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노인의 가짜 부적과 뜻밖의 역관광
“임 사매, 제발 진정하고 이제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라. 응? 대사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한시우는 등 뒤로 ‘금이 간 숭늉 대접’을 악착같이 숨기며 식은땀을 흘렸다.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임서율의 전신에서는 여전히 맑고 뜨거운 정종 내력이 붉은 영기 아지랑이가 되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십 년 동안 그녀의 골수를 갉아먹던 한독(寒毒)이 완벽하게 씻겨 나간 것도 모자라, 단숨에 이류 초입의 고수로 각성했으니 그 기쁨이 오죽하겠냐마는, 시우에게는 그저 시한폭탄의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대사형! 이 서율, 대사형께서 저 같은 미천한 사매를 구하기 위해 백초옹 어르신의 천년 영약을 이 낡은 숭늉 대접에 몰래 타서 하사하셨음을 온 영혼으로 깨달았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목숨을 바쳐 보답하겠습니다!”
서율이 바닥에 이마를 쾅 조아릴 때마다 창고방 문틀이 흔들렸다. 시우는 울고 싶었다.
‘내가 무슨 영약을 타 줬다고 그래! 난 그냥 지옥같이 쓰고 비린 약을 버릴 데가 없어서 대충 숭늉 그릇에 쏟아부었을 뿐이라고! 제발 눈 좀 떠라, 이 미친 사매야!’
하지만 이미 서율의 동공은 맹목적인 종교적 광신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이 사실이 바깥을 지키고 있는 철면장로 위지관이나 사제들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한시우는 ‘천년 영맥을 뚫은 천재 대사형’을 넘어 ‘죽어가는 이도 살려내는 치유의 신의(神醫)’로 박제될 터였다. 명예의 감옥이 갈수록 단단해져 도망칠 틈이 아예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시우는 쑤셔오는 요추 디스크의 통증을 참으며 억지로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사매의 마음은 잘 알았소. 하지만 도(道)란 본래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법. 내가 약을 준 것은 그저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하니, 부디 이 일을 장로님이나 다른 사제들에게 발설하지 말고 조용히 물러가 수련에 정진하시오.”
“아아……! 은혜를 베풀고도 공을 탐하지 않으시는 저 초연한 기풍! 대사형의 가르침대로 소매, 입을 굳게 다물고 오직 대사형의 그림자가 되어 은밀히 보좌하겠습니다!”
서율은 눈물을 훔치며 다시 한번 깊이 절을 올린 뒤, 마치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창고방을 빠져나갔다. 이류 고수로 각성한 덕분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서율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시우는 침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빈 숭늉 대접을 깊숙한 구석에 처박아 숨겼다. 그리고 품속을 더듬어 장만복에게 받은 묵직한 ‘은자 백 냥 주머니’를 꺼내 만져보았다. 차가운 은자들의 감촉만이 이 지옥 같은 오해의 늪에서 유일한 위안이었다.
‘은자 백 냥이나 있으니 이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오늘 밤에 당장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하는데…….’
문제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삼엄한 경비망이었다. 황실 금위군 대장 강백과 근위대원들이 처소 주변을 24시간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내일 아침이면 남궁세가 가주 남궁벽과 무림맹 감사단이 기다리는 남궁 영지 회합으로 강제 출발해야 했다. 남궁 영지에 끌려가는 순간, 진짜 무림 고수들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 자신의 무공 제로 실태가 1초 만에 뽀록나 참수당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내일 아침의 출발식을 무산시켜야 해. 출발이 지연되기만 하면, 이 소란을 틈타 밤중에 은자 백 냥을 들고 개구멍으로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출발을 합법적으로 늦출 기막힌 방법이 필요했다. 문파에 아주 거대하고 흉흉한 ‘액운’이나 ‘재앙’이 닥쳐서 감히 마차를 굴릴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 시우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꼼수가 스쳐 지나갔다. 시우는 침상 밑 목조 보관함 구석에서 먼지 쌓인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누렇게 바랜 노란 종이 뭉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바로 청명현 시장통의 유명한 야바위 사기꾼, 장노인(장노인)에게서 동정심으로 구매했던 ‘장노인의 가짜 부적’들이었다.
당시 장노인은 이 부적들을 가리켜 “가옥을 파괴하고, 나무를 썩게 만들며, 지붕의 기와를 무너뜨려 천지의 불운을 불러오는 절대 액막이 부적”이라고 사기를 쳤었다. 실제로는 조잡한 닭 피와 들기름, 그리고 싸구려 주사(朱砂) 가루를 대충 섞어 그린 아무 효력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주사 성분과 들기름 때문에 만지면 손이 끈적거리고 썩은 비린내가 풍기는 쓰레기였지만, 시우에게는 이보다 더 완벽한 도구가 없었다.
