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이 분노하는 이유
눈앞은 여전히 칠흑 같은 암전(暗戰)이었다.
어깨의 자상에서 흘러내린 더운 피가 로브를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다. 귓가를 찢는 이명 속에서도 아리아 에르하르트는 숨을 멈췄다.
소포르궁의 차가운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기온의 변화가 아니었다. 피부의 모공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살기. 대지를 짓누르는 거대한 중력의 폭풍.
카이젠 황제가 깨어났다.
“……끄윽!”
황제의 목구멍을 찢고 나온 것은 맹수의 포효와도 같은 나직한 신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침전 전체를 뒤흔드는 파멸의 검붉은 마력이 해일처럼 휘몰아쳤다.
바람의 주술을 실어 아리아의 심장을 꿰뚫으려던 자객 제로의 신형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황제가 뿜어낸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자객의 궤적을 강제로 밀어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친 쇳소리가 울렸다. 황제가 침대 옆에 거치되어 있던 보검 데스페라도(Desperado)를 발도하는 소리였다.
“어떤 쥐새끼가 감히…….”
카이젠의 목소리는 피비린내로 젖어 있었다. 악몽의 고통 속에서 강제로 깨어난 폭군의 이성은 이미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불면증과 트라우마, 그리고 모르페우스 향료의 독소가 뇌를 짓누르는 ‘중증: 환각 및 피아식별 불가’의 광증 상태.
서걱-!
카이젠이 대검을 무작정 휘둘렀다. 검붉은 검기가 어둠을 가르며 소포르궁의 두꺼운 벨벳 커튼을 찢고 대리석 기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충격파로 인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리아는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오직 청각과 촉각에 의지해 비산하는 파편을 피했다. 왼쪽 어깨의 상처가 뒤틀리며 불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자객의 단검에 묻어 있던 흑망초 독소가 상처 틈새로 미세하게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독이…… 스며들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상처를 돌볼 때가 아니었다.
카이젠의 호흡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거칠었다.
하아, 하아, 하아.
미세 호흡 분석 스킬을 가동한 아리아의 머릿속에 황제의 호흡 주기가 입체적인 주파수로 그려졌다. 붉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자객 제로뿐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살기는 제로와 아리아, 침전 내부의 모든 움직이는 생명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광증에 잠식된 카이젠에게는 눈앞의 자객도, 자신을 지켜주던 수면 보좌관 아리아도 그저 자신을 도륙하려 다가오는 악몽 속의 괴물로 보일 뿐이었다.
“죽여버리겠다. 모두……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카이젠이 대검을 고쳐 쥐며 아리아가 누워 있는 방향으로 검끝을 겨누었다. 검붉은 마력이 검날을 타고 요동치며 소포르궁의 대리석 바닥을 긁는 쇳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둔다면 자객이 손을 쓰기도 전에 황제의 검날에 자신이 먼저 두 동강이 날 터였다.
‘황제의 피아식별 불가를 제어해야 해. 그의 이성을 강제로 복구시키지 못하면 우리 모두 몰살당한다.’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른손은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왼손에는 여전히 은탄환 권총이 쥐여 있었다. 하지만 총을 쏘는 것은 황제를 자극할 뿐이었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열쇠는 오직 하나, ‘피의 정신적 동조’였다.
상대방의 손을 잡거나 피를 매개로 접촉해야만 발동하는 기술.
아리아는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왼손 끝에 묻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황제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가 들리는 궤적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스스슥.
자객 제로가 황제의 빈틈을 노리고 다시 한번 단검을 던졌다. 흑망초 독이 묻은 단검들이 허공을 가르며 카이젠의 시야를 차단하듯 날아갔다.
챙-! 채앵-!
카이젠은 광포하게 검을 휘둘러 단검들을 튕겨냈다. 그 반동으로 황제의 신형이 아리아가 쓰러져 있는 침대 모퉁이 근처로 비틀거렸다.
‘지금이야.’
