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약 사매와 숭늉 대접의 기적
최영감의 대나무 곰방대가 허공에서 멈칫하자, 대연무장 초입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바닥에 이마를 찧고 있는 철면장로 위지관의 넓은 등짝을 바라보며, 시우의 부친 한필두와 동네 이장 최영감은 서로의 얼굴을 황당하다는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의 상식 속에서 중원의 명문이라 불리는 청명검종의 장로가, 일개 시골 노인의 등짝 스매싱과 곰방대 위협에 납작 엎드려 울부짖는 광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변고였다.
‘이 미친 늙은이들이 단체로 우리 시우 놈한테 약이라도 받아 처먹은 건가?’
필두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지독한 불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들이 무공은커녕 감자 싹과 잡초도 구별하지 못하는 순도 100%의 범인이라는 사실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도포 차림의 무사들은 아들의 등짝 매질을 ‘가문의 비전 기혈 타격법’이라 찬양하며 눈물까지 흘리고 있으니, 이 사기극의 규모가 자신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음이 분명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진짜로 가문이 역모죄나 사기죄로 멸문지화를 당할 터였다.
시우 역시 흙바닥에 주저앉아 욱신거리는 등짝을 문지르며 사색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아버님과 이장님이 “이놈은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사기꾼이다!”라고 소리치는 순간, 자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황실 금위군 대장 강백의 매서운 환도가 자신의 목덜미를 가볍게 날려버릴 것이 분명했다.
시우는 필사적으로 다리가 풀려 덜덜 떨리는 것을 감추며, 흙바닥을 기어가듯 움직여 아버님과 최영감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장로들의 눈을 피해 쥐어짜듯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부지! 이장님! 제발 일단 가만히 계셔봐요! 나중에, 나중에 고향 가서 다 설명할 테니까 제발 지금은 그냥 맞춰주세요! 저 저기 서 있는 무서운 군인들 칼 보이죠? 저 사람들 눈 뒤집어지면 우리 다 같이 감자밭 흙으로 돌아가요!”
시우의 절박하다 못해 처절한 눈물 어린 호소에 최영감은 곰방대를 슬그머니 내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시골 이장 짬밥으로 다져진 눈치로 보아, 지금 여기서 판을 깨버렸다간 자신들도 무사히 청명현을 빠져나가지 못할 분위기였다. 주변 제자들의 눈빛은 이미 종교적인 광신으로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으흠! 내 가문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이놈을 가볍게 훈육했을 뿐이거늘…… 문파의 장로가 이토록 간청하니 내 이번 한 번만은 대사형의 체면을 보아 매질을 멈추겠소.”
최영감이 대나무 곰방대를 허리춤에 찔러 넣으며 짐짓 웅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위지관은 감격에 겨워 전신을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아! 은거 기인 어르신의 크나큰 자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대사형의 고결한 가풍을 본받아 저희 청명검종도 더욱 수련에 정진하겠습니다!”
제갈선 원로 역시 수염을 쓸어내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겨우 황실 가마에 탑승하려 했으나, 등짝 스매싱의 타격으로 인해 전신 요추와 어깨가 쑤셔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가마에 타는 대신, 당분간 몸을 추스르고 남궁 영지 회합으로의 출발을 조금 늦추기로 합의를 보았다. 아버님과 최영감은 장로들의 극진한 산삼 대접에 얼이 빠진 채 서둘러 고향 마을로 도망치듯 귀가했고, 시우는 겨우 자신의 아늑한 안식처인 뒤뜰 창고방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
낮은 깊어 가고, 처소 뒤편의 대나무 숲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시우의 마음은 지옥과 같았다.
“아이고, 허리야…… 아부지는 무슨 농사짓던 힘으로 등짝을 그렇게 사정없이 때리신대? 진짜 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네.”
시우는 낡은 침상 위에 엎드려 끙끙거리며 신음했다. 요추 디스크가 찌릿하게 울릴 때마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게다가 수중에 은자 백 냥이라는 거액의 비자금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문 앞을 24시간 삼엄하게 감시하는 황실 근위대원들과 사제들의 눈길 때문에 도망칠 틈을 전혀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명예의 감옥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탁자 위에는 지독하게 쓰고 비린 한약재 냄새를 풍기는 시커먼 액체가 사발 가득 담겨 있었다. 어제 괴팍한 약초꾼 백초옹이 시우의 막힌 기맥을 뚫어주겠다며 강제로 배달해 온 ‘백초옹의 영약’이었다. 천년 만년삼의 엑기스를 삼일 밤낮으로 달여냈다는 그 약은, 냄새만 맡아도 뇌의 모든 세포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지독한 맛을 자랑했다.
