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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의 노인과 은빛 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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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찰칵.


서쪽 망루의 두꺼운 철제 문이 완전히 열리며 밤공기를 가르는 서늘한 쇳소리가 정상의 정적을 찢었다. 은빛 달빛을 등진 기사 가르시아의 거대한 실루엣이 망루 바닥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손에 들린 마법 탐지 램프가 불길한 보랏빛 인광을 뿜어내며 아리아가 숨어 있는 벼랑 끝 그늘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바람조차 얼어붙은 듯한 극한의 대치 속에서 아리아는 가슴팍 품속에 숨겨둔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를 왼손으로 꽉 쥐었다. 오른손끝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감각이 없었고, 망루의 칼바람에 폐부가 뒤틀려 기침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그녀는 ‘오감 차단 호흡법’을 극한으로 유지하며 숨소리마저 지워냈다. 정신 장막 형성술로 자신의 마력 파동을 공기 중으로 흩뿌렸으나, 가르시아의 집요한 탐지 램프는 기어코 그녀의 발끝이 닿은 카펫 근처를 비추기 시작했다.


램프의 보랏빛 불빛이 아리아의 로브 자락을 집어삼키기 바로 직전이었다.


우장창창—!


망루 아래층 나선형 계단 깊은 곳에서 무거운 철제 갑옷과 무기 더미가 바닥으로 사정없이 구르는 육중한 금속 파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깨뜨린 그 소음은 좁은 돌탑 내부를 타고 무섭게 공명했다. 이와 동시에 낯선 초병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침입자다! 서쪽 회랑으로 도망친다!”


가르시아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소리가 난 나선형 계단 아래를 향해 번개처럼 돌아갔다. 망루 정상에 침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세한 의심보다, 아래층에서 실시간으로 발생한 무력 충돌의 소음이 그의 기사단장으로서의 본능을 먼저 자극했다.


“치안대! 아래층을 포위하라! 단 한 명도 놓치지 마라!”


가르시아는 망루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채 부하들을 이끌고 계단 아래로 폭풍처럼 쓸려 내려갔다. 그의 거친 장화 소리가 멀어지는 순간, 아리아는 참았던 거친 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에단 브란트 경이었다. 아래층에서 소음을 내어 가르시아의 시선을 돌려주겠다던 그의 비밀 약속이 완벽한 타이밍에 이행된 것이었다. 아리아는 굳어가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니콜라스가 미리 열어둔 망루 뒷문의 비밀 통로를 통해 어둠 속으로 신속하게 몸을 감추었다. 가르시아의 감시망을 뚫고 자신의 처소로 복귀하는 길은 차가운 안개 덕분에 한층 더 은밀했다.


***


방 안으로 돌아와 처소의 문을 걸어 잠근 아리아는 촛불 하나만을 켠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온몸이 얼어붙을 듯 차가웠고, 귀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머릿속을 찔러댔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리아는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미세한 가루 뭉치를 양피지 위에 펼쳐놓았다. 낮 동안 소포르궁 침전의 향로 주변에서 극비리에 긁어모았던 수면 향료 ‘모르페우스’의 잔여 성분이었다.


그녀는 가문의 비전인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을 펼치고, ‘악몽 괴수 언어 분석법’의 기초 공식을 대입하기 시작했다. 깃펜을 쥔 왼손이 바쁘게 움직이며 향료의 미세한 마력 파동 주파수와 고대 룬 제국 ‘티르’의 저주 문장들을 일대일로 대조해 나갔다.


“역시…… 단순한 안정제가 아니었어.”


아리아의 입술에서 서늘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모르페우스 향료의 본질은 황제의 정신을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달콤한 향으로 깊은 잠을 유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대상의 이성적 방어벽을 완벽하게 마비시키는 지능적인 흑주술 매개체였다. 매일 밤 이 향을 들이마신 카이젠 황제는 무의식이 극도로 약화되어, 태후의 주술사 사제 말루스가 심어둔 악몽 저주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영혼을 갉아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향료를 침전에서 완전히 치워버려야만 카이젠의 자아 붕괴를 막고 저주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가르시아 기사단이 매일 밤 향로의 상태를 검열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향로를 비우는 것은 즉각적인 의심을 살 터였다. 모르페우스의 독소를 대체할 수 있으면서도, 황제의 정신 마력을 안정시키고 수면을 유도할 완벽한 대안이 필요했다.


‘그 독소를 완충하고 황제의 폭주를 막을 마력 안정제…… 루나 플라워 에센스가 있어야 해.’


하지만 루나 플라워는 황실 약제처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극희귀 약초였다. 낮 동안 약제처에 신청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재상 벨리알의 사주를 받은 행정관 에르스트가 예산 삭감과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아리아의 신청서를 가차 없이 반려해 버렸다. 합법적인 경로로는 에센스를 구할 길이 없었다.


결국 아리아가 선택한 곳은 황궁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감도는 공간, 바로 ‘황궁 온실 정원’이었다.


***


다음 날 오후, 따스한 햇살이 거대한 유리 돔을 통과해 화사하게 내리쬐는 온실 정원은 황궁의 칠흑 같은 어둠과 완벽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른 희귀 마력 약초들이 내뿜는 신비로운 허브 향이 온실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리아는 청색 실크 리본으로 은빛 백발을 단단히 묶어 숨긴 채, 낡은 사전을 안고 온실의 흙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른손끝의 마비 증세와 간밤의 추위로 인한 전신 오한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온실의 따뜻한 공기가 몸을 미세하게 녹여주었다.


