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타락과 이단의 심문
번역청 제3집무실의 차가운 정적 속에서, 아리아 에르하르트는 소매 안으로 마비된 오른손을 깊이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찌릿하게 타고 올라오는 냉기는 이제 팔꿈치 부근까지 잠식해 가고 있었다. 어젯밤 황제의 악몽을 정화하며 치렀던 대가는 지독한 두통과 함께 그녀의 육체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위조 기소장 사본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은빛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눈물의 결정.’
진위 판별의 눈으로 포착해 낸 기소장 서명 잉크 속의 보랏빛 마력 반응은 명백한 증거였다. 사법부와 신전 고위층이 태후 오필리아의 지령을 받아, 가짜 반역 증거에 흑주술의 마력을 섞어 넣은 것이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단 3일. 황제 카이젠의 무력 비호에만 의지하는 것은 태후파에게 ‘황제가 마녀에게 홀려 폭정을 휘두른다’는 명분만 줄 뿐이었다.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이 세운 가짜 제단을 무너뜨려야 했다.
아리아는 소리 없이 번역청을 빠져나와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성 솔리스 국교 신전의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참회의 기도실’. 사방이 어두운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 안에는 낡은 촛대 하나만이 위태로운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단정한 백색 신관복을 입은 젊은 사제, 베르나르드가 스치듯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맑은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리아 님…….”
베르나르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다가왔다. 아리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살포시 맞잡았다. 진화한 감응 능력이 발동하며, 베르나르드의 머리 뒤편으로 피어오르는 순수한 금빛과 떨리는 회색의 오라가 색채로 시각화되었다. 거짓은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신전의 타락에 고뇌하고 있는 의로운 아군이었다.
“베르나르드 사제 님. 아버님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아리아의 차분한 목소리에 베르나르드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참혹합니다. 이단심문관 크루거가…… 루드비히 신부의 묵인 하에 남작 님을 지하 감옥 특별 고문실로 이송했습니다. 채찍이나 인화성 고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신전의 금기 유물인 ‘고해의 종(Bell of Confess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해의 종…….”
아리아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좁혀졌다. 고문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외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지만, 영혼의 장벽을 직접 타격해 자아를 붕괴시키고 환각을 유도하여 시키는 대로 자백하게 만드는 잔인한 정신적 가학 도구였다.
“크루거는 남작 님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제로 악마와의 피의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들어, 3일 뒤 열릴 특별 사법 재판에서 완벽한 이단 죄인으로 공표하려는 속셈입니다. 남작 님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빨을 깨물며 버티고 계시지만…… 영혼의 마모가 한계에 달해 조만간 자아를 잃으실지도 모릅니다.”
베르나르드의 떨리는 음성에서 지하 감옥의 음산한 비명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아리아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짓눌렀. 슬퍼하거나 분노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신전의 면책 특권과 이단 심문 권한은 절대적입니다. 사법부 검사 카를마저 그들과 결탁한 이상, 일반적인 법리로는 감옥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베르나르드 사제 님, 그 고해의 종을 무력화할 방법은 없습니까?”
그 질문에 베르나르드는 주변을 극도로 경계하며 아리아의 귀가에 속삭였다.
“고해의 종은 본래 신성력으로 작동하는 성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크루거가 사용하는 종은 기괴한 보랏빛 마력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전의 비밀 서류를 추적한 결과…… 그 종을 움직이는 원천 마력은 신성력이 아닙니다. 비밀 교단 에레보스의 ‘검은 눈물의 결정’이 종의 내부에 이식되어 주술적 동력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신전 깊은 곳, 루드비히 신부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궤’ 내부에 그 결정의 예비 동력원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리아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지적 스파크가 일어났다. 기소장 잉크 속의 보랏빛 마력, 그리고 고해의 종을 움직이는 검은 눈물의 결정. 모든 선들이 하나의 거대한 배후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스러운 신전이 사악한 흑주술의 도구를 사용해 무고한 귀족을 고문했다라…….”
아리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은 단순한 절차적 오류가 아닙니다. 국교 신전 전체의 정통성을 뒤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신성 모독’이자 이단 행위입니다.”
“하지만 아리아 님, 이를 입증하려면 고해의 종 내부에 박힌 결정이나 성궤 속의 결정을 직접 법정에 물증으로 제출해야 합니다. 신전의 삼엄한 경비와 루드비히의 감시를 뚫고 그것을 훔쳐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방법을 찾아야지요. 고맙습니다, 베르나르드 사제 님. 이 정보는 아버님을 구할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될 것입니다.”
