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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돋친 사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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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소포르궁을 뒤흔들었던 악몽의 잔재는 현실의 아침이 밝아온 뒤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리아 에르하르트는 처소의 전신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머리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울 속, 평범한 잿빛이었던 머리칼 끝자락이 눈이 시리도록 창백한 은빛 백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어젯밤 황제의 침전에서 수면 향료 ‘모르페우스’의 독소를 치우고 루나 플라워 에센스로 정화 의식을 치른 대가였다.


영혼의 마력을 극한으로 쥐어짤 때마다 찾아오는 신경계의 침식 증상.


“아리아 님, 아직 손끝에 온기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전담 메이드 에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아리아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마비 증세로 인해 굳어버린 손가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귀에서는 여전히 삐 소리를 내는 이명이 나직하게 울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에밀리. 오늘 다회는 태후께서 저를 시험하기 위해 마련하신 전장이에요.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보였다간 가문의 사면도, 아버지의 목숨도 다시 단두대 위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아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에밀리가 건넨 청색 실크 리본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신비로울 정도로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칼 끝자락을 단단히 묶어 옷자락 안쪽으로 교묘하게 말아 올렸다. 깃이 높게 솟은 하급 번역관 제복의 단추를 목덜미 끝까지 채우자, 자객에게 긁혔던 왼쪽 어깨의 자상과 손목의 서약 흉터가 완벽하게 가려졌다.


그 위로 두른 것은 천박한 몰락 가문의 신분을 상징하는 초라하고 수수한 회색 로브였다. 사교계의 귀족들이 그녀를 ‘천한 번역가’라 비웃을 때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완벽한 위장막이었다.


“릴리, 가요.”


아리아는 품속에 엘레나의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가 안전하게 숨겨져 있는지 확인한 뒤, 집무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비서 릴리를 불렀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의 릴리는 아리아의 초라한 차림새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리아 님, 정말 이대로 가실 건가요? 태후궁에서 주최하는 다회는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귀부인들이 모이는 자리예요. 하급 번역관 제복 위에 그런 낡은 로브라니요…… 분명 저들이 온갖 독설로 님을 괴롭힐 거예요.”


“그들이 짖어대는 독설은 제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해요, 릴리. 오히려 저들이 저를 천박하게 여길수록, 우리는 태후의 숨겨진 주술 흔적을 찾을 시간을 더 벌 수 있어요.”


아리아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온실 정원에서 배운 오감 차단 호흡법을 가동했다. 들숨과 날숨을 낮추며 내면의 유리벽을 단단히 세우자, 마음속을 맴돌던 두려움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


황궁 중앙 연회홀은 그야말로 사치와 위선의 극치였다.


거대한 돔형 천장에는 수만 개의 크리스탈이 박힌 샹들리에가 눈부신 금빛 불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최고급 대리석이 깔려 있어 걷는 이의 구두 소리를 맑게 울려 퍼뜨렸다. 연회홀을 가득 메운 태후파 귀족 부인들과 영애들은 형형색색의 사치스러운 실크 드레스와 주렁주렁 매단 보석들을 뽐내며 위선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탁한 사향 냄새와 귀를 찌르는 가식적인 웃음소리.


그 화려한 공간의 문이 열리고,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아리아가 걸어 들어서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내 부채 뒤로 숨겨진 비아냥거림과 차가운 비웃음이 소음처럼 밀려왔다.


“어머, 저기 좀 봐. 대역 죄인의 딸이 어떻게 황실의 신성한 연회홀에 발을 들이는 거지?”


“하급 번역관이라는 비천한 직책을 얻었다더니, 정말로 천박한 회색 로브를 걸치고 왔군요. 황실의 고결한 공기가 더러워지는 기분이에요.”


귀족 영애들의 날카로운 수군거림 속에서, 저편 상석에 앉아 있던 태후 오필리아의 서늘한 눈빛이 아리아를 향했다. 태후는 독배를 마신 아리아가 완전히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기에, 그녀가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태후의 심복이자 사교계를 지배하는 여두목, 바네사 백작부인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 이게 누구신가. 우리 다회의 분위기를 아주 ‘이색적’으로 만들어줄 몰락 남작가 영애가 아니신가?”


바네사 백작부인은 깃털과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치장한 거구의 체구로 아리아를 위압하듯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검붉은 와인이 가득 담긴 크리스탈 잔이 쥐여 있었다.


“비천한 하급 번역관이라 예법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런 고결한 자리에 올 때는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었어야지. 그 낡은 로브는 마치 길거리의 부랑자 같구나.”


“백작부인, 아리아 님은 황실 번역청의 공식 임무를 수행 중이신—”


옆에서 참지 못한 릴리가 아리아를 대변하려 끼어들었으나, 바네사는 차가운 눈빛으로 릴리를 쏘아보았다.


