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태의 음모와 공포의 백련각
“내일 아침, 대사형의 무학 깊이를 검증하기 위한 공식 필기시험을 거행하겠소!”
청명검종의 이장로, 오진태의 목소리가 장로회 전각을 서늘하게 울렸다. 그의 날카로운 매부리코 아래로 비열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대사형의 자리에 오른 한시우를 가짜라 의심하던 오진태에게, 이번 무학 검증 시험은 눈엣가시 같은 놈을 합법적으로 파멸시킬 최고의 덫이었다.
그 시각, 뒤뜰 창고방에 처박혀 있던 한시우는 청천벽력 같은 시험 소식을 전해 듣고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시험? 내가? 무학 필기시험을 본다고?’
시우는 침상 위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영맥이 시멘트처럼 단단히 막혀 단 1푼의 내공도 부릴 줄 모르는 순도 백 퍼센트의 일반인이었다. 기문둔갑이니, 검결의 이치니 하는 심오한 무협 이론을 알 턱이 없었다. 시험지에 백지를 내는 순간, 자신이 무공 한 자락 모르는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천하에 폭로될 것이 분명했다.
“들통나면 죽는다…… 진짜로 목이 날아가서 청명산 호랑이 밥이 될 거야!”
시우는 공포에 질려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그의 비상한 생존 회로가 기발한 꼼수 하나를 찾아냈다.
‘잠깐만. 문파 규율에 뭐라고 적혀 있었지?’
시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청명검종의 백 년 된 규율 장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대사형의 직위에 오른 자가 공식 무학 검증에서 낙제점을 받을 경우, 문파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물어 즉시 대사형의 직위를 박탈하고 파문( expulsion )에 처한다.]
파문!
그토록 원하던 합법적인 퇴출이었다! 게다가 파문당할 때 지급되는 위로금 겸 퇴직금 은자 50냥도 규정대로 수령할 수 있었다.
시우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번뜩였다.
‘그래! 이번 시험에서 완벽하게 빵점을 받는 거야! 아무도 변명해 줄 수 없을 만큼 처참하고 한심한 점수를 받아서 쫓겨나는 거지! 그러면 은자 50냥을 당당하게 챙겨서 고향 감자밭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어!’
시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의를 다졌다. 이름하여 ‘고의 낙제 기술’이었다. 절대 들통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망하는 답안지를 작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시험 장소인 청명검종 내당 ‘백련각’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련각은 평소 정예 제자들이 정좌 수련을 하거나 장로들이 엄숙한 학술 토론을 벌이는 신성한 전각이었다. 바닥에는 차가운 청석이 깔려 있었고, 전각 중앙에는 거대한 향로에서 피어오른 뽀얀 향연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사형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지기의 웅장한 외침과 함께 시우가 백련각 내부로 걸어 들어왔다. 시우는 밤새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생긴 짙은 다크서클과, 공포로 인해 굳어버린 표정으로 일주문을 통과했다. 제자들은 그 무심하고도 오만한 눈빛—실실 풀린 졸린 눈—을 보며 일제히 숨을 죽였다.
“보아라. 대사형의 저 초연한 풍모를.”
“시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저 여유로운 걸음걸이…… 참으로 지존의 기풍이로다.”
제자들의 맹목적인 속닥거림을 들으며 시우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여유는 무슨…… 무서워서 다리가 풀린 거라고!’
전각 중앙의 상석에 앉아 있던 오진태 장로가 시우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의 옆에는 시험관들과 제갈세가에서 유학을 온 지략가 사제, 제갈우진이 매서운 눈빛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대사형, 자리에 앉으시오. 이번 시험은 청명검종 천년 역사상 가장 난해한 기문둔갑과 진법의 이치를 묻는 질문들로 구성되었소.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기초 학문이 부족하다면 결코 풀 수 없을 것이오.”
오진태의 비열한 경고에 시우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거대한 백지 두루마리와 검은 먹물이 가득 담긴 벼루, 그리고 서슬 퍼런 붓이 놓여 있었다.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시우는 시험지를 펼쳤다. 그리고 첫 구절을 읽는 순간, 머릿속이 완벽하게 하얗게 탈색되었다.
[제1문: 태을신수(太乙神數)의 음양 조화선에 따른 기문팔진(奇門八陣)의 방위각 변화를 서술하고, 검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인과율의 수식을 증명하라.]