아리아는 몸을 날려 황제의 뜨거운 발목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피가 묻은 그녀의 손가락 끝이 카이젠의 단단한 장화 위쪽, 살갗이 드러난 발목 피부에 닿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두 사람의 피가 닿는 순간, 피의 계약에 새겨진 마법적인 사슬이 작동하며 강렬한 빛의 결계가 두 사람의 영혼을 강제로 연결했다.
아리아의 의식이 순식간에 현실의 암전을 이탈해 카이젠의 붉게 타오르는 정신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현실보다 더 끔찍한 전장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검은 안개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고, 어린 시절의 카이젠이 검은 가시덩굴에 묶인 채 울부짖고 있었다. 그 위로 거대한 환각의 괴수들이 대검을 들고 소년을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황제의 현실 뇌 신경망은 이미 이 가짜 환각들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당한 상태였다.
‘폐하, 제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아리아는 자신의 정신체에서 맑고 차가운 은빛 마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일시적 오감 전이’ 기술을 가동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현실의 감각—어깨의 찌르는 듯한 통증,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감촉, 그리고 가문 저택 정원에서 동생 시온과 함께 걷던 푸르고 평화로운 숲의 온기를 황제의 불타는 뇌 신경 속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다.
[……윽?!]
카이젠의 무의식이 거세게 요동쳤다. 폭력적인 검붉은 마력 속으로 은빛의 정화 에너지가 침투하자, 황제의 환각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환각 극복의 이성’ 기술을 발동했다. 황제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검은 괴수들의 형상이 가짜임을, 태후 오필리아가 심어놓은 주술적 허상일 뿐임을 그의 영혼에 대고 논리적인 주파수로 각인시켰다.
‘눈앞의 적은 환각이 아닙니다. 폐하를 시해하려 침투한 실제 자객입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카이젠!’
쿵, 쿵, 쿵.
피의 동조선을 타고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하나로 공명했다. 황제의 뇌를 지배하던 광증의 안개가 은빛 온기에 녹아내리듯 걷혀 나갔다.
현실의 소포르궁 침전 내부.
카이젠 황제의 초점이 풀려 있던 핏빛 눈동자에 마침내 차가운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그의 검끝이 아리아를 비껴나,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기습하려 도약하던 자객 제로를 정확히 겨누었다.
“……찾았다, 쥐새끼.”
카이젠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피아식별 능력을 되찾은 폭군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황제는 대검 데스페라도를 양손으로 쥐고, 대지를 가르는 듯한 참격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검붉은 검기가 자객의 바람의 결계를 단숨에 찢어발기며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크하악!”
자객 제로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벽면에 처참하게 부딪혔다. 그의 검은 복면 사이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제로는 어떻게든 도망치려 그림자 이동술을 시전하려 했으나, 이미 카이젠이 방출한 파멸 마력의 억압 결계에 묶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젠은 자비 없이 걸어갔다. 그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릴 때마다 자객의 종말이 다가왔다.
스윽.
황제가 대검을 들어 올려, 벽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는 제로의 심장을 겨누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물을 필요도 없겠군. 그 천박한 주술 냄새는 여전하니까.”
카이젠은 검을 내리꽂았다.
푸학-!
데스페라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자객 제로의 심장을 가차 없이 관통했다. 그것은 완벽한 처단이었다.
그러나 자객의 숨통이 끊어지는 바로 그 찰나.
제로의 심장 내부에 심어져 있던 마지막 발악용 주술 장치—사제 말루스가 걸어둔 ‘흑망초 독소의 폭발 결계’가 작동했다.
파아아앙-!
자객의 가슴 상처 틈새로 검붉은 주술 연기와 함께 치명적인 흑주술 독소가 사방으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 기괴한 독소 안개는 중력을 거스르듯 카이젠의 칼날을 타고 역류하여, 자객과의 혈투 과정에서 가볍게 긁혔던 황제의 오른쪽 어깨 상처 속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아아악!”
평생 어떤 고통에도 신음 한 번 내지 않던 냉혹한 폭군 카이젠이, 어깨를 움켜쥐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검은 독소 연기가 그의 어깨 살을 태우듯 피어올랐고, 황제는 검을 떨어뜨린 채 바닥으로 쓰러져 고통스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