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가 완성한 천년의 진법
새벽안개가 청명검종의 뒤뜰 창고방 문틈새로 가늘게 스며들 때, 한시우는 이미 모든 짐을 완벽하게 싸 둔 상태였다.
등 뒤에 멘 조그만 천 봇짐 속에는 낡은 삼베옷 한 벌과 고향 아버지가 보내주었던 마른 감자 몇 알, 그리고 그의 유일한 보물이자 탈출의 희망인 은자 50냥을 수령할 퇴직금 명세서가 들어 있었다.
시우는 방구석에 앉아 자신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정말이지 내 평생 이토록 완벽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던가?’
어제 치렀던 백련각의 무학 필기시험. 시우는 장로들의 억까식 과대해석을 피하기 위해 아예 학술적 가치라고는 단 1푼도 없는 ‘감자 낙서’를 제출했다. 동그라미를 제멋대로 그리고, 싹이 튼 구멍들을 표시한 뒤, 결정타로 ‘모르겠소, 감자나 주시오’라는 희대의 불성실한 문장까지 갈겨썼다. 게다가 졸다가 침까지 흘려 먹물을 사방으로 번지게 만들었으니, 이건 채점관의 뺨을 때린 수준의 모독이었다.
아무리 청명검종의 장로들이 착각의 신이라 할지라도, 문파의 권위를 정면으로 모욕한 낙서장까지 ‘대사의 깨달음’으로 포장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오늘 아침 채점 결과가 발표되면, 오진태 장로가 거품을 물고 나를 파문하겠지. 그럼 나는 억울한 척 눈물을 흘리며 퇴직금 50냥을 챙겨 당당하게 고향 감자밭으로 돌아가는 거다!’
시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창고방 문을 열었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대연무장에는 이미 수많은 제자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연무장 중앙의 채점 단상 위에는 이장로 오진태가 서슬 퍼런 얼굴로 시우의 낙서 답안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제갈세가의 천재 지략가 사제 제갈우진과, 밤샘 연구로 인해 머리가 둥지처럼 헝클어진 분석형 천재 육청풍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시우는 일부러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지독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졸린 눈빛을 한 채 터덜터덜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대사형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지기의 외침과 함께 연무장에 모인 사제들이 일제히 길을 터주었다. 제자들은 시우의 무기력한 걸음걸이를 보며 속닥거렸다.
“보아라, 대사형의 저 초연한 풍모를.”
“시험의 당락 따위는 이미 초탈하신 게 분명해.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자연의 흐름이 담겨 있구나.”
시우는 속으로 코방귀를 꼈다.
‘마음껏 떠들어라,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시우가 단상 앞에 멈춰 서자, 오진태 장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우의 낙서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시우! 너는 청명검종의 대사형이라는 막중한 직위에 있으면서도, 신성한 무학 검증 시험에서 이토록 해괴망측한 낙서를 제출했다! 이것은 시험관들을 모독하고 문파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죄! 규율에 따라 즉시 대사형의 직위를 박탈하고 파문해야 마땅하거늘!”
오진태의 호통 소리가 연무장을 웅장하게 울렸다. 시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왔다! 드디어 파문 선언이다! 어서 퇴직금 주머니를 내놓아라!’
시우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리석도다! 이장로여! 당신의 그 얕은 안목이 정녕 원망스럽소!”
단상 옆에 서 있던 제갈우진이 돌연 사자후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의 붉게 충혈된 안광이 오진태를 꿰뚫어 볼 듯이 번뜩였다.
오진태가 당황하여 멈칫했다.
“제, 제갈 사제?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무례라니요! 지금 천하제일의 비전이 눈앞에 있거늘, 그것을 낙서라 칭하며 문파의 보물을 내버리려 하시다니요!”
제갈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시우의 낙서장을 빼앗아 들고 대연무장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칠판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품속에서 백필을 꺼내 시우가 그린 감자 그림과 동그라미들을 칠판 위에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기 시작했다.
“보시오! 대사형께서 그리신 이 거대한 중심 원은 단순한 둥근 도형이 아니오! 이것은 우주의 태초이자 기맥의 시작인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형상이오! 그리고 이 원 표면에 불규칙하게 돋아난 싹들의 위치를 제갈세가의 기문둔갑 수식으로 환산해 보았소!”
제갈우진의 손가락이 칠판 위의 동그라미들을 빠르게 짚었다.