“이걸 마시라고 달여온 거야, 아니면 사람을 잡으려고 달여온 거야? 냄새만 맡아도 십 년 전에 먹은 감자가 역류할 것 같네.”
시우는 코를 움켜쥐며 약사발을 멀리 밀어냈다. 하지만 그냥 버렸다간 백초옹이 약사발을 검사하러 올 터였고, 방을 치워주는 삼월이에게 들통나 “대사형께서 영약을 낭비하셨다!”며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완전범죄를 위한 꼼수가 필요했다.
시우는 주방 찬장 구석에서 가져온 ‘금이 간 숭늉 대접’을 바라보았다. 원래 버려지기 직전의 사발이었으나, 일전에 대연무장에서 천년 영맥이 대폭발할 때 흘러나온 미세한 영기가 틈새로 영구 코팅되어 기묘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신성한 식기였다. 시우는 숭늉 대접에 담겨 있던 따뜻한 숭늉물에 백초옹의 영약을 슬그머니 부어 섞기 시작했다.
검은 한약재 액체가 숭늉의 뽀얀 물과 섞이자, 냄새가 한결 옅어지며 은은한 고소함이 섞인 기묘한 향으로 변했다. 시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접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흐흐, 이렇게 희석해 두었다가 밤중에 화단에 몰래 부어버리면 아무도 모르겠지. 완전범죄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창고방의 낡은 나무문 바깥에서 둔탁하고 무거운 타격음이 들려왔다. 무언가 가녀린 물체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시우는 흠칫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뭐지? 보초들이 졸다가 넘어졌나? 아니면 자객인가?’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 빠진 목검을 손에 꽉 쥐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틈새를 타고 들어온 것은 차가운 얼음 계곡의 서리 같은 한기(寒毒)였다. 그리고 문턱 바로 아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쓰러져 덜덜 떨고 있는 한 소녀가 보였다.
청명검종의 병약한 사매, 임서율이었다.
“임 사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시우는 기겁하며 목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서율은 창백한 안색에 입술이 퍼랗게 얼어붙은 채, 가녀린 어깨를 사시나무 떨듯 떨며 신음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음독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기맥이 약해 십 년 동안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던 ‘한독(寒毒)’의 대발작이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으, 으윽…… 대, 대사형…… 추, 추워요…… 몸이…….”
서율은 하얀 손수건을 쥔 채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시우의 도포 자락을 붙잡으려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서리가 맺히는 듯한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시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큰일났다! 진짜 큰일났어! 이 사매가 왜 하필 내 방 문앞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거야? 여기서 숨이라도 끊어졌다간 위지관 장로랑 제자들이 내가 사매를 해쳤다고 오해할 거 아냐! 아니면 황실 경호원들이 와서 나한테 인공호흡이나 내공 주입을 하라고 윽박지르겠지!’
시우에게는 단 1g의 내공도 없었다. 만약 내공 주입을 하려다 기맥이 텅 빈 것이 들통나는 순간, 자신의 사기꾼 정체는 백일하에 드러나 참수를 면치 못할 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사매를 깨워서 제 발로 걸어가게 만들어야 했다.
“마, 마당쇠야! 삼월이야! 누구 없느냐!”
시우가 목청껏 소리쳤지만, 마침 마당쇠와 삼월이는 장만복의 굿즈 배달을 돕기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보초 무사들마저 ‘대사형의 숙면을 방해하지 말라’는 수련 방해 금지령 때문에 저 멀리 외곽 경계선으로 물러나 있어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서율의 호흡이 점차 가늘어지며 동공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신 기맥이 차가운 한독에 완전히 얼어붙어 심장이 멈추기 일보 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시우는 다급하게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탁자 위에 놓인 ‘금이 간 숭늉 대접’을 발견했다.
‘맞아! 사람이 얼어 죽을 것 같을 때는 따뜻한 물을 먹여야 해! 비록 백초옹의 쓴 약이 섞여 있긴 하지만, 따뜻한 숭늉물로 위장이라도 녹여주면 정신을 차리겠지! 제발 이거 마시고 깨어나서 니 방으로 가라!’