‘이 가짜 부적들을 문파의 상징인 정문 일주문(一주문) 기둥에 잔뜩 붙여놓는 거야! 장노인 말대로 이 끈적거리는 기름 부적들이 기둥의 나무를 갉아먹거나, 아니면 기와가 무너지는 흉흉한 징조가 보인다면 장로들이 기겁해서 출발을 사흘은 미루겠지! 그 사흘 동안 난 야반도주를 하면 되는 거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시우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부적 뭉치를 품속에 쑤셔 넣었다.
***
깊은 밤, 자정이 넘은 시각.
청명산 초입에 위치한 청명검종 일주문(일주문) 주변은 밤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일주문은 과거 천년 영맥 폭발 이후 황실의 자금으로 대대적으로 Renovated(새단장)되어, 거대한 붉은 기둥과 화려한 청기와가 달빛을 받아 장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우는 도포 자락을 허리띠에 꽁꽁 묶은 채,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정문을 향해 기어갔다. 수련 방해 금지령 덕분에 보초 무사들은 대사형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일주문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초소에 몰려 있었다. 그야말로 꼼수가 만들어준 완벽한 범죄의 기회였다.
“으스스하네. 왜 이렇게 추워?”
시우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일주문의 거대한 좌측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품속에서 끈적거리는 장노인의 가짜 부적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들기름과 닭 피가 썩어 묘하게 시큼하고 비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우는 부적 뒷면에 장만복의 잡화점에서 슬쩍해 온 끈적끈적한 쌀 풀을 잔뜩 발랐다.
‘기둥 가장 아래쪽에 붙여두면 나무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겠지? 흐흐, 내일 아침에 장로들이 이걸 보면 문파에 마교의 저주가 내렸다며 난리를 칠 거야.’
시우가 낄낄거리며 부적을 기둥 밑동에 붙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문 기둥 바로 아래, 어두운 배수로 그늘 속에서 미세한 쉭쉭 소리와 함께 푸르스름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검은 야행복을 입고 온몸에 살기를 감춘 혈교의 하급 살수, 귀영(귀영)과 그의 부하 자객들이 숨 죽이고 있었다.
귀영은 혈교의 교주로부터 “청명검종의 정문을 폭파하여 정파 연합의 사기를 꺾고 대사형 한시우에게 선전포고를 하라”는 극비 지령을 받고 침투한 참이었다. 그들은 일주문의 주춧돌 지하 깊숙한 곳에 혈교 비전의 화약 장치인 ‘멸문마화탄(滅門魔華彈)’을 매설해 두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 폭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영은 품속에서 불씨를 꺼내 도화선 끝에 대고 있었다.
‘흐흐흐, 한시우…… 네놈이 아무리 천기를 읽는 검선이라 할지라도, 이 정문 지하에 숨겨진 마화탄의 폭발을 막을 수는 없다. 폭발과 함께 네놈의 명성도 청명산의 흙먼지가 될 것이다.’
귀영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도화선에 붉은 불꽃을 당겼다. 지직거리며 타들어 가는 도화선의 불꽃이 어둠 속에서 뱀처럼 기어가기 시작했다. 폭발까지 남은 시간은 단 10초였다.
바로 그때, 기둥 반대편에서 부적을 붙이려던 시우의 귀에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직…… 지지직…….”
‘어라? 이게 무슨 소리지? 꼭 주방에서 팽가가 고기 구울 때 기름 튀는 소리 같은데?’
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기둥 밑동을 바라보았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둥 아래 배수로 구석에서 붉은 불꽃이 빠르게 기어 올라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야간 순찰을 돌던 보초 무사 박칠성의 묵직한 발소리와 횃불 빛이 정문 계단 아래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누구냐! 거기 정문 밑에 있는 자가 누구냐!”
박칠성의 우렁찬 사자후가 밤공기를 찢었다.
시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으아악! 보초다! 들통나면 야반도주 준비고 뭐고 밤중에 문파 건물 훼손죄로 즉시 장문각 감옥에 갇힐 거야!’
공포에 질린 시우는 다급하게 부적을 떼어내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장만복의 강력한 쌀 풀을 너무 많이 바른 탓에, 장노인의 가짜 부적들이 그의 손가락 끝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아으, 이 더러운 부적 왜 안 떨어져! 장노인 이 사기꾼 영감탱이, 풀을 뭘로 만든 거야!”
시우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발버둥을 치다가 찢어진 도포 자락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잃고 뒤로 크게 고꾸라졌다.
“으악!”
시우가 뒤로 자빠지며 손을 허공으로 냅다 휘두르는 순간, 손가락 끝에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가짜 부적 한 장이 원심력을 얻어 공중으로 힁 날아갔다.
나풀거리며 떨어진 부적의 낙하 궤적은 실로 기막혔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부적은 정확히 일주문 주춧돌 아래, 귀영이 매설해 둔 마화탄의 공기 흡입구이자 도화선의 불꽃 바로 위로 툭 떨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종이 부적은 불꽃에 타버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장노인이 부적에 바른 ‘특별한 주사 성분’이 화근이었다. 장노인은 부적의 붉은빛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청명현 광산에서 싸구려로 흘러나온 가공되지 않은 황(黃)과 저급 인(燐), 그리고 닭 피와 상한 들기름을 뒤섞어 주사 가루를 제조했었다.
