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 속의 침입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떴으나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질척이고 무거운 칠흑뿐이었다. 아리아 에르하르트는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허파를 가득 채우는 것은 황궁 침전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섞여 있는 기묘하게 달콤하고 매캐한 단내였다. 태후 오필리아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주술적 독소, 모르페우스 향료의 냄새였다.
악몽의 침식이 가져온 부작용은 가혹했다. 안구 뒤편의 신경망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 끝에 찾아온 ‘일시적 실명 사태’. 붉은 핏방울이 눈가에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명은 고막을 찢을 듯이 삐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고, 오른손 끝은 얼어붙은 석조상처럼 단단히 굳어 감각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패닉에 빠지면 죽어.’
아리아는 마음속으로 은빛 유리벽을 세웠다. 어머니의 유산인 감정 통제 명상법을 떠올리며 강제로 심장 박동을 내리눌렀다.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은 최악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러웠다. 꿈속에서는 카이젠 황제의 트라우마가 빚어낸 거대한 핏빛 괴수와 검은 가시덩굴이 날뛰고 있었고,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 자객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칵, 사각.
소포르궁의 두꺼운 벨벳 커튼 너머, 놋쇠 문고리가 미세하게 회전하는 서늘한 마찰음이 고막을 스쳤다. 일반적인 인간의 귀라면 결코 알아채지 못했을 미세한 소리였다. 하지만 시각을 완전히 상실한 아리아의 청각 신경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침입자였다.
태후 오필리아가 보낸 사일런트 길드의 일류 자객, 암살자 제로가 결계를 우회하여 황제의 침전 안으로 침투한 것이 분명했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스며드는 자의 살기가 피부를 따갑게 찔렀다.
‘도망칠 수는 없어. 발목은 뒤틀렸고, 앞은 보이지 않으며, 오른손은 마비되었다.’
아리아는 침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물리적 저항 수단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남동생 시온이 황궁 내부의 위협에 대비해 그녀의 로브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숨겨주었던 소형 마법 무기, 은탄환 호신용 권총.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리아는 마비되지 않은 왼손을 아주 느리게,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로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끝에 권총의 차갑고 단단한 강철 그립이 닿았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자, 시온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명 너머로 겹쳐 들리는 듯했다.
- 누나, 이건 주술을 무력화하는 특제 은탄환이 들어있어. 딱 세 발뿐이니까, 정말로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만 써야 해.
세 발. 기회는 단 세 번뿐이었다. 하지만 눈이 먼 상태에서 허공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자객이 자신의 실명 상태를 눈치채는 순간, 암살의 칼날은 한층 더 신속하고 가혹하게 심장을 뚫을 터였다.
‘적을 방심하게 만들어야 해.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객이 확신하는 순간, 가장 가까이 다가올 때를 노린다.’
아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무의식의 노이즈 차단 필터링 기술을 작동시켰다. 소포르궁 외곽에서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 정원의 나뭇잎 흔들림, 심지어 자신의 요동치는 심장 소리까지 대뇌 속에서 완벽하게 음소거하듯 지워버렸다. 오직 침전 내부의 공간만을 고요한 진공 상태로 만들어 미세한 기척을 추적했다.
스스슥.
침전 바닥의 두꺼운 카펫이 아주 미세하게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반적인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공기의 흐름을 최소화하며 은밀하게 전진하는 무음 잠입술이었다. 이와 동시에, 아리아의 진화한 오감 감응 능력이 공기 중에 섞여 있는 기묘한 냄새를 잡아냈다.
‘흑망초…….’
대상을 순식간에 마비시키고 심장을 멈추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약의 냄새였다. 자객 제로가 단검 끝에 독을 바르고 다가오고 있음이 확실했다.
아리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정화의 룬 문자를 시전해 보려 시도했다. 머릿속으로 에르하르트 사전에 적힌 은빛 룬 문자 ‘솔(Sol)’의 도식을 떠올리며 왼손 끝에 마력을 모았다.
‘정화되어라……!’
그러나 시각이 차단된 상태에서 마력의 주파수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릿속의 이미지가 미세하게 흐트러지자, 손끝에 모였던 은빛 마력이 정밀한 궤적을 그리지 못하고 피쉭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아윽……!”
