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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 전야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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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압류 인장이 찍힌 에르하르트 남작 저택의 대문은 차가운 가을 안개 속에서 괴괴한 비명처럼 삐걱였다. 한때 제국 원로원의 기둥이자 고대어 해석의 명가로 불리던 가문의 영광은 흔적도 없었다. 남은 것은 사방을 메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가산을 몰수당한 채 쫓겨난 가신들의 쓸쓸한 발소리뿐이었다.


아리아 에르하르트는 벽난로의 꺼져가는 불씨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두꺼운 가죽 표지의 ‘에르하르트 고어 사전’이 놓여 있었다. 창백한 뺨 위로 드리운 잿빛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슬퍼하거나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사치였다.


“누나.”


문이 열리며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청년이 안개를 몰고 들어왔다. 기사 지망생이었으나 가문의 몰락과 함께 칼을 내려놓고 뒷골목의 정보상으로 투신한 남동생, 시온 에르하르트였다. 그의 잿빛 머리칼은 땀과 흙먼지로 젖어 있었고, 날카로운 눈매에는 극도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황실 행정청은 어땠어? 재상의 결재를 받았나?”


아리아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시온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반역자의 자식이라며 정문에서 쫓겨났어. 벨리알 재상의 사냥개들이 행정원 입구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더군. 탄원서는커녕 면담 신청서 한 장 접수하지 못했어. 그리고…….”


시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단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지하 감옥의 정보원에 따르면, 아버지의 참수형이 내일 새벽으로 앞당겨졌어. 수도 중앙 광장에는 이미 단두대가 세워지고 있다더군. 재상 세력이 손을 쓴 거야. 아버지가 법정에서 입을 열기 전에 영원히 침묵시키려는 거지.”


단두대. 내일 새벽.


아리아의 손가락이 가죽 사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으나, 그녀의 호흡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감정에 휘둘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무능한 자들의 도피처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이성적인 해결책이었다.


“정공법은 통하지 않아. 벨리알 재상이 법과 제도를 손에 쥐고 가문을 압살하려 하니까.”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무릎 위의 사전을 내려다보았다. 에르하르트 가문은 대대로 영혼의 감응 능력을 숨겨온 혈통이었다. 타인의 신체에 접촉하면 그가 느끼는 감정을 기묘한 색채로 시각화하여 읽어내는 힘. 하지만 그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곧 신전의 이단 심문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이었기에, 가문은 이를 철저히 숨긴 채 단순한 ‘천재 번역가’의 가문으로 위장해 왔다.


아리아는 사전 표지 안쪽의 가문 인장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스스스.


가죽 표지 이면의 마법 실타래가 풀리며, 사전 안쪽에 숨겨져 있던 은밀한 페이지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룬 제국 ‘티르’의 방언들과 함께, 어머니 엘레나가 남긴 정신 감응 제어 비책이 정교하게 적혀 있었다.


‘심연의 불꽃을 잠재울 자, 은빛의 언어로 영혼을 노래하리라.’


선조 루카스가 남긴 예언과 함께, 타인의 정신에 깊이 침투하여 폭주하는 감정을 정화하는 구체적인 공식들이 빼곡했다. 아리아는 직감했다. 이것이 아버지를 살릴 유일한 열쇠였다.


현재 발할라 제국의 황제 카이젠은 불면증으로 인한 광증에 걸려 있었다. 매일 밤 참혹한 악몽에 시달리며 이성을 잃고 칼을 휘두르는 폭군. 그의 광증이 심해질수록 제국의 권력은 태후 오필리아와 재상 벨리알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만약 황제의 악몽을 대신 짊어지고 그에게 안식을 줄 수 있다면, 황제의 절대적인 황권으로 아버지의 사면장을 받아낼 수 있을 터였다.


“시온. 에단 경에게 연락해.”


“에단 경? 황실 의장대장인 그분이 우리를 도울 리가…….”


“도울 거야. 그분은 너의 옛 스승이자, 재상 세력이 황실을 장악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충신이니까. 기드온 시종장이 내게 건넸던 소포르궁의 비밀 통로 열쇠를 사용할 때가 왔어.”


아리아는 사전 표지 뒤에 숨겨진 낡은 구리 열쇠를 꺼내 품에 안았다. 밤 10시가 넘어가자, 수도 아스가르드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시온의 날렵한 은신 안내를 받으며 황궁 서쪽 뒷문으로 접근한 아리아는 에단 브란트 경과 마주했다. 붉은 제복을 입은 은발의 기사는 안개 속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남작 영애. 지금 하려는 짓은 대역죄에 해당하오. 황제의 침전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자는 즉각 참수요.”


“에단 경. 아버지는 내일 새벽 단두대에 서십니다. 제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의 광증을 잠재울 비책이 제게 있습니다. 실패한다면 그 자리에서 저를 베셔도 좋습니다.”


아리아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한 에단 경은 침묵했다. 이윽고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옆으로 비켜섰다.


“교대 시간까지 정확히 5분이오. 서쪽 회랑의 전신거울 뒤 비밀 통로를 통과하시오. 그곳부터는 나도 손을 쓸 수 없소.”


“감사합니다, 에단 경.”


아리아는 낡은 가죽 사전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소포르궁 비밀 열쇠를 쥐고 거울 뒤의 좁고 어두운 통로로 발을 들였다. 벽면은 소리를 흡수하는 차가운 석조로 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숨이 막힐 듯한 비명과 피비린내 나는 주술적 악몽의 독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황제의 불면증이 단순한 병이 아님을 증명하는 기괴한 기운이었다.


아리아는 오감 차단 호흡법을 가동해 내면의 마력 장막을 세우며 한 걸음씩 전진했다. 마침내 통로의 끝, 소포르궁 침전의 대형 전신거울 뒤 비밀 문에 도달했다. 열쇠를 꽂고 조심스럽게 돌리자, 찰칵하는 미세한 금속음과 함께 거울이 회전하며 황제의 침실이 나타났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웅장하고 칠흑 같은 공간. 사방을 뒤덮은 두꺼운 검은 벨벳 커튼과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어둠 속에서 괴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침대 주변에는 기괴한 검은 안개가 서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폐하…….’


아리아가 침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스으윽.


어둠 속에서 공기의 흐름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잠든 줄 알았던 형체가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금속음과 함께, 어둠을 가르는 푸른 검기가 아리아의 목덜미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눈을 뜨는 것조차 두려운 폭군의 핏빛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쥐새끼가 기어들어 왔군.”


카이젠 황제의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이 아리아의 귓가를 때렸다. 얼음보다 차가운 대검의 칼날이 그녀의 목 피부를 짓누르며 붉은 핏방울을 자아냈다. 숨을 쉴 때마다 칼날의 살기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폭군의 무자비한 살육 본능이 그녀의 숨통을 완벽하게 틀어쥐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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