이 휘발성 물질들이 범벅된 끈적한 부적이 도화선의 불꽃과 닿는 순간, 화학적 대폭발 반응이 일어났다.
치이이이익—!
부적에 스며들어 있던 상한 들기름과 황 성분이 도화선의 산소 공급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불꽃을 단숨에 질식시켜 꺼버렸다. 동시에, 부적의 끈적한 쌀 풀이 마화탄의 핵심 점화 뇌관 구멍을 끈적하게 메워버려 압력을 역류시켰다.
배수로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귀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기괴한 현상에 동공을 지진 난 듯 흔들었다.
‘종이 한 장이…… 마화탄의 도화선을 질식시켜 꺼뜨렸다고?! 게다가 저 붉은 광채는…… 무림맹 최고의 비전인 천기차단 부적(天氣遮斷符)이 분명하다! 한시우 저 괴물이 내 매복을 이미 읽고 있었단 말인가!’
귀영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뇌관이 막혀 역류한 마화탄 내부의 화약 압력이 폭발 방향을 정문 기둥이 아닌, 배수로 안쪽의 자객들이 숨어 있던 구덩이를 향해 뿜어냈다.
쿠구구구구— 콰아아앙!!!
정문 기둥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나, 배수로 지하 그늘에서부터 엄청난 역폭발의 굉음과 함께 흙먼지와 검은 연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커헉! 으아아악!”
배수로 속에 매복해 있던 귀영과 혈교 자객들이 역폭발의 직격을 맞고, 온몸이 까맣게 탄 채 허공으로 서너 바퀴를 빙글빙글 돌며 정문 앞마당 바닥으로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그들의 전신에서 마공 화약의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귀를 틀어막고 있던 시우는, 눈앞에서 벌어진 대폭발과 하늘에서 굴러떨어진 검은 숯더미 같은 사내들을 보며 뇌 정지가 찾아왔다.
‘어……? 뭐야? 방금 정문 지하에서 뭐가 터진 거야? 저 시커먼 사람들은 또 누구고?’
시우는 공포와 충격으로 인해 전신 근육이 꼿꼿하게 굳어버렸다. 동공이 풀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횃불을 들고 달려온 보초 박칠성과 사제들의 눈에는 폭발의 폭풍 속에서도 단 한 터럭의 흔들림도 없는 ‘절대 지존의 부동심’으로 보였다.
“대, 대사형—!!!”
박칠성이 횃불을 떨어뜨릴 뻔하며 비명을 질렀다. 저 멀리서 소란을 듣고 날아온 철면장로 위지관과 임서율 사매, 그리고 수백 명의 사제들이 현장에 당도했다.
위지관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까맣게 탄 살수 귀영의 가슴팍에 새겨진 핏빛 혈교 문양을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이, 이들은 혈교의 정예 암살대인 귀영대(귀영대)가 아닌가! 정문 지하에 폭약을 매설해 문파를 통째로 날려버리려 했구나! 그런데…….”
위지관의 시선이 기둥 밑동에 붙어 있는, 기묘한 붉은 광채(닭 피와 주사의 화학 반응)를 내뿜는 장노인의 가짜 부적과, 그 아래 꺼져버린 도화선 잔해로 향했다. 위지관의 철면피 같은 얼굴이 극도의 경악과 감격으로 일그러지며 전신을 떨기 시작했다.
“아아! 대사형! 밤중에 잠도 자지 않으시고 홀로 일주문 앞으로 나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군요! 혈교의 암살 음모를 미리 천기로 읽으시고, 천기차단 부적을 정확히 뇌관에 붙여 마화탄의 역폭발을 유도해 적들을 일망타진하시다니!”
“……예? 아니, 저는 그냥 부적을…….”
시우가 멍청하게 말문을 열려 했으나, 뒤따라온 임서율 사매가 눈물을 흘리며 그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다.
“그렇습니다! 대사형께서는 낮에 제 한독을 치료하시느라 영기가 고갈되셨음에도, 문파의 안위를 위해 전신에 땀을 흘리시며 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홀로 마교의 마수들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헌신이로다!”
“대사형! 대사형! 청명의 등불 대사형 한시우!”
수백 명의 사제들이 일제히 대연무장과 일주문 앞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시우의 이름을 웅장하게 연호하기 시작했다.
시우는 찢어진 도포 자락을 붙잡은 채, 밤하늘을 뒤흔드는 광신도 사제들의 함성 소리 속에서 영혼이 가출하는 듯한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니야…… 난 그냥 출발 지연시키려고 가짜 부적 붙이려다 자빠진 것뿐이라고…… 왜 폭탄이 터지고 지랄이야, 왜!!!’
시우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비굴한 웅얼거림은 이미 대협의 준엄한 침묵으로 포장되어 청명산의 밤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은퇴를 향한 그의 퇴로는 다시 한번 완벽하게 차단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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