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소에 숨어든 눈동자
아침 햇살이 창살 틈새로 비쳐들 때까지도 소포르궁의 침전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아리아는 침상머리에 앉아 가만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가냘픈 손목 위에는 밤새 새겨진 피의 서약 사슬 흉터가 붉은 선으로 가늘게 남아 있었다. 살갗 아래로 맥박이 뛸 때마다 그 붉은 선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위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것은 카이젠 황제가 직접 채워준 아스트랄 실버 재질의 ‘은색 룬 마법 팔찌’였다. 은은한 푸른빛이 팔찌 표면의 고대 룬 문자를 따라 흐르며, 어제 자객의 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아리아의 신경계를 차분하게 진정시켜 주고 있었다.
‘살아 있구나.’
아리아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생명력 절반을 강제로 전송받는 ‘생명 공유의 서약’의 대가는 실로 가혹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시력은 의관 휴고 베른이 처방해 준 은빛 박하 안약 덕분에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있었지만, 온몸의 마력이 고갈된 탓에 손가락 끝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귀 끝에서 삐 소리를 내는 이명이 나직하게 울렸다. 가장 심각한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잿빛이었던 머리칼 끝자락이 눈이 시릴 정도로 창백한 은빛 백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생명을 깎아 정화의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자에게 나타나는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절망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아침,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실 번역청으로 출근해야 했다. 자객 제로의 시신은 기드온 시종장과 에단 경이 흔적도 없이 치웠지만, 태후 오필리아가 보낸 밀정들은 여전히 황궁 곳곳에서 눈을 붉히고 사냥감을 찾고 있을 터였다. 아리아가 어젯밤 소포르궁에서 벌어진 참극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단 한 줄이라도 새어나간다면, 가문의 복권은커녕 아버지가 갇힌 지하 감옥에 들이닥칠 칼날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리아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전담 메이드 에밀리가 준비해 준 어두운 청색의 실크 리본으로 은빛으로 변한 머리칼 끝자락을 단단히 묶어 안쪽으로 말아 올렸다. 그리고 깃이 높게 솟은 번역청 제복의 단추를 목덜미 끝까지 채워 자객의 칼날에 긁혔던 왼쪽 어깨의 상처와 손목의 붉은 흉터를 완벽하게 감추었다. 거울 속의 아리아는 다크서클이 조금 짙을 뿐, 평소와 다름없는 냉철하고 지적인 하급 번역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리아 님.”
에밀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브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시온이 건네주었던 은탄환 호신용 권총의 감촉을 확인했다. 남은 탄환은 두 발. 소포르궁의 비밀을 지키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최후의 무기였다.
낮 동안의 번역청 제3집무실은 여전히 시기심과 먼지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리아가 책상에 앉아 낡은 사전을 펼치자, 저편에서 상급 번역관 하인츠 폰 베커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하인츠는 아리아의 머리 장식을 유심히 관찰하며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아리아는 미세한 눈동자 떨림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눈앞의 고대 조약 조항들을 판독하는 데만 몰두했다. 철저한 알리바이. 그녀는 어젯밤 자신의 처소에서 조용히 잠들었던 평범한 번역관이어야 했다.
일과가 끝나고 밤안개가 황궁의 웅장한 고딕풍 회랑을 칠흑처럼 덮기 시작했을 때야 아리아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수도 아스가르드의 차가운 밤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고요한 방이었다. 아리아가 처소의 놋쇠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그녀의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날카롭게 벼려졌다.
‘……기척이 있어.’
진위 판별의 눈이 본능적으로 가동되었다. 보이지 않는 공간의 미세한 공기 흐름,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아주 약한 금속성의 마찰음이 아리아의 이명 너머로 정밀하게 수신되었다. 방 안의 누군가가 숨을 죽이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아는 뒤를 따르던 에밀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년간 기사들의 사냥 게임에서 살아남았던 에밀리는 즉각 상황을 감지하고, 소포르궁 비밀 열쇠를 사용해 처소의 두터운 외문 자물쇠를 소리 없이 걸어 잠갔다. 안에서의 비명이나 소란이 복도를 지나는 경비병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차단한 것이었다.
