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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루의 밤과 검은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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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번역청 제3집무실에서 재상 벨리알이 남기고 간 서늘한 경고는 아리아의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머지않아 온 제국이 뒤집힐 큰 재판이 원로원에서 열릴 터이니…….’ 아버지를 처형대 광장으로 다시 끌어내리려는 재상 파벌의 사법적 올가미가 이미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를 구하고 가문의 누명을 완전히 벗기기 위해서는 황제 카이젠의 영혼을 좀먹는 저주의 물리적 발원지를 먼저 찾아내야만 했다.


아리아는 가슴팍 품속에 숨겨둔 어머니 엘레나의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를 꽉 쥐었다. 차가운 보석의 촉감이 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극심한 편두통을 미세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그녀는 오늘 낮, 에단 브란트 경이 번역청 서가 사이에 은밀히 남겨두고 간 비밀 쪽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오늘 밤 자정 직전, 서쪽 망루의 야간 경비대 교대 시간은 단 5분. 니콜라스가 망루 입구의 비밀 자물쇠를 열어둘 것이다.]


아리아에게 허락된 유일한 기회였다. 밤 11시 45분, 황궁을 둘러싼 안개가 가장 짙어지는 시간. 아리아는 청색 실크 리본으로 은빛 백발을 단단히 묶어 올리고, 깃이 높은 수수한 회색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소포르궁 외곽의 차가운 회랑을 소리 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그림자처럼 은밀했다.


망루 입구에 도달하자, 거구의 철제 갑옷을 입은 문지기 기사 니콜라스가 굳건히 서 있었다. 그는 아리아의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고개를 돌려 반대편 회랑을 응시했다. 과거 황제의 광증 폭주 때 목숨을 잃을 뻔한 자신을 아리아가 황제를 잠재워 살려준 뒤, 그녀를 진정한 은인으로 모시게 된 파수꾼의 묵인이었다. 니콜라스가 미리 열어둔 작은 놋쇠 문틈으로 아리아는 신속하게 몸을 밀어 넣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서쪽 망루의 나선형 석조 계단이 끝없이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둡고 축축한 계단 내부에는 칠흑 같은 정적과 얼어붙을 듯한 냉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한 걸음씩 디딜 때마다 차가운 대리석 벽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로브를 뚫고 뼈마디를 시리게 했다.


‘흐읍…….’


매서운 밤바람이 창틈으로 들이쳐 기침이 터져 나오려 하자, 아리아는 즉각 ‘오감 차단 호흡법’을 가동했다. 들숨과 날숨을 극도로 낮추며 자신의 기도를 완벽히 제어하자 숨소리조차 지워진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오른손끝의 마비 증세가 찌릿한 통증으로 번져왔지만, 그녀는 왼손으로 로브 자락을 움켜쥐며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슈우우웅—!


갑자기 망루 외벽의 아치형 창문 너머로 거대한 은빛 광선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황실 경비대가 야간 침입자를 탐지하기 위해 상시 가동하는 마법 탐지 서치라이트였다. 이와 동시에 계단 아래층에서 서늘한 금속 갑옷이 마찰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태후 오필리아의 사주를 받아 소포르궁 주변을 집요하게 감시하는 기사 가르시아의 야간 순찰대였다. 가르시아가 들고 있는 마법 탐지 램프의 불길한 보랏빛 인광이 나선형 계단의 석조 벽면을 따라 서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발각되는 순간, 이단 주술 및 황궁 무단 잠입죄로 즉각 처형대 광장으로 끌려갈 터였다.


아리아는 이마에 왼손 손가락을 대고 나직하게 주문을 읊조렸다.


“정신 장막 형성술(Spirit Barrier Formation)…….”


가문의 선조 루카스가 남긴 정화의 룬 문자 ‘소피아(Sophia)’의 심상이 그녀의 대뇌 속에서 은은하게 반짝였다. 아리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미세한 마력이 투명한 장막을 형성하며 그녀의 영적인 주파수를 공기 중으로 완벽히 흩어버렸다. 가르시아의 탐지용 마법 램프 불빛이 아리아가 서 있는 서가 그늘을 스쳐 지나갔으나, 그녀의 마력 반응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아리아는 벽면에 바짝 몸을 밀착한 채 가르시아의 거친 장화 소리가 계단 아래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마침내 도달한 서쪽 망루의 정상.


사방이 탁 트인 높은 하늘 위로 밤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아리아의 회색 로브를 거칠게 휘감았다. 발아래로 펼쳐진 발할라 제국의 수도 아스가르드는 안개 속에 잠겨 기괴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거대한 황궁의 고딕풍 지붕들은 웅크린 야수들의 실루엣처럼 음산했다. 아리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목에 찬 은색 룬 마법 팔찌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카이젠이 하사한 아스트랄 실버의 차가운 마력이 그녀의 정신력을 극한으로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공포의 색채 감지(Fear Color Detection)……!”


아리아가 은빛 눈동자를 크게 떴다.


순간, 흑백의 밤하늘 위로 아스트랄 차원의 신비로운 색채 파동들이 기하학적인 선을 그리며 폭발하듯 펼쳐졌다. 황제의 침전인 소포르궁 상공은 이미 카이젠의 고통과 분노가 형상화된 검붉은색 분노와 잿빛 고독의 오라로 가득 차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 혼돈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하고 짙은 검은 저주 마력의 파동선이었다.


그것은 황제의 영혼을 갉아먹는 저주의 붉은 실타래였다. 검은 파동은 밤하늘을 수놓으며 뱀처럼 꿈틀거리며 황궁 내부의 복잡한 회랑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리아는 칼바람에 안구 통증을 느끼면서도 눈동자를 굴려 그 선의 흐름을 뇌 속으로 정밀하게 도식화했다.


선의 종착지는 태후 오필리아의 처소인 태후궁이 아니었다. 주파수가 가리키는 궤적은 완전히 빗나간 방향, 황궁 서쪽 외곽의 음산한 구역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수십 년간 방치되어 검은 가시덩굴로 뒤덮인 버려진 탑 지하.


그곳은 제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불길한 성역으로 금기시되던 공간, 바로 ‘피 눈물 예배당(Blood Tear Chapel)’이었다. 태후 오필리아가 밤마다 산 제물의 피로 흑주술을 부리며 카이젠에게 악몽의 저주를 주입하던 진짜 만악의 발원지 요새의 위치가 아리아의 눈앞에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저곳이었어.”


아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차갑게 입술을 깨물었다. 저 제단의 물리적 코어를 파괴하지 않는 한, 카이젠의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자신 역시 침식의 대가로 수명이 깎여 죽어갈 터였다.


충격적인 진실을 필사 노트에 각인하고 서둘러 망루를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철컥—.


고요한 망루의 정적을 깨뜨리고, 바로 아래층 철제 문손잡이가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르시아 기사가 순찰을 마치고 다시 망루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 꾸러미가 불길하게 짤랑였고, 이내 망루 문에 열쇠가 꽂혀 돌아가는 서늘한 쇠붙이 소리가 정적을 잔인하게 찢었다.


찰칵.


문고리가 돌아가며 차가운 바람 사이로 가르시아의 거친 기척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망칠 곳 없는 망루의 벼랑 끝에서, 아리아는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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