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배를 피하는 졸음의 미학
청명검종의 장문전 ‘청명각’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등불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라면 장로들의 근엄한 헛기침 소리와 엄숙한 가풍만이 감돌던 이곳이, 오늘은 온통 향기로운 음식 냄새와 제자들의 흥분 섞인 웃음소리로 들썩였다. 대연무장에서 터져 나온 천년 영맥의 기운과, 낮에 펼쳐진 한시우의 ‘천기진법도’ 해독 사건을 축하하기 위한 공식 연회가 열린 것이다.
연회장 가장 높은 상석에는 청명검종의 태상장로 독고엽과 철면장로 위지관이 자리했고, 그 바로 옆에 오늘 축하의 주인공인 대사형 한시우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시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집에 가고 싶다…….’
시우는 눈을 반쯤 감은 채, 턱을 괴고 멍하니 탁자 위의 편육을 바라보았다. 밤새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잠을 설친 탓에 그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퀭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무겁고 쑤셨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제들의 눈빛은 완전히 달랐다.
“보아라. 대사형의 저 무심한 풍모를.”
“온 무림이 경악할 천기진법도를 해독하시고도, 일말의 자만심조차 보이지 않으시는구나. 참으로 도를 깨달은 자의 고독이 느껴지는 눈빛이로다.”
진소희 사매는 아예 품속에서 두꺼운 공책과 붓을 꺼내 들고 시우의 게으른 자세를 정성스럽게 필기하기 시작했다. 제갈우진 역시 시우의 흐릿한 눈빛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형께서는 지금 눈앞의 화려한 연회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시고, 단전의 기운을 우주의 흐름과 공명시키는 고도의 무심공(無心功)을 펼치고 계신 것이 분명하오. 참으로 부끄럽소. 나 같은 범인은 고기 냄새에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시우는 귀를 막고 싶었다.
‘아니야, 미친놈들아…… 그냥 졸려서 죽을 것 같고, 고기 씹을 힘도 없어서 멍 때리는 거야…….’
시우는 소매 속에 숨겨둔 퇴직금 명세서를 슬쩍 만져보았다. 은자 50냥을 받아 고향으로 야반도주하려던 계획이 이 미친 광신도 사제들 때문에 완전히 꼬여버렸다. 어떻게든 이 지루한 연회가 끝나면 밤을 틈타 장부실의 금고를 털어서라도 도망쳐야 했다.
바로 그때, 연회장 구석의 어두운 음지에서 누군가의 매서운 시선이 시우의 목덜미를 찔렀다.
주화입마의 충격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채 억지로 연회에 참석한 이장로 오진태였다. 그의 매부리코가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 오수호를 대사형으로 세우려던 평생의 계획이, 저 낡은 잡역부 녀석의 황당한 침방울 낙서 하나에 완전히 박살 났다. 무공 시험을 통해 끌어내리려던 합법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한시우…… 네놈이 아무리 천기를 읽는 괴물이라 할지라도, 이 독 앞에서는 평범한 시체일 뿐이다.’
오진태는 품속에서 작은 은빛 병을 꺼내 손가락 끝에 묻혔다. 사천당가에서 파문당한 독공 전문가 당뇌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구해온 무색무취의 극독, ‘망우산(忘憂散)’이었다. 이 독은 마시는 즉시 단전의 기를 얼려버리고 심장을 멈추게 만들며, 사후에도 독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 절대의 기물이었다.
오진태는 자신의 심복 시종에게 은밀히 지령을 내렸다. 시종은 긴장한 손길로 시우의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거두고, 새로 끓인 뜨거운 벽라춘 차에 독을 타서 시우의 자리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대사형, 피로를 풀어줄 따뜻한 차이옵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으나, 시우는 그것을 눈치챌 여유가 없었다. 쏟아지는 졸음이 그의 뇌를 마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진짜 졸리다…… 한숨만 딱 잤으면 좋겠네…….’
시우는 몽롱한 정신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오진태의 손에 땀이 쥐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시우의 손끝을 쫓았다.