“천한 하급 보조원 주제에 감히 내 말에 토를 다는 게냐? 그 천박한 주둥이를 닥치지 않으면 당장 번역청에서 쫓아내 주마.”


바네사가 릴리의 따귀를 때려 모욕을 주려 손을 높이 치켜든 순간, 아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마비되지 않은 왼손을 뻗어 바네사의 두터운 손목을 정확하고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탁!


“……!”


바네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아리아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는 얼음 같은 포커페이스로 백작부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백작부인, 손을 거두시지요. 제 조수는 황실 법률에 따라 신변이 보장된 공무 수행원입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황실의 인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납니다.”


“이, 천한 년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바네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 반동으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크리스탈 잔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검붉은 와인이 아리아의 가슴팍과 회색 로브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아리아의 초라한 로브가 핏빛 와인으로 얼룩덜룩하게 젖어 들었다. 수치스럽고도 참혹한 몰골이었다. 주위의 귀부인들이 일제히 부채로 입을 가리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어머, 미안하구나. 비천한 몸뚱이에 어울리는 붉은 물이 들었어. 꼭 네 아비가 단두대에서 흘릴 피의 색깔 같지 않느냐?”


바네사가 비열하게 웃으며 아리아의 어깨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나 아리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로브 안에서, 그녀의 차가운 지성이 번뜩였다. 아리아는 사교계 수칙인 ‘평판 세탁의 철칙’을 가동했다. 화를 내거나 수치스러워하는 대신, 그녀는 단호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황실 법조문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황실 예법 제7조에 따르면, 황실 공식 연회 내에서 타인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의상을 고의로 오염시킨 자는 그 가치에 상응하는 배상과 함께 대중 앞에서 공개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황실 공무원을 모욕한 자는 예법 재판소에 회부될 수 있지요.”


아리아의 맑고 서늘한 음성이 연회홀의 웅성거림을 단숨에 압살했다. 바네사의 웃음기가 싹 가셨다.


“백작부인께서 제 제복을 고의로 오염시키고 황실 번역청의 조수를 모욕하셨으니, 저는 이 법도에 따라 정식으로 배상과 사과를 청구합니다. 배석하신 원로원 의원님들과 다이안 크로이츠 영애께서 이 현장의 명백한 증인이십니다.”


저편에서 다회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중립파의 다이안 크로이츠 백작 영애가 아리아의 완벽한 법률 인용에 감명받은 듯 미세를 끄덕이며 바네사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사교계의 여론이 순식간에 바네사의 교양 없는 횡포를 지적하는 방향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 너 따위 몰락한 가문의 대역 죄인 딸이 감히 법을 논해? 사과라고?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바네사는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논리적으로 망신을 당하자 이성을 잃고 발악했다. 그녀는 아리아의 멱살을 잡으려 거칠게 손을 뻗었다. 그 과정에서 아리아의 젖은 로브 깃이 크게 벌어지며, 그녀의 얇은 제복 안쪽에 숨겨져 있던 유물이 드러났다.


달빛 아래서 미약하게 푸른 정화의 인광을 뿜어내는 사파이어.


엘레나의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였다.


바네사의 매서운 눈동자가 그 펜던트에 꽂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광기 어린 희열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그 펜던트! 그 푸른 보석은 과거 에르하르트 남작가가 반역 누명을 쓰며 제국 법정에 의해 전 가산 압류 처분이 내려졌을 때 몰수되었어야 할 황실의 자산이 아닌가!”


바네사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아리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이 도둑년! 감히 황실의 압류 자산을 빼돌려 품고 다니다니! 이것은 명백한 장물 취득이자 황실 재산을 갈취한 대역죄다!”


“이것은 제 어머니의 유품이자, 가문 대대로 내려온 정당한—”


아리아가 반론하려 했으나, 이성을 잃은 바네사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리아의 목덜미를 향해 직접 손을 뻗어 펜던트를 억지로 뜯어내려 했다.


“시끄럽다! 장물을 소지한 범죄자 년을 당장 포박하라! 경비병들, 무엇을 하느냐! 감히 황실의 공기를 더럽히는 이 도둑년을 당장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라!”


바네사의 고함 소리에, 연회홀 외곽을 경비하던 태후파 사설 경비병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며 아리아를 에워쌌다. 차가운 철제 갑옷을 입은 경비병들이 아리아의 가냘픈 양팔을 거칠게 붙잡아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아리아 님! 안 돼요!”


릴리가 비명을 질렀고, 아리아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이 꿇려진 채 가혹한 물리적 압박 속에 고립되었다. 바네사 백작부인의 탐욕스러운 손가락이 아리아의 목덜미에 걸린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의 체인을 끊어내기 위해 가시 돋친 발톱처럼 뻗어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쾅—!


연회홀의 거대하고 웅장한 황금 문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거칠게 날아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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