“남동 삼십이 도, 수직 구십 도…… 이 배치는 천년 동안 그 누구도 해독하지 못했던 청명산 대지맥의 꼬인 혈도들을 완벽하게 우회하는 ‘천기혈(天機穴)’의 제어 좌표와 소름 돋게 일치하오! 대사형께서는 단 한 장의 그림으로 청명검종의 막힌 기맥을 완벽히 제어하는 진법을 완성하신 것이오!”
연무장에 모인 제자들과 장로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우는 칠판을 바라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니, 미친놈아…… 그건 그냥 어제 주방에서 먹다 남은 썩은 감자 싹 구멍인데…… 그걸 왜 기문둔갑 수식으로 계산하고 자빠졌어?’
그러나 착각의 폭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밤새 연산기를 두드렸던 분석형 천재 육청풍이 단상 위로 기어 오르다시피 뛰어올라 소리쳤다.
“제갈 사제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중앙의 거대한 먹물 번짐과 침 자국입니다!”
육청풍은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시우가 졸다가 흘린 침과 먹물이 번진 자리를 가리켰다.
“이 번진 자국의 밀도와 확산 궤적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이것은 백 년 전 실전된 검선 소화선인의 ‘소화유선검(消華流仙劍)’의 마지막 초식 궤적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검선께서는 후대인들을 낚기 위해 비급에 수많은 함정 구결을 파두셨는데, 대사형께서는 오물과 침의 번짐을 통해 그 함정 구절들을 정확하게 가려 지워버리신 겁니다! 이 번짐이야말로 진짜 비전을 해독하는 열쇠였습니다!”
육청풍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시우의 발치에 엎드렸다.
“대사형…… 소인은 밤새 이 번짐의 깊은 뜻을 해독하려다 뇌가 터질 뻔했습니다. 어찌 인간의 머리로 이토록 완벽한 인과율의 수식을 침 한 방울로 증명해 내신단 말입니까! 대사형의 깊은 안목에 이 육청풍, 영혼까지 굴복했습니다!”
“우오오오오!”
연무장에 모인 제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사형! 천하제일의 천재이시여!”
“침 한 방울로 검선의 비전을 해독하시다니!”
시우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침 한 방울로 해독은 무슨…… 그냥 졸려서 침 흘린 건데…… 진짜 미치겠네.’
시우는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그는 억울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아니…… 얘들아, 진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그냥 감자 싹 구멍이고…… 모르겠소, 감자나 주시오라고 적은 건 진짜 내가 몰라서 감자나 먹고 싶어서 적은 거야……”
그 순간, 철면장로 위지관이 눈물을 흘리며 시우의 손을 꽉 쥐었다.
“보아라! 대사형의 저 겸손함을! ‘모르겠소’라는 것은 이미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대우치경에 도달하여 스스로의 지식을 비워냈다는 선가(仙家)의 화두요! ‘감자나 주시오’의 감자(土)는 만물의 근원인 대지를 뜻하니, 결국 세상의 헛된 명예를 버리고 대자연의 순리로 돌아가겠다는 궁극의 무위자연 사상을 던지신 것이 아닌가!”
“감자의 싹마저 대도의 이치로 보시는 혜안! 참으로 눈물겹도다!”
장로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시우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제는 그 어떤 해명도 ‘지존의 겸손한 선문답’으로 필터링되어 돌아오는 철옹성 같은 착각의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다.
반면, 확실한 물증으로 시우를 매장하려 했던 오진태 장로는 이 믿을 수 없는 전개에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자신의 치밀한 음모가 천재 사제들의 과도한 지능과 시우의 황당한 침방울에 의해 완벽하게 역관광당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이것은 사기다…… 말도 안 되는 억지란 말이다!”
오진태는 극심한 인지부조화와 분노로 인해 가슴을 움켜쥐었다. 단전에서 역류한 내력이 그의 심맥을 강타했다.
“푸학!”
오진태는 붉은 피를 토하며 단상 바닥으로 쓰러졌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더욱 감탄했다.
“보아라! 이장로가 대사형의 심오한 진법도를 강제로 해독하려다가 그 무서운 기운에 눌려 주화입마에 빠졌다!”
“대사형의 낙서장은 손만 대도 주화입마를 부르는 천기진법도였구나!”
시우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 오진태와, 자신을 향해 맹목적인 눈빛을 보내는 사제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내 50냥…… 내 감자 농사…… 이렇게 또 은퇴가 날아가는구나.’
오진태는 부축을 받으며 실려 가면서도, 시우를 향해 독기 서린 눈빛을 번뜩였다. 공식적인 방법으로는 저 괴물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물리적인 암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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