기도실을 나선 아리아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그녀는 먼저 공식적인 사제 면회 신청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려 시도했다. 그러나 신전의 타락한 사제 루드비히 신부는 재상 벨리알의 압박을 핑계로 아리아의 면회 신청을 단칼에 거부했다. 사법적 장벽이 그녀의 앞을 철저히 가로막은 것이다.
정면 돌파가 막혔다면, 우회로를 뚫어야 했다. 아리아는 깊은 밤, 핀레이 관장의 눈을 피해 황실 금서고 지하 3층으로 은밀하게 침투했다. 붉은 마력 사슬이 뱀처럼 얽혀 있는 어두운 석조 서고 내부. 차가운 냉기가 뼈를 시리게 했지만, 아리아는 백발의 멘토 유클리드 교수와 머리를 맞댔다.
“유클리드 교수님. 신전의 이단 심문 독점권을 깨뜨릴 수 있는 고대의 예외 조항을 찾아야 합니다. 법이 그들의 방패라면, 우리는 그 법의 가장 깊은 이면을 파고들어야 합니다.”
유클리드 교수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먼지 쌓인 고대 황실 헌법 조약서들을 빠르게 뒤적였다. 촛불의 흔들리는 불빛 아래, 두 학자의 지적인 추적이 시작되었다. 수백 장의 양피지 스크롤을 넘기던 중, 유클리드 교수의 돋보기안경이 한 조항에 멈춰 섰다.
“찾았네, 아리아! 고대 제국 헌법 제14조 조항일세. ‘황실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문의 직계 귀족에 대한 신전의 이단 심문 시, 신앙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황제 직속 근위대장의 배석 및 심문 과정 상시 참관 의무가 존재한다’고 적혀 있네! 만약 배석 없이 심문을 강행했을 경우, 그 심문 기록은 법적 효력을 상실하네.”
“근위대장 배석 의무…… 에단 경을 합법적으로 지하 감옥에 밀어 넣을 수 있는 명분이군요.”
아리아의 은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양피지 뒷장을 더 넓게 읽어 내려갔다. 고대 룬 문자로 기록된 신전과의 사법 협약서 조항들. 그녀의 천재적인 고대어 해독 능력이 법조문의 행간을 파고들었다.
“여기, 더 결정적인 조항이 있습니다, 교수님.”
아리아가 가리킨 곳에는 고대 제국의 최고 사법 판례가 적혀 있었다.
“‘신전이 사용하는 심문 도구 및 신성 유물이 사악한 주술이나 이단의 마력에 오염되었음이 증명될 경우, 해당 신전의 이단 심문 권한은 즉각 정지되며, 진행 중인 모든 종교 재판은 원천 무효로 돌아간다.’ ”
유클리드 교수가 숨을 들이켰다.
“신성 유물의 주술 오염……! 그렇다면 고해의 종이 흑주술 결정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증명해 내기만 한다면…….”
“네. 아버님의 기소 자체를 원천 무효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신전은 자신들의 신성 모독죄를 덮기 위해 기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법리적 칼날은 완벽하게 정립되었다. 적들의 가장 강력한 권위인 ‘신앙’을 역으로 이용해 그들의 목을 벨 준비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가장 거대한 장벽이 남아 있었다. 고해의 종을 움직이는 원천 마력이 에레보스의 흑주술 결정이라는 물리적 물증을 3일 안에 법정에 들이밀어야 했다. 신전의 성궤 내부를 털어 결정을 훔쳐내지 못한다면, 이 모든 법리적 논리는 한낱 양피지 위의 낙서에 불과했다.
그때, 금서고의 어두운 그늘 너머로 전령 기사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는 아리아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베르나르드 사제가 아리아와 접촉한 사실을 루드비히 신부에게 들켜, 현재 신전 내부 감옥에 일시 연금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리아는 쪽지를 꽉 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서고의 정적을 찢었다. 베르나르드가 희생당했다. 적들의 포위망이 한층 더 빠르게 좁혀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단 이틀.
아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은빛 눈동자로 서고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마비된 오른손을 꽉 쥐며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음지의 칼날을 움직일 차례였다.
그녀는 깃펜을 들어 시온에게 보낼 극비 밀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온. 신전의 성궤 내부에 보관된 검은 눈물의 결정을 훔쳐내야 한다. 황궁 지하의 비밀 주술실을 습격해라. 기회는 오직 단 한 번뿐이다.’
3일 뒤 열릴 특별 사법 재판의 단두대 앞에서, 적들의 목을 벨 마지막 사투의 톱니바퀴가 거칠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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