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의 차가운 의심
황실 번역청 제3집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낡은 양피지의 서늘한 먼지 냄새와 시큼한 잉크 향으로 가득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황궁의 고딕풍 회랑들은 짙은 오전 안개에 가려 음산한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리아 에르하르트는 집무실 구석, 삐걱거리는 나무 책상에 앉아 깃펜을 움직였다. 서늘한 청색 실크 리본으로 묶어 올린 그녀의 잿빛 머리칼 끝자락에는 미세한 은빛 백색 흔적이 숨겨져 있었다. 어젯밤 그레타의 딸 루시의 저주를 정화하느라 마력을 대량 소모한 탓에, 소매 속 오른손끝은 여전히 차갑게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아는 마비된 오른손을 굳게 쥔 채 왼손으로만 깃펜을 쥐고 고대 룬 제국의 세금 장부를 묵묵히 필사했다.
저편에서 상급 번역관 하인츠 폰 베커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아리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아리아에게 오역을 들키고 사교계에서 당했던 수치가 고스란히 원한으로 남아있었다.
정적을 깨뜨린 것은 묵직한 가죽 장화 소리였다.
저벅, 저벅, 저벅.
집무실의 거대한 참나무 문이 열리며, 냉혹한 기운이 방 안의 온도를 단숨에 떨어뜨렸다. 은빛 모피로 안감을 댄 묵직한 밍크 코트를 어깨에 걸친 사내, 제국 행정부와 재무를 손에 쥔 실권자이자 에르하르트 가문에 반역 누명을 씌운 장본인, 재상 벨리알이었다. 그의 손가락마다 박힌 화려한 보석 반지들이 촛불 아래에서 서늘하게 번뜩였다.
집무실에 있던 하급 번역관들과 필사관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며 허리를 숙였다. 하인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상의 앞으로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재상 폐하를 뵙습니다. 불시에 이천한 번역청까지 어찌 걸음을 하셨습니까.”
벨리알은 하인츠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매서운 매의 눈빛으로 집무실 구석의 아리아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비열한 미소는 보는 이의 척추를 얼어붙게 만들 만큼 서늘했다.
“번역청의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보고가 있어서 말이지. 특히 새로 들어온 하급 번역관의 능력이 아주 ‘독보적’이라기에 직접 확인하러 왔다.”
재상의 발걸음이 아리아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코트가 스칠 때마다 짙은 사향 냄새와 함께 묵직한 권력의 압박감이 아리아의 정신 장막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아리아는 차분하게 왼손의 깃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실 예법에 맞춰 완벽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급 번역관 아리아 에르하르트, 재상 폐하를 뵙습니다.”
벨리알은 아리아의 책상 위에 놓인 고대 룬 제국의 세금 장부 필사본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그의 손톱 끝이 양피지를 긁는 서늘한 마찰음이 집무실의 무거운 정적을 찢었다.
“해독력이 아주 훌륭하군. 몰락한 남작가에서 이런 천재가 나올 줄은 원로원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다. 그런데 말이지, 아리아.”
재상이 상체를 미세하게 숙이며 아리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 깊은 곳에서 예리한 의심의 불꽃이 번뜩였다.
“기묘한 우연이 있어서 묻는 거다. 네가 번역청의 수석 경쟁자인 하인츠의 오역을 폭로하며 사교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날 밤, 지하 감옥에 갇힌 네 아비 레오파드의 단두대 처형을 유예한다는 황제 폐하의 가사면 서약서가 정식 발효되었더군. 그것도 폐하의 피 묻은 옥새가 직접 찍힌 채로 말이야.”
하인츠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재상의 질문은 단순한 정황 조사가 아니었다. 아리아가 황제의 불면증을 빌미로 사적인 거래를 맺고 있음을 밝혀내어, 그녀를 이단 주술 계약죄로 기소하려는 올가미였다.
