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공유의 붉은 사슬
철제 장화 소리가 불길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포르궁의 차가운 회랑을 울리는 그 발소리는 자객의 습격을 감지하고 달려오는 경비대장 가르시아의 것이 분명했다. 바닥에 쓰러진 자객 제로의 시신은 검은 주술 연기로 타들어 가며 매캐한 악취를 풍겼고, 카이젠 황제는 오른쪽 어깨를 움켜쥔 채 검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리아 역시 마력 과부하와 어깨의 자상으로 인해 눈앞이 완전히 암전된 채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폐하! 침전 내부에서 이상한 마력 반응을 감지했습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문밖에서 가르시아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가 덜컥거리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동쳤다. 이대로 문이 열린다면 황제의 어깨에 새겨진 흑망초 주술 자상과 자객의 시신, 그리고 실명한 채 피를 흘리는 아리아의 존재가 태후 세력에게 고스란히 노출될 판이었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회랑 저편에서 가라앉은 노인의 목소리가 가르시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르시아 경. 이 밤중에 소포르궁 앞을 지키는 기사의 품격이 이리도 가벼워서야 되겠나.”
늙은 시종장 기드온의 차갑고 엄격한 음성이었다. 황궁의 모든 내명부 행정을 장악한 그의 등장은 가르시아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시종장 어른. 하지만 침전 내부에서 분명 주술 폭발의 기척이…….”
“폐하께서는 방금 깊은 수면에 드셨네. 만약 자네의 무례한 소란으로 인해 폐하의 광증이 다시 도진다면, 그 목숨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당장 경비대를 물리고 외곽 순찰이나 강화하게. 이것은 내명부 총괄로서 내리는 엄중한 경고네.”
기드온의 서슬 퍼런 포커페이스와 행정 권한 압박에 가르시아는 이를 갈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철제 장화 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침전 거울 뒤의 비밀 통로가 스르륵 열렸다.
은밀하게 안으로 잠입한 에단 브란트 경이 신속하게 문을 걸어 잠그고 방음 결계를 쳤다. 그는 바닥에 타들어 가는 자객의 시신을 보고 경악했으나, 이내 냉철함을 되찾고 품에서 특제 정화포를 꺼내 시신의 흔적을 완벽히 지워내기 시작했다.
“에단 경, 폐하의 상태가…….”
기드온이 비밀 통로를 통해 데려온 황실 의관 휴고 베른이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의학 천재 휴고는 피비린내와 검은 주술 연기로 뒤덮인 방안을 보고 안경을 치켜세웠다. 카이젠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게 타들어 가는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관…… 내가 아니다.”
카이젠이 핏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차갑게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는 통증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위엄은 여전했다.
“저 여자부터 살려라. 당장.”
황제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리아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왼쪽 어깨의 깊은 자상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마력 과부하로 인해 귀와 코끝에서도 핏방울이 흘러내려 창백한 뺨을 적시고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휴고 베른은 아리아의 상태를 진단하자마자 이마를 찌푸렸다.
“이런 미친……! 안구의 미세 신경망이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흑주술 독소에 직접 노출된 데다, 자신의 정신력을 한계 이상으로 쥐어짜 영혼의 그릇이 깨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휴고는 다급히 자신의 약상자를 열어 황실 금기 약초로 조제한 시력 보호 안약 ‘은빛 박하’를 꺼냈다. 그는 아리아의 머리를 조심스레 받치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 은빛 액체를 떨어뜨렸다.
쏴아아아.
아리아의 머릿속에서 얼음물을 부은 듯한 차가운 정화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불타는 듯 뜨겁던 optic nerve(안구 신경망)가 은빛 박하의 약효로 인해 급격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귓가를 찌르던 이명 소리도 한풀 꺾였다. 그러나 아리아의 가슴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고, 호흡은 점차 얕아졌다.
“안 됩니다, 폐하. 은빛 박하로 시력 상실의 급한 불은 껐으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 여자의 영혼 깊은 곳에 흑망초 독소가 박혀 ‘아리아의 갑작스러운 마력 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심장이 멈추려 하고 있습니다. 제 의학적 해독 약물로는 영혼에 박힌 독을 뺄 수 없습니다!”