‘마셔라! 마시고 지옥으로 가거라!’
시우의 손가락이 찻잔의 손잡이에 닿으려던 찰나, 시우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0.1초 동안 완벽한 무의식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의 손끝이 찻잔을 스치며 차가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철면장로 위지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오……! 대사형의 손끝이 잔에 닿기 직전 멈추었구나! 저것은 단순한 졸음이 아니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흐르는 독기(毒氣)를 감지하고, 육체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영적 감각이로다!’
위지관은 감동에 겨워 침을 삼켰다.
시우는 꿈을 꾸고 있었다. 고향 감자밭에서 아버지가 키우던 멧돼지가 기어 나와 자신의 소중한 감자 싹을 갉아먹는 꿈이었다. 꿈속의 시우는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이 돼지 새끼가 어디서 감자를 처먹어!”
그리고 꿈속에서 멧돼지의 엉덩이를 향해 힘차게 오른발을 내질렀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한시우는 무거운 참나무 연회 탁자 밑에서 다리를 꼬려다가, 엄청난 힘(하체만 쓸데없이 튼튼해진 외문 제자 수준의 근력)으로 탁자의 단단한 다리를 정확하게 걷어차 버렸다.
“쾅!”
육중한 참나무 탁자가 비명을 지르며 크게 흔들렸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접시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오진태가 독을 타 놓은 찻잔은 그 반동으로 허공으로 붕 떴다.
“앗!”
오진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공중으로 날아간 찻잔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청석 바닥에 부딪히며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박살이 났다. 짙은 벽라춘 찻물이 바닥으로 사방에 흩뿌려졌다.
시우는 탁자 다리를 걷어찬 충격과 날카로운 파열음에 놀라 번쩍 눈을 떴다. 발가락이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주변 사제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억지로 아픔을 참으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고통과 억울함으로 파랗게 질려갔다.
제자들은 시우의 그 굳어버린 표정을 보며 또다시 경악했다.
“보았는가? 대사형께서 눈을 감으신 채 발끝의 미세한 진동만으로 탁자를 쳐서 독배를 깨뜨리셨다!”
“검을 쓰지 않고도 적의 살기를 물리적으로 튕겨내시다니, 이것이 바로 형태가 없는 무형검의 극의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오진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내 독살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저 녀석은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괴물인가?’
오진태의 전신이 공포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연회장 문을 통해 오진태가 지극히 아끼고 자랑하던 영악한 사냥개 ‘흑호’가 꼬리를 흔들며 들어왔다. 평소 사냥터에서 주인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던 영물이었다. 흑호는 바닥에 흘러내린 향기로운 벽라춘 찻물의 냄새를 맡더니, 아무런 의심 없이 혀를 내밀어 바닥의 찻물을 딱 한 번 핥았다.
그리고 1초 뒤.
“캑!”
흑호는 단 한 번의 비명만을 남긴 채, 다리를 하늘을 향해 꼿꼿이 뻗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고, 눈동자는 순식간에 하얗게 뒤집혔다. 즉사였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물에 잠긴 듯 조용해졌다.
“독이다! 차에 독이 들어있다!”
위지관 장로가 대포 같은 사자후를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철면피 같은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제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잡으며 연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시우는 바닥에 즉사해 있는 사냥개를 보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 방금 저 차를 내가 마시려고 했던 거야? 마셨으면 나도 저 개처럼 다리를 뻗고 즉사했을 거 아냐!’
시우는 너무 무서워서 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척추를 타고 내려가는 지독한 오한에 그는 탁자를 붙잡고 겨우 버텼다.
위지관 장로는 쓰러진 사냥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채고, 오진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장로! 저 사냥개는 네놈이 아끼던 개가 아닌가! 감히 대사형을 독살하려 이 신성한 장문각 연회에 극독을 풀었단 말이냐!”
“아, 아니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저 개가 왜 저기서 차를 마셨는지……!”