마법 폭주의 반동으로 인해 왼손 가운뎃손가락 끝에 불타는 듯한 경미한 화상 통증이 일었다. 은빛 마력의 잔해가 허무하게 사그라지며 대뇌로 가혹한 편두통이 역류했다. 마법적 정화는 실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품속의 은빛 권총 한 자루뿐이었다.
저벅.
자객의 기척이 침대 우측, 정확히 세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미세 호흡 분석 스킬을 가동한 아리아의 머릿속에 자객의 움직임이 입체적인 기류의 흔적으로 도식화되어 그려졌다.
흡, 흡, 흡.
세 번의 얕은 호흡 주기. 자객은 침대 위에 누워 신음하는 황제 카이젠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듯했다. 황제가 모르페우스 향료의 독소로 인해 악몽 속에서 깊이 마비되어 깨어나지 못함을 확인한 자객이, 이내 몸을 돌려 침대 가장자리에 굳어 있는 아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늘한 살기가 아리아의 이마를 관통하듯 쏟아졌다.
자객 제로는 아리아가 초점이 풀린 창백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눈가에 흐르는 핏자국과 굳어버린 오른손. 그는 아리아가 악몽 동조의 부작용으로 실명 상태에 빠져 저항할 힘이 없음을 확신했다.
스윽.
자객의 소매 자락에서 흑망초 독이 푸르게 빛나는 단검이 미끄러져 나왔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바람의 주술을 검날에 실어 아리아의 목덜미를 향해 단숨에 칼날을 내리쳤다.
바람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아리아의 청각을 강타했다.
‘지금이야!’
아리아는 소리 없이 왼손을 옷자락 밖으로 꺼내며, 오직 자객의 미세한 숨소리와 공기의 찢어짐이 느껴지는 궤적을 향해 은탄환 권총의 총구를 겨누었다. 시각이 차단된 세계 속에서, 그녀의 정신은 오직 자객의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리는 좌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탕-!
침전의 정적을 깨뜨리며 굉음과 함께 은빛 섬광이 폭발했다. 권총에서 발사된 특제 은탄환이 밤의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다.
“……윽?!”
자객 제로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실명한 몰락 영애가 자신을 정확히 조준해 총을 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은탄환에 코팅된 주술 무력화 은 성분이 공기 중으로 비산하며, 제로의 단검에 실려 있던 바람의 주술 결계를 단숨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퍼엉!
마력의 충돌로 인해 강렬한 충격파가 소포르궁 내부를 뒤흔들었다. 은탄환은 제로의 어깨 가죽 갑옷을 꿰뚫고 그의 마력 흐름을 일시적으로 완전히 흐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류 자객의 신체 반응 속도는 아리아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제로는 탄환에 직격당해 치명상을 입기 직전, 몸을 비틀어 궤적을 최소한으로 피했다.
서걱-!
주술이 깨진 제로의 단검 끝이 아리아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은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얇은 로브 깃이 무참히 찢겨 나갔고, 이내 살갗이 베이며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은빛 실크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아윽……!”
어깨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자상의 고통에 아리아는 신음을 삼키며 뒤로 비틀거렸다. 귀에서는 삐 소리가 폭발하듯 강해지며 이명 증상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시각이 없는 상태에서 가해지는 통증은 한층 더 입체적이고 가혹하게 느껴졌다.
제로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차갑게 분노했다. 마력이 강제로 차단당한 충격으로 인해 그의 검은 복면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이 먼 상태에서 이 정도의 저격이라니…… 얕보았군, 에르하르트 남작 영애.”
자객의 목소리에는 이제 방심이 아닌, 반드시 대상을 지워버리겠다는 냉혹한 살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른손의 단검을 고쳐 쥐며, 아리아의 심장을 향해 두 번째 참격을 가하기 위해 바람처럼 도약했다.
서늘한 칼날이 아리아의 얇은 로브를 찢고 심장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순간.
쿠구구구궁-!
소포르궁의 대리석 바닥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폭발적인 진동이 침전 전체를 장악했다.
침대 위에서 악몽의 가시에 갇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카이젠 황제의 전신에서, 피비린내 나는 검붉은색 파멸 마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번쩍 뜨이며, 어둠 속에서 오직 살의로 가득 찬 핏빛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였다.
폭군이, 마침내 악몽의 심연에서 깨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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