휴고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일반적인 마법이나 약리학적 치료법은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카이젠은 침대 옆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와 아리아의 곁에 주저앉았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도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황제는 자신의 통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리아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은빛 도는 잿빛 머리칼 끝자락이 눈에 띄게 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생명을 깎아 능력을 쓴 대가로 나타나는 ‘머리칼 끝이 백색으로 변하는 현상’이었다.
카이젠의 가슴 속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한 극심한 죄책감과 고통이 몰려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광증에 미쳐 날뛰던 자신을 잠재우고, 자객의 손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 가냘픈 여자는 자신의 영혼을 등불처럼 태워버린 것이다. 피의 수면 계약은 그저 서로의 이익을 위한 차가운 비즈니스 서약이었을 뿐인데, 그녀는 왜 이토록 자신을 던져 구원하려 했단 말인가.
“비켜라, 의관.”
카이젠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핏빛 눈동자에 무섭고도 집요한 집착의 빛이 서렸다.
“폐하?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폐하의 몸도 지금 흑망초 독소로…….”
“내 몸 따위는 상관없다. 이 여자가 죽으면, 나 역시 다시 그 지옥 같은 악몽 속에서 미쳐 죽을 뿐이다.”
아니, 그것은 핑계였다. 카이젠은 단순히 안식을 잃을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이 창백한 은빛 머리칼의 여자가 사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듯한 극도의 공포를 유발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이제 그의 영혼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카이젠은 대검 데스페라도의 날카로운 날에 자신의 왼손바닥을 그었다. 붉은 선혈이 울컥 뿜어져 나왔다. 황제는 피가 흐르는 왼손을 아리아의 차가운 심장 부근에 얹었다.
“생명 공유의 서약(Shared Life Covenant)을 집행한다.”
“폐하! 그것은 황실의 절대 금기입니다! 폐하의 수명과 마력 절반이 저 여자에게 넘어가 영구적으로 동기화됩니다! 한쪽이 다치면 다른 쪽도 똑같은 타격을 입게 된단 말입니다!”
휴고 베른이 경악해 말렸으나, 카이젠의 지독한 마력은 이미 소포르궁 내부를 가득 메웠다.
황제는 황실 비전의 호흡법을 끌어올려 자신의 심장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강력한 황금빛 생명 마력을 아리아의 심장으로 강제 전송하기 시작했다.
웅웅웅-!
침전 내부의 공기가 진동하며, 두 사람의 손목에 새겨져 있던 피의 서약 사슬 흉터가 불타오르듯 붉은 인광을 뿜어냈다. 붉은 마법 사슬이 두 사람의 심장을 연결하듯 허공에 형상화되었다.
카이젠은 극심한 마력 상실과 나른함, 그리고 어깨의 독소 통증이 배가되는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이마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지만 황제는 아리아의 가슴 위에 얹은 손을 결코 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심장을 움켜쥐듯 손가락끝에 힘을 주었다.
“깨어나라, 아리아. 내 허락 없이 죽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황제의 절박하고도 집착 어린 목소리가 소포르궁의 정적을 찢었다.
그때, 카이젠은 품에서 아스트랄 실버로 정교하게 깎아 만든 ‘은색 룬 마법 팔찌’를 꺼냈다. 황제가 아리아의 정신 침식을 막기 위해 은밀히 준비해 두었던 첫 번째 선물이었다. 카이젠은 떨리는 손으로 아리아의 가냘픈 손목에 그 은빛 팔찌를 직접 채워 넣었다.
찰칵.
팔찌가 아리아의 손목에 채워지는 바로 그 순간.
팔찌에 새겨진 고대 보호 룬 문자들이 찬란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아리아의 피부 속으로 밀착되었다. 황제의 황금빛 생명 마력과 팔찌의 정화 에너지가 아리아의 멈췄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쿵-!
아리아의 차가운 가슴 속에서 묵직한 심장 박동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붉은 사슬을 타고 흐르는 황제의 생명력이 그녀의 온몸의 신경망을 타고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은빛 박하의 차가운 정화 성분과 황제의 마력이 결합하자, 아리아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열렸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칠흑 같은 암전이 걷히며, 은빛 찬란한 빛과 함께 시야가 극적으로 되돌아왔다. 아리아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이젠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땀에 젖은 흑발, 붉게 충혈된 채 자신만을 무섭도록 담고 있는 핏빛 눈동자, 그리고 절박함으로 일그러진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아리아의 눈동자에 생생하게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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