬란한 은빛 인광을 뿜어내며 결계의 공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심장 고동 주파수가 완벽하게 하나로 공명하며, 아리아의 뇌 신경망을 장악하고 있던 흑주술 독소의 냉기가 황제의 생명 마력에 의해 급격히 정화되기 시작했다. 영혼의 동조가 더 깊은 수준으로 융합되는 성스럽고도 처절한 감각이 밀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폐하…….”
황제의 거대한 마력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정화 공식을 유지하느라, 아리아의 정신 장막에 미세한 과부하가 걸렸다. 뜨거운 열기가 비강을 타고 흐르더니, 아리아의 코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려 은빛 드레스의 깃 위로 툭 떨어졌다. 하지만 카이젠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더 깊고 붉은 눈동자로 그녀의 자아를 무섭도록 옭아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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