아리아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두운 침실 내부, 책상 서랍 앞에 한 그림자가 kneeling(무릎을 꿇고) 서 있었다. 태후 오필리아가 아리아를 감시하기 위해 처소에 심어두었던 하녀, 그레타였다. 그레타는 얇고 날카로운 핀셋을 쥔 채, 아리아가 황제와의 비밀 서약을 보관해 둔 책상 비밀 서랍의 자물쇠를 은밀하게 따고 있었다. 서랍 틈새로 황제 카이젠의 핏빛 직인이 찍힌 ‘피의 수면 계약서’ 사본의 가장자리가 살짝 비쳐 보였다.
사각, 사각.
금속 핀셋이 자물쇠 내부의 태엽을 건드리는 미세한 소리가 정적 속에서 살벌하게 울렸다. 그레타의 등 뒤로 다가가는 아리아의 걸음걸이는 유령처럼 소리가 없었다.
탁!
아리아가 번개같이 손을 뻗어 그레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대리석 같은 아리아의 손아귀 힘에 그레타가 비명을 지르며 핀셋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레타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아, 아리아 님……!”
그레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억지로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리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무례이옵니까! 저는 그저…… 아리아 님의 서랍 주위에 먼지가 쌓여 있기에, 청소를 하려던 것뿐이옵니다! 제발 이 손을 놓아주십시오!”
그레타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아리아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진위 판별의 눈 스킬이 그레타의 얼굴을 슬로우 모션처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레타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목덜미의 미세한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가쁘게 뛰고 있었다. 뺨의 잔근육들이 경련하듯 떨리는 움직임은 그녀의 말이 100%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청소를 하는 데 핀셋으로 자물쇠 구멍을 쑤시는 하녀가 황궁에 있던가, 그레타.”
아리아의 목소리는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녀는 그레타의 손목을 더 강하게 내리눌렀다.
“황실 번역청 규정 제24조. 수석 번역관의 개인 집무 공간 및 침소의 기밀 서류를 무단 수색하거나 훼손하려 한 자는 즉각 대역죄에 준하여 사형에 처한다. 배후가 누구인지 말해. 태후궁인가?”
“아, 아닙니다! 정말 청소였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레타가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도망치려 발악했다. 그러나 이미 에밀리가 문을 걸어 잠그고 가로막고 있었다. 아리아는 그레타를 책상 벽면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거친 대치 과정에서, 아리아의 청색 제복 소매 깃이 위로 쓸려 올라갔다.
소매 아래 감춰져 있던 ‘은색 룬 마법 팔찌’의 눈부신 아스트랄 실버 광택이 어두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그 아래 새겨진 생명 공유 서약의 붉은 사슬 흉터가 그레타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황제의 최측근만이 착용할 수 있는 특별 하사품과 기묘한 주술 흔적을 본 그레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 순간, 아리아의 ‘공포의 색채 감지’ 능력이 그레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파동을 강제 수신했다.
스으으으.
그레타의 머리 뒤편으로 피어오르는 오라는 아리아가 예상했던 사악한 밀정의 검붉은 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듯한 극심한 슬픔의 회색과, 영혼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절박한 공포의 보랏빛 오라가 한데 엉킨 처절한 파동이었다. 자식을 잃어버리기 직전의 어머니가 내뿜는 듯한, 피눈물 섞인 절망의 색채였다.
아리아는 그 기괴하고 슬픈 색채의 심연을 마주하고 굳어버렸다. 이 하녀는 단순한 악독한 첩자가 아니었다. 무언가 가혹한 쇠사슬에 묶여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영혼의 비명이 오라를 통해 아리아의 뇌 신경망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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