시우는 숭늉 대접을 들고 서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억지로 벌린 뒤, 따뜻한 약 섞인 숭늉물을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냅다 부어 넣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서율은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따뜻한 액체를 삼켜 내려갔다.
그 순간, 청명검종 천년 역사에 기록될 기적의 인과율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서율이 마신 것은 단순한 한약 섞인 물이 아니었다.
그릇은 바로 영맥 폭발 당시 순수한 대지의 기운이 영구 코팅된 ‘금이 간 숭늉 대접’이었다. 이 대접의 미세한 균열 틈새에서 뿜어져 나온 천년 영맥의 정기가, 백초옹이 달여온 천년 만년삼의 약력을 화학적으로 완벽하게 활성화시키는 최고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만약 백초옹의 약을 원액 그대로 마셨다면, 기맥이 약한 서율의 몸은 가공할 약력을 견디지 못하고 기혈이 뒤틀려 폭사했을 터였다. 하지만 시우가 숭늉물로 약을 절묘하게 희석한 덕분에, 약력은 서율의 약한 기맥에 가장 부드럽고 완벽하게 흡수될 수 있는 최적의 배합 비율로 변모해 있었다.
뜨거운 숭늉물이 서율의 위장을 통과하는 순간, 지독하게 엉켜 있던 약력과 영맥의 정기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치이이이익—!!!
서율의 입과 코, 그리고 전신의 모공에서 하얀 수증기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십 년 동안 그녀의 골수를 얼려두었던 지독한 한독(寒毒)이 기화되어 배출되는 증기였다.
“으, 아아아아……!”
서율이 전신을 크게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단전 내부에서 차가운 얼음 장벽이 깨지는 듯한 파열음이 뇌리를 때렸다.
쿠구구구구!
막혀 있던 전신의 기맥이 영맥의 정기와 만년삼의 기운에 의해 고속도로처럼 넓어지며 shatter open(완벽하게 관통)되기 시작했다. 십 년간 그녀의 몸을 갉아먹던 음독은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정화되었고, 그 자리에 맑고 뜨거운 정종 내력이 폭포수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수련하던 ‘유수무애 기공심법’이 궁극의 단계로 각성하며, 서율의 몸 주변으로 붉은색과 푸른색이 조화롭게 섞인 찬란한 영기의 후광이 일렁였다. 범인에서 단숨에 ‘이류 초입’의 고수로 경지가 수직 상승하는 기적의 순간이었다.
서율은 천천히 동공의 초점을 회복했다. 그녀의 양볼에 백옥 같은 생기가 돌고, 얼어붙었던 입술이 붉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가공할 힘과 정화된 육체의 가벼움에 경악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내, 내 한독이…… 기맥이 완전히 뚫렸어……?”
서율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대사형 한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여전히 숭늉 대접을 든 채, 사매의 몸에서 붉은 영기가 뿜어져 나오는 기괴한 광경에 압도되어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흐릿하고 졸린 눈빛(사실은 너무 놀라 뇌 정지가 온 표정)은, 서율의 눈에는 모든 기적을 예견하고 담담하게 결과를 지켜보는 ‘무위지존’의 자비로운 안광으로 비쳤다.
서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시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백초옹의 전설적인 영약을 숨겨두었다가, 가장 완벽한 비율로 숭늉에 타서 건넸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 빠진 숭늉 대접이야말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대사형의 눈물겨운 희생이자 성물이었다.
“대, 대사형……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서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붉은 영기를 휘날리며 시우의 발끝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오열하듯 외쳤다.
“대사형 한시우여! 제 생명을 구해주시고 막힌 기맥을 뚫어주신 크나큰 은혜, 이 임서율의 평생을 걸고 보답하겠습니다! 대사형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어, 어? 사매? 잠깐만 일어나 봐…….”
시우는 당황하여 전신을 떨며, 들고 있던 금이 간 숭늉 대접을 슬그머니 도포 자락 뒤로 숨겼다. 이 대접에 담겨 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이 먹기 싫어 버린 약이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진짜로 큰일 날 터였다. 하지만 서율의 눈빛은 이미 광신적인 충성심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시우의 은퇴 계획은 또 하나의 거대한 ‘구원자 신화’라는 족쇄에 묶여 영원히 도망칠 길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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