‘……이게 대체 뭔 개소리야?’
시우는 눈을 깜빡였다. 한글로 적혀 있기는 했지만, 그 단어들의 조합은 시우에게 외계어와 다름없었다. 인과율? 방위각? 기맥이 막힌 시우에게는 옆집 개 이름보다 낯선 단어들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벽해! 정말 완벽하게 모르는 문제들뿐이잖아! 잔머리를 굴려 대충 찍을 필요도 없어. 그냥 대놓고 망치면 돼!’
시우는 오진태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진태는 시우가 당황해 시험지를 찢어발기거나 기권하기만을 기다리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우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로 결심했다.
어설픈 오답을 적었다가는 장로들이 ‘대사형의 깊은 뜻’이라며 억지로 정답으로 채점해 줄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지난번에도 자신의 불평이 무공 구결로 박제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번에는 아예 학술적 가치라고는 단 1푼도 없는, 완벽한 ‘쓰레기 낙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시우는 붓을 쥐었다. 그리고 벼루에 검은 먹물을 듬뿍 묻혔다. 먹물이 붓끝에서 뚝뚝 떨어져 깨끗한 시험지 위로 검은 얼룩을 남겼다. 오진태의 눈썹이 꿈틀했다.
시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시험지에 그리기 시작한 것은 무공 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고향의 따뜻한 흙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감자’였다.
시우는 시험지 한가운데에 커다랗고 둥글둥글한 감자 한 알을 정성스럽게 그렸다. 그리고 감자의 표면에 삐죽삐죽 돋아난 ‘감자 싹’들을 무작위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표시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도와 감자 농사를 지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감자 싹 도려내기 공식을 떠올리며 그린 낙서였다.
붓끝이 시험지 위를 이리저리 뒹굴며 검은 동그라미들과 기괴한 선들을 만들어냈다. 시우는 내친김에 감자 그림 옆에 삐뚤빼뚤한 악필로 큼지막하게 한 문장을 갈겨썼다.
[모르겠소, 감자나 주시오.]
완벽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불성실 답안지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시험관을 모독하고 문파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최악의 낙서장이었다. 시우는 자신의 천재적인 ‘고의 낙제 기술’에 스스로 감탄하며 붓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때, 지독한 피로감이 시우의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밤새 도망칠 궁리를 하느라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여파였다. 시우는 붓을 쥔 채 고개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스스슥…… 툭.”
졸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시우의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지며, 그의 입가에서 맑은 침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침방울은 먹물이 가득 묻은 붓끝을 타고 시험지 정중앙으로 흘러내려, 검은 먹물 자국을 사방으로 번지게 만들었다. 웅장한 침과 먹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인해, 시우가 그린 감자 낙서와 무작위 동그라미들은 기묘하게 번지며 정체불명의 기하학적 문양을 형성했다.
시우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앗, 침 흘렸다! 들키면 안 되는데!’
시우는 황급히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장로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 침을 흘린 것까지는 보지 못한 듯했다.
댕— 댕— 댕—!
시험 종료를 알리는 웅장한 종소리가 백련각 내부에 울려 퍼졌다.
오진태 장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소! 대사형, 답안지를 제출하시오!”
오진태는 바람처럼 단상 아래로 내려와 시우의 탁자 위에 놓인 ‘한시우의 낙서장’을 강탈하듯 낚아챘다. 시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쌀 준비를 했다.
‘끝났다. 이제 이 썩을 문파와도 안녕이구나. 50냥을 받으면 무슨 감자 품종부터 심을까?’
시우의 입꼬리가 승리의 미소로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오진태가 시우의 낙서장을 들고 채점관들의 탁자로 돌아가 시험지를 펼쳐 든 순간, 백련각 내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오진태의 비열한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시험지를 내려다보는 그의 매서운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오진태의 떨리는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제갈세가의 천재 지략가 제갈우진이 다가와 시험지를 들여다보았다. 순간, 제갈우진의 안광이 번개라도 맞은 듯 번뜩였다. 그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며, 시험지를 쥔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 이럴 수가……! 이것은……!”
제갈우진의 경악에 찬 비명이 백련각의 장엄한 정적을 산산조각 내었다. 채점관들과 장로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의 낙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눈빛이 흔들리며, 전각 전체에 기묘한 폭풍전야의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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