오진태는 횡설수설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늙은 회계 서기 이만수가 낡은 가죽 장부를 품에 안고 헐레벌떡 걸어 들어왔다. 이만수는 바닥의 독살 현장과 오진태를 번갈아 보더니, 단상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태상장로님, 철면장로님! 소인이 올릴 보고가 있사옵니다! 오늘 낮에 대사형 한시우께서 회계실에서 졸다가 엎지르신 먹물 자국을 정밀하게 분석해 본 결과,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이만수는 품속에서 먹물이 잔뜩 묻은 비밀 장부를 펼쳐 보였다.
“대사형께서 먹물을 엎지르신 자리가 정확히 이장로 오진태가 지난 십 년간 문파의 공금을 횡령하고 가짜 영수증을 첨부해 숨겨두었던 이중 장부의 핵심 금액란이었습니다! 먹물이 그 비리 구역만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가려 지워버린 덕분에, 소인이 오진태의 거대한 재정 비리를 완벽하게 적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연회장에 모인 제자들과 장로들의 눈이 뒤집혔다.
“오진태! 네놈이 문파의 공금을 횡령한 것도 모자라, 비리가 들통날까 봐 대사형을 독살하려 음모를 꾸몄구나!”
“참으로 사악하고 비열한 자로다! 대사형께서는 이미 너의 횡령과 독살 음모를 모두 꿰뚫어 보시고, 먹물 한 방울과 발차기 한 번으로 문파의 재정과 자신의 목숨을 모두 구원하신 것이다!”
위지관의 준엄한 호통 소리에 오진태는 단전의 기가 완전히 뒤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이것은 음모다…… 저 잡역부 녀석이 어떻게 내 이중 장부를 안단 말이냐! 저놈은 괴물이다! 사람이 아니다!”
오진태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그의 비리와 독살 물증(사냥개의 즉사)은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였다. 호위 무사들이 들이닥쳐 오진태의 전신 혈도를 제압하고 무자비하게 포박했다.
“오진태를 지하 깊은 감옥에 가두고, 그의 가솔들을 모두 압수수색하라! 청명검종의 가풍을 더럽힌 역도는 결코 용서치 않는다!”
독고엽 태상장로의 준엄한 명령과 함께 오진태는 비참하게 질질 끌려 나갔다.
시우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내가 장부실에서 졸다가 먹물 엎지른 게…… 저 양반 횡령 장부였다고?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독을 탄 거였어?’
모든 황당한 인과관계가 머릿속에서 맞춰지는 순간, 시우는 신을 원망하고 싶었다. 자신이 저지른 멍청한 실수가 또다시 문파를 구한 위대한 구국의 결단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이제 그의 대사형 지위는 그 어떤 힘으로도 흔들 수 없는 철옹성이 되어 버렸다. 은퇴와 도망은커녕, 문파의 모든 눈과 귀가 그를 향해 더 단단히 조여올 것이 분명했다.
시우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사제들은 그의 어깨 떨림을 ‘역도를 처단한 자의 준엄한 분노’로 해석하며 일제히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연회장 정문이 거칠게 열리며, 오진태의 아들이자 청명검종의 이등 천재 오수호와 수석 검객 백운하가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수호의 눈은 아버지의 체포 소식에 분노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백운하의 손은 허리에 찬 명검 청풍검의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오수호가 시우를 가리키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한시우! 네놈이 고도의 음모로 내 아버님을 모함해 가두었다! 내 오늘 전 사제들 앞에서 네놈의 그 가짜 천재 실력을 백일하에 밝혀내고 말겠다!”
백운하 역시 검을 반쯤 뽑아 들며 시우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대사형. 진정한 지존이시라면, 비겁하게 장부나 흔들지 마시고 대연무장에서 검으로 우리를 굴복시켜 보십시오!”
두 천재 제자의 서슬 퍼런 도전장과 살기 어린 안광이 시우의 가슴을 정통으로 찔렀다. 시우는 다리가 풀려 쓰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속으로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엄마…… 나 진짜 집에 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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