정원 구석의 작은 나무 테이블 앞, 흙 묻은 낡은 옷을 입고 물뿌리개를 손에 든 허리 굽은 노인이 화초의 잎사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있었다. 온실의 이름 없는 노인이었다.


“또 왔구나, 아이야.”


노인이 허리를 펴며 주름진 얼굴 가득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리아가 다가오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허브 차 한 잔을 우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이 어제보다 더 창백하구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머리칼 끝자락에 감도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노인의 눈빛이 안경 너머로 예리하게 반짝였다. 아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의 마비된 오른손을 로브 소매 속으로 깊이 감추려 했으나, 노인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손목에 감긴 은색 룬 마법 팔찌의 미세한 균열에 머물러 있었다.


“그 팔찌…… 황제 폐하의 아스트랄 실버로군. 그 가냘픈 몸으로 황궁의 가장 어둡고 깊은 침실을 드나들며 폭군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게냐?”


아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노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위 판별의 눈이 작동했으나, 노인의 내면에서는 어떤 악의나 거짓도 읽히지 않았다. 오직 세상사에 달관한 깊은 연륜과 아리아를 향한 안타까운 연민의 오라만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르신은……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는군요.”


“평생을 황실의 약재를 만지며 살아온 늙은이다. 눈을 속이려 해도 내 코는 속이지 못하지. 네 몸에서 뿜어지는 그 매캐한 냄새…… 모르페우스 향료의 독소에 영혼이 침식당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 황제가 깨어나기 전에 네 뇌 신경이 먼저 타버릴 게다.”


노인은 흙 묻은 손으로 품속을 뒤적이더니, 달빛처럼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뿜는 아주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병 내부에는 영롱한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루나 플라워 에센스다. 한 달에 단 한 번, 보름달 빛 아래서만 개화하는 꽃의 정수지. 폭주하는 파멸 마력을 가라앉히고 영혼의 상처를 보듬는 최고의 진정제란다.”


아리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구명의 비약이 눈앞에 있었다.


“이 귀한 것을 제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몰락한 가문의 대역 죄인의 딸일 뿐입니다.”


“가문의 신분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다만…… 평생을 고독 속에서 미쳐가던 그 어린 황제에게 안식을 주려 자신의 생명을 깎아 나가는 미련하고도 강인한 아이를 보았으니, 이 늙은이의 마지막 남은 지혜를 보태고 싶을 뿐이지.”


노인은 다정한 손길로 아리아의 차가운 왼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아리아의 심장을 타고 흐르며 차가운 오한을 일시적으로 씻어내 주었다.


“가거라, 아이야. 그리고 살아남거라. 네 지성이 이 황궁의 어둠을 깨뜨릴 열쇠가 될 테니.”


아리아는 노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루나 플라워 에센스를 로브 깊숙이 숨기고 온실을 빠져나왔. 노인의 정체가 과거 황실의 수석 약제사였다는 심증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든든한 학술적 조력자를 얻은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


***


한밤중,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소포르궁 침전.


아리아는 이중간첩으로 포섭한 하녀 그레타의 철저한 엄호와 망보기 속에서 은밀하게 황제의 침실로 잠입했다. 가르시아 기사단의 야간 검열 시간을 피해 향로 주변으로 다가간 아리아는, 숨죽인 채 손가락 끝으로 모르페우스 향료의 가루를 신속하게 수거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그레타가 미리 준비해 둔 모르페우스와 겉보기엔 똑같지만 독소가 없는 위조 향료를 채워 넣고, 향로의 가장 깊은 열기 중심부에 루나 플라워 에센스를 단 몇 방울 떨어뜨렸다.


치이이익—.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색이 흐릿한 보랏빛에서 맑고 투명한 은빛 안개로 서서히 변해갔다. 달콤하면서도 매캐했던 기분 나쁜 단내는 사라지고, 온실 정원에서 맡았던 신비롭고 고요한 허브 향이 소포르궁 침전 내부의 탁한 공기를 정화하며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누워 있는 카이젠 황제의 얼굴을 관찰했다.


‘미세 호흡 분석(Micro-breath Analysis)…….’


그의 들숨과 날숨의 기류가 아리아의 시야에 푸른 마력 흐름선으로 도식화되어 펼쳐졌다. 평소 악몽의 저주로 인해 가쁘고 거칠게 요동치던 그의 호흡 주파수가, 루나 플라워 에센스의 은빛 향을 들이마실 때마다 거짓말처럼 안정적인 주기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카이젠의 구겨져 있던 미간이 천천히 펴졌고, 그의 전신을 짓누르던 검붉은 분노의 오라가 가라앉았다. 폭군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깊고 평화로운 안식의 수면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리아의 지적 약학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황제의 무의식 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저주의 본질, 즉 태후의 주술사들이 심어둔 ‘검은 눈물의 결정’이 갑작스러운 수면 정화 에너지에 강력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리아의 오른손목에 채워진 은색 룬 마법 팔찌가 붉은 주술 빛을 내뿜으며 터질 듯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윽!”


아리아는 손목을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팔찌의 은빛 표면을 따라 불길한 붉은 마력 사슬들이 뱀처럼 얽혀들며 가혹한 정화 반동의 열기를 방출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 무의식의 심연이 강제로 개방되었다. 꿈속의 평화롭던 전장은 한순간에 핏빛 불꽃으로 뒤덮였고, 정화 에너지를 피해 폭주한 거대한 검은 가시덩굴들이 기괴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서 무서운 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가시들은 아리아의 자아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해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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