아리아는 찻잔 하나 흔들리지 않는 얼음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가슴속에 품은 엘레나의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가 미세하게 공명하며 재상이 방출하는 주술적 정신 탐지 파동을 완벽하게 교란해 주고 있었다. 아리아는 평판 세탁의 철칙 대화술을 발동해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폐하의 서약서는 황실 사법부의 정식 행정 절차를 거쳐 발효된 합법적인 문서입니다. 황제 폐하의 사적인 결정을 일낱 하급 번역관이 감히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폐하의 명령에 사소한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황권에 대한 불경이 아닐는지요, 재상 폐하.”
“불경이라?”
벨리알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리아는 황실 법률을 방패막이 삼아 재상 스스로가 황권의 권위에 도전하는 형태가 되도록 논리적 그물망을 쳐둔 것이었다. 재상은 낮게 혀를 차며 아리아의 머리 장식을 예리하게 응시했다.
“말솜씨가 아주 당돌하군. 그런데 네 그 머리칼 말이다.”
재상의 손끝이 아리아의 청색 실크 리본 근처를 가리켰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머리칼 끝자락이 은빛 백색으로 하얗게 새어 있다니. 마치 무리하게 마력을 소모해 영혼의 침식을 겪은 주술사처럼 보이지 않느냐?”
하인츠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재상 폐하! 저 자의 처소 주변에서 밤마다 기묘한 마력 반응이 감지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번역관의 탈을 쓰고 사악한 주술을 모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리아는 소매 속 마비된 오른손가락 끝을 꽉 쥐어 통증을 차단했다. 그녀는 태연하게 번역청의 두꺼운 업무 장부를 들어 올렸다.
“고대 티르 제국의 변형 룬 문자는 해독 시 대뇌의 극심한 연산 마력을 요구합니다. 번역청 행정관 에르스트 님이 승인해 주신 야간 초과 업무 일지를 보시면, 제가 지난 사흘간 하루에 단 두 시간만 자며 번역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로로 인한 일시적인 신체 쇠약과 탈색 현상일 뿐입니다. 만약 이것이 주술의 흔적이라면, 매달 번역청의 예산을 검열하시는 행정관님께서 먼저 알아차리셨겠지요.”
아리아의 시선이 저편에 서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행정관 에르스트에게 닿았다. 에르스트는 자신의 예산 집행 관리에 불똥이 튈까 두려워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재상 폐하! 아리아 번역관은 최근 외교 문서 해독을 위해 과도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주술적 징후는 결코 아닙니다.”
벨리알은 에르스트의 비굴한 태도에 차갑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리아의 책상 서랍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서랍 속에는 그녀가 필사해 둔 대현자 알베리히의 일지 노트가 숨겨져 있었다. 들키는 순간 즉각 이단 주술죄로 참수당할 치명적인 물증이었다.
그 순간, 집무실 문가에서 늙은 학자 유클리드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걸어 들어왔다.
“재상 폐하, 학술 번역청 규정 제4조에 의거하여, 정식 수색 영장 없는 학자의 개인 연구 자료 검열은 원로원의 학술 보호법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재상이라 할지라도 법을 초월하실 수는 없지요.”
유클리드 교수의 단호한 개입에 벨리알의 손끝이 멈추었다. 재상은 서랍에서 손을 거두고 밍크 코트의 깃을 매만지며 서늘하게 웃었다.
“학술 보호법이라, 아주 훌륭한 방패들을 가졌군, 아리아.”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리아에게 서늘한 경고를 남겼다.
“하지만 명심해라. 반역자의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지. 머지않아 온 제국이 뒤집힐 큰 재판이 원로원에서 열릴 터이니, 그때도 그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재상 벨리알은 하인츠를 대동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거대한 참나무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히자, 집무실을 짓누르던 무거운 정적이 서서히 걷혔다.
아리아는 재상의 위압적인 기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사정없이 떨려왔고, 내면의 정신 장막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 관자놀이에 깨질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가슴속에 품은 어머니 엘레나의 블루 사파이어 펜던트가 여전히 차가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리아는 펜던트를 움켜쥐며 차갑게 입술을 깨물었다.
의심은 시작되었고, 적들의 사법